[제주 근대건축 산책] (2) 섬이라는 이유로

본격적인 연재에 앞서 ‘근대’라는 말을 규정지을 필요가 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근대라고 봐야할까. 사전을 펼쳤다. ‘얼마 지나가지 않은 가까운 시대’란다. 도무지 가늠이 어려운 뜻이다.

흔히 근대사에선 1876년 개항이후부터 1945년 해방까지를 구분 짓고 있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다르다. 한반도 가장 남쪽, 게다가 섬인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전형적인 도시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도시화가 가장 더딘 탓에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기도 하다.

때문에 ‘제주의 근대 건축’, ‘제주 근대의 건축’은 완전히 다른 뜻을 지닌다. 보통 제주에서의 근대를 1960년대까지라 구분 짓지만 [제주 근대건축 산책]에서는 1970년대 건축물까지 포함시키기로 했다. 육지부에 비해 제주가 뭐든 10년 정도 늦다는 통설은 건축에서도 빗겨가지 않기 때문이다.

해방을 거쳐 미군정시대, 한국전쟁과 5.16을 겪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주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전형적인 근대건축양식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늦지만 이것 역시 제주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증거다. 

▲ 일식 주택 양식이 배어든 주정 공장 사택. <사진 제공=김태일 제주대 교수>

 

▲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한 알뜨르 비행장. 한국근대사의 아픈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사진 제공=제주대 김태일 교수>

1900년대 초부터 제주성내 동서남북문이 걷어지고 관덕정광장과 산지포구를 잇는 도로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도시화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1920년 산지항이 제주 공식항으로 지정되고 방파제가 만들어지면서 외부에서 건자재가 드나들었다. 그제야 ‘근대’ 성격을 지닌 건축물들이 지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와 맞물려 일식건축물들이 점차 늘어갔다. 대부분 별 디자인도 없는 개방적인 양식의 일식건축물이었는데 제주의 바람에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현무암으로 벽체를 보강하거나 유리문을 덧다는 등의 묘한 조합을 만들어냈다.
 
산업화를 위한 시설들도 속속 생겨났다. 대체로 일본의 수탈을 위한 시설이었다. 수탈의 상장인 주정 공장을 비롯해 제주시 산지항, 한림, 모슬포, 서귀포 등 육지와 연결이 편리하고 원료나 인력공급이 쉬운 지역에 들어섰다.

1937년 이후 일본은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제주도 곳곳에 방공포 진지 등을 구축하고 병력 7만을 제주에 주둔시켰다. 대표적인 곳이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한 알뜨르 비행장이다. 중국의 공군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건설된 이곳은 주민들이 살던 곳을 제대로 된 보상 없이 몰수한 후 노동력까지 착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는 205, 폭 18.7m, 높이 3.6m 길이 11m로 현재 국내 최대 규모의 일제시대 군사유적지로 한국근대사의 아픈 상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해방 직후의 제주를 가로지르는 열쇳말은 ‘혼란’과 ‘격변’이다. 나라는 되찾았지만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한반도가 양분되면서 미군정이 실시된 데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 등의 상황에 놓여있었다.

 

▲ 옛 제주도청사 전경. <사진 제공=김태일 제주대 교수>

 

▲ 제주대학교 전신인 제주초급학교 전경. 옛 제주시청사를 설계했던 박진후 선생이 지은 건물이다. ⓒ제주의소리

이 가운데 변화의 기운이 조금씩 싹텄다. 1950년대 초부터 제주도청, 제주시청, 제주축항사무소 등 관청건물이 지어지면서 제주건축의 변화를 주도했다. 남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건축물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특징을 갖는다.

큰 난리를 치르고 난 직후, 가장 절박한 시설은 교육시설이었다. 제주시내를 중심으로 학교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1945년에는 오현중, 제주중이 이듬해에는 제주여중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제주대학교의 전신인 제주초급대학도 1952년에 지어졌다.

1960년대는 특히 ‘제주의 근대건축’과 ‘제주근대의 건축’이 교차하는 시기로 1970년대까지 이 같은 흐름이 계속된다. 국내는 물론 제주 출신의 건축가들이 서서히 이름을 내밀던 시기이기도 하다. 시민회관과 제주관광관광호텔을 지은 경성고공 건축과 출신의 김태식, 광주와 서울서 주로 활동하던 제주 출신의 건축가 김한섭, 제주대 본관과 남제주군청을 지은 김중업 등이 대표적이다.

이때는 우리만의 것들이 많이 생겨난 시기이도 하다.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넘기면서 무언가를 시도할만한 여유가 생긴 덕분이다. 동양극장과 동문시장(1965) 같은 상업 시설과 제주시민회관(1964), 서귀관광극장(1963), 제주문화회관(1969) 등 문화시설도 생겼다.

게다가 제주관광호텔(1963), 제일호텔(1966), 서귀관광호텔(1968) 등 본격적인 숙박시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제주도가 관광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 이 기사는 양상호 국제대 건축디자인학과 교수, 김태일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의 도움을 받아 쓴 것임을 덧붙입니다.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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