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만 관객 돌파 '지슬' 숨은 주역 고혁진 피디  

▲ 지슬의 제작사인 설문대영상 고혁진 대표. 제주독립영화협회 대표이기도 하다.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II’이 1만 관객을 돌파했다. 14일 영화진흥위원회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이날 0시 기준으로 13일까지 도내 상영관 158회 상영에 누적 관객수가 9636명이다. 서울과 대구 유료 시사회 관객 733명을 합하면 1만369명이다.

개봉 13일만이다. 제주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멀티플렉스 한 관을 꿰차고 들어간 적도 없지만 1만 관객을 불러들인 건 더더욱 처음이다.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 첫 선을 보인 후부터 ‘지슬’에 줄줄 따라붙은 기록은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포털 사이트에 지슬을 검색하면 숱한 기사가 걸려 있다. 

영화가 빛을 받으며 끓는 가슴 주체 못하던 이가 있다. ‘지슬’의 제작사 설문대영상의 고혁진 프로듀서다. 미술감독으로 고 김경률 감독과 끝나지 않은 세월I을 만들고, 그가 떠나고 설문대영상 대표 자리를 이어받아 끝나지 않은 세월II까지 만들어 내놓은 그는 분명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의 제주대 미술학과 88학번이다. 졸업은 하지 않은 오멸 감독은 90학번으로 그가 4학년일 때 오 감독은 1학년 신입생이었다. 학생 때 그는 그림패로 활동하며 운동권에 몸 담았다.

졸업 후 전업작가로 자기 이름을 걸고 개인전을 두 번 치렀다. 1994년 발족한 탐라미술인협회 회원으로 20여년 간 4.3미술에도 여념 없었다. 영화판으로 옮겨온 것도 순전 4.3 때문이다. 2004년 고 김경률 감독이 4.3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에 미술 감독으로 자연스레 영화 제작에 합류하게 됐다.

4·3을 다룬 다큐는 이미 십 수 편이 있었지만 장편 극영화는 처음이었다. 1년 남짓 걸린 제작 기간, ‘끝나지 않은 세월’을 완성하고 나니 남은 스태프는 고 김 감독과 오은숙 조감독, 고혁진 피디 셋뿐이었다. 그만큼 여건이 열악했다. 

2005년 4월 3일 당시 코리아 극장에서 열렸던 시사회는 사흘 동안 관객이 3000명은 족히 드나들었다. 서서 봐야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영화는 ‘의미 있는 시도’라는 평가로 만족해야만 했다. 처음이니까, 잘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갖은 힘을 다 쏟아 부었던 김 감독은 그해 겨울 세상을 떴다.

영화를 보고 혀를 차던 주변 반응에 그는 각오를 다졌다. ‘언젠간 보여주고 말겠다’는 다짐이었다. 2006년 제주독립영화협회가 출범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고 김 감독이 세상을 뜬지 6년인 지난 2011년, 오멸 감독과 고혁진 피디는 ‘끝나지 않은 세월II’를 만들기로 마음을 모았다. 고 김 감독 묘에 다녀온 둘은 그를 총 제작자로 모시고 제작에 돌입했다. 6년 전과 별반 다를 게 없던 여건에서 이들은 아등바등 영화를 만들어냈다.

손에 쥔 돈 없이 영화 제작에 손 댄 탓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 썼다. 국내외 영화제에서 상을 여러 개 받았지만 정작 상금은 1500만원이 전부다. 빚은 여전히 남았다. 영화 손익분기점을 맞추려면 1만 관객에 10배나 되는 10만 관객이 들어야 한다.

20여년 쌓인 내공은 고스란히 영화에 배어나왔다. ‘지슬’은 각종 기록을 긁어모으며 지역영화뿐만 아니라 국내영화계의 새 역사를 쓸 만큼 존재감이 묵직해졌다. 실패라고 여겼던 끝나지 않은 세월I이 지슬을 만드는 밑천이 된 것이다. 

그를 가리켜 숨은 주역이라 표현하는 것이 마뜩잖기는 하지만 '지슬'이 받은 스포트라이트에 비해 그 자신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2005년 끝나지 않은 세월1에서부터 2013년 끝나지 않은 세월II를 모두 만든 고혁진 피디에게 미처 털어놓지 못한 속내를 물었다.

▲ 지슬의 제작사인 설문대영상 고혁진 대표. 제주독립영화협회 대표이기도 하다.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 미술인으로 살다가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좇아온 주제는 한결같다. 4.3이다.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예술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우리 집안에도 4.3때 돌아가신 분들이 있다. 벌초하러 가면 비석만 있는 헛묘도 보곤 했다. 학교 다니던 때는 미술운동을 먼저 시작했다. 알다시피 1980년대는 굉장히 시끄러운 정국이었다. 그림패를 만들어서 활동했다. 졸업하고 나서는 박경훈(현재 제주민예총 이사장) 선배와 몇몇이 모여 만든 바람코지 막내로 들어갔다. 탐라미술인협회가 만들어지면서 4.3에 대해 공부도 하고 예술적으로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고민을 계속 해왔다.”

