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근대건축 산책] (3) 우도·산지·마라도 '제주의 등대' 上 

드디어 줄글을 풀어헤친다. 호기롭게 프롤로그까지 내쳤건만 어깨를 못 펴고 다녔다. 첫 인상이 중요하듯 뭘 처음으로 내보내야하나, 부담감에 주춤했다.

고심 끝에 고른 첫 번째 주인공은 '등대'다. 흥선군의 쇄국정책으로 나라문을 닫아 걸었던 조선이 항구를 열면서 외국 문물이 들어왔다. '개항기'를 가리켜 흔히 근대의 시점으로 보는 데서 근대는 바다에서 시작됐다고 봐도 무리는 아닌 듯 하다.  
 
등대지기라느니 등대 여행이라느니 언뜻 낭만적이기까지 한 등대는 제국주의의 손길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이다. 일본과 조선을 오가는 수단이라곤 배 밖에 없던 시절, 바닷길을 다스려야지만 수월하게 조선 땅을 집어삼킬 수 있던 까닭에서다.

섬속의 섬 우도. 봉긋한 언덕에 위치한 등대 공원에는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지어진, 100살을 훨씬 넘긴 등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연간 100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제주 대표 관광지에 어째서 이토록 오랜 등대가 들어서게 됐을까. 
 
지난 2004년 해양수산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등대 100년사(1903년~2003년)'에 섬 속의 섬 우도에 근대식 등대가 들어선 배경이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노골적으로 조선 땅을 넘보기 시작한다. 역시 조선 땅을 노리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은 대놓고 조선에 항로표지시설을 설치하라고 등을 떠민다. 1902년 해관등대국을 설치한 일본은 인천 팔미도, 월미도 등대(1903)를 시작으로 전국 연안에 등대를 짓는다.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던 일본에게 제주의 성산포는 주요 항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우도와 성산포 사이 우도해(牛島海)는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센 탓에 물자수송이 쉽지 않았다. 참다못한 일본은 1904년 말, 우도에 등대를 짓기로 한다.

 

▲ 우도에 등대 시설을 지어 불을 밝힌 건 1906년이지만 이 같은 모습으로 단장한 때는 1919년이다. 2003년 새로이 등탑을 지으면서 이 등대는 영구 보존을 위해 상징물로 남겨지게 됐다. 사진은 2003년. <사진=부산항만청 제주해양관리단>

우도 등대는 거센 풍랑을 헤치며 2년3개월만에 겨우 지어 1906년 3월 불을 밝혔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급작스레 만들어진 등대는 사실 등대가 아니었다. 목조로 된 원형의 백색 '등간(燈竿)'. 말 그대로 '등불을 단 나무 기둥'이어서 등대라 말하긴 모자라다. 100촉광에 가시거리는 8리(약 32km)밖에 되지 않는 미약한 시설이었다.

1914년 8월 5일자 조선총독부 고시 제 305호에 따르면 조선 남안 우도 등대등질을 '아가'식 가스 연섬광백색 매 4초반시를 간격으로 1초반 간에 2섬광을 발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우도 등대는 여러 차례 고치기를 거듭하며 제 모습을 갖춘다. 나무로 지어진 기둥이 거친 바닷바람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을 터, 1919년 벽돌로 등대를 다시 지어 올리며 지금의 모습을 띠게 됐다. 당시는 벽돌이 귀하던 때였다. 벽돌을 아무데서나 구울 수 없는데다 배에 싣고 가서 다시 벽돌을 올리는 자체가 엄청난 부담이었다. 외딴 섬에 벽돌로 등대를 지었다는 건 그만큼 우도 등대가 지닌 중요성을 짐작하게 한다.

우도 등대는 해방 후에야 비로소 등대다운 역할을 하게 된다. 1959년 유인 등대로 바뀌고나서 1960년 3월 축전지 및 발전기를 사용해 전원을 공급할 수 있는 등명기를 달았다. 안개로 불을 밝힐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해 무신호기를 설치한 것도 이때다.  

▲ 2003년 문을 연 우도의 등대공원 전경. 신화에 등장하는 파로스 등대, 상하이항의 마호타 파고다 등대 등의 모형이 모여 있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현재는 4D영상관에 야외전시실을 갖추고 문화해설사도 활동하고 있다.<사진=부산항만청 제주해양관리단>

2003년 우도 등대는 새로 고쳐 지으며 관광지로 거듭나게 됐다. 물론 처음에 들어선 위치는 아니다. 최신 등대를 옛 등대 옆에 세우고 2006년에는 일반인들이 등대를 체험하고 쉬어갈 수 있는 등대공원과 문화공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원형 대리석조 구조물로 한 눈에도 기상이 호젓하다. 100년의 세월 버티고 선 등대는 그 자체로 '문화'가 되었다.
 
주강현 교수는 "'등대'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봐야한다. 100년의 역사를 간직하면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위치에 자리한 지정학적 조건 덕분에 근대국가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었던 탓에 국가적 보호를 받았기에 근대문화의 원형 또한 잘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 마라도 등대. 1987년에 개축돼 지금은 돌담만이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사진=부산항만청 제주해양관리단>

우도 등대에 이어 마라도등대(1915), 산지등대(1916)가 지어졌다. 어부들의 뱃길을 밝히기 위해 마을마다 돌을 쌓아올린 도대불(등명대라고도 한다)도 빼놓을 수 없지만 제주 등대의 역사는 이때쯤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두 등대 모두 백색 원형의 벽돌 등대다. 기록에는 '연와조 원형 백색' 건물이라 남겨져있다. 총독부 고시 제46호에 마라도 등대 최초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높이는 기초에서 등화까지 2장(丈, 약 6m). 6등급의 백색 섬광이 10초에 한 번씩 비추고, 맑은 날에는 17리까지 빛이 드리워진다. 1987년 개축된 현재 등대는 백색 8각형의 콘크리트 건물이다. 돌담만이 옛 모습을 지키고 있을 뿐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산지등대는 점등한 지 5개월만인 1917년 3월 유인등대로 개편됐다. 현재 산지등대(높이 18m)는 1999년 등탑을 개축한 백색 원형의 콘크리트 건물이다. 80여년 간 사용된 최초의 등탑시설은 현재 산지등대 옆에 세워져있다.

1903년부터 1910년까지 우리나라 초창기 등대는 모두 원형의 등탑이었다. 건물이라고 해봐야 기껏 2~3층 높이였지만 그마저도 도심에서도 보기 어렵던 때, 해안가에 불쑥 솟은 등대는 가히 문화 충격이었다. /下에서 계속.
 
* 이 기사는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양상호 국제대 교수, 부산지방해양항만청 제주해양관리단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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