- 끝나지 않은 세월I을 만들던 때 역시 힘들었다. 다큐멘터리는 있었지만 극영화는 처음이었다. 주목을 끌기는 했으나 완성도가 아쉬움으로 남았다. 당시를 회상한다면.

“당시에도 지금과 달라지지 않은 건 제작 여건이 어렵다는 것이다. 제작비도 부족했다. 그때도 후원금과 빚으로 만들었다. 제주시에서 3000만원, 서울독립영화제에서 1000만원 정도 지원받았다. 그래도 모자라 후원금 모금해서 1500만원으로 완성을 할 수 있었다. 1억 정도 든 영화다. 2004년 초여름부터 시작해 2005년 3월 가까이 돼서 완성됐다. 스태프도 떨어져나가고 마지막 남은 사람이 김 감독과 조감독 나까지 세 명이 남아 완성했다.

- 제작한 입장에서 평가를 내린다면.

“당시 고 김 감독은 처음이니 잘 만들어야겠다는 의욕과 부담감이 굉장히 컸다. 담고 싶던 이야기가 굉장히 많다보니 영화의 완급조절이 잘 안됐다. 장면마다 힘이 들어갔다. 완성도 차원으로 보면 부족한 영화라고 볼 수 있는데 4.3영화를 작업하는 작업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유용한 모범 사례다. 끝나지 않은 세월II가 나오기 까지 8년의 시간이 걸렸다. 어느 누구도 손을 못 댔다. ‘4.3예술’, 말들은 쉽게 하지만 작업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응원이 필요하다.”

- 지슬 역시 어려운 여건 속에 만들어졌다. 제주도에서도 4.3영화 제작이 몇 차례 엎어지면서 제대로 예산 지원 받기가 어려웠다. 

“순이 삼촌도 기획되다 결국 못 만들어졌다. 충무로에 있던 감독도 시도도 못 해보고 접게 되는 주제가 4.3이다. 무일푼으로, 맨몸으로 무모하지만 시도하는 그 자체가 용기 있는 일이다. 고 김 감독의 그런 작업이 없었다면 지역에서 영화작업 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활동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독립영화에 대한 냉대가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된 계기가 됐다.”

- 끝나지 않은 세월II는 어쩌다 만들 생각을 했나.

“오 감독과 의기투합하게 된 게 ‘경률이형의 한을 풀어주자’는 것이었다. 4.3에 대한 이야기는 제주 영화인들이 만들어야 올곧게 만들 수 있지 않겠냐는 데서 뜻이 맞았다. 둘이서 고 김 감독 묘에 가서 총 제작자로 모셨다. 복수를 하는 비장한 마음도 사실 있었다. 괜히 건드려서 다시 욕되게 하면 어떨까하는 걱정도 있었다. 여러 부담도 있었지만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 고 김 감독에 대한 미안함, 이 숙제를 뛰어넘지 못하면 다른 영화 작업을 할 때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각오 이런 것들이 있었다.”
 

▲ 지슬의 제작사인 설문대영상 고혁진 대표. 제주독립영화협회 대표이기도 하다.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 영화를 보면서 제일 많이 나오는 반응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관객들 가장 첫 마디가 ‘뷰티풀(Beautiful)’이었다. 내용은 비극이지만 화면에 제주 풍광이 잘 담겼다. 그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 제주 자체의 풍광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미술학도인 둘의 미적 감각도 담겼지 않나.

“미국에서는 흑백 영화를 잘 만들지도 않고 극장에서 틀지도 않는다. 뭐든 칼라여야만 통한다. 오름에 대해 나오는 장면이나 삽입 컷의 장면 하나하나가 ‘회화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무래도 미대 출신이기에 앵글이나 프레임 잡는 데 있어서는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다.”

- 힘들다, 어렵다 했지만 결국은 2억5000만원이 들어간 영화다. 보통 독립영화 치고는 많은 편 아닌가. 당초엔 1억이 목표였다.

“오 감독의 전 작품에 비하면 굉장히 많은 액수다. 보통 독립영화들이 평균 1억 가까운 수준에서 만들어지니 2억5000만원은 적지는 않다. 오 감독 전 작품들은 지역에 있는 스태프와 시스템으로만 작업을 했었다. 4.3에 대한 작품을 만드는데, 기술적이든 내용적이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조명 스태프까지 외부에서 불렀다.”

-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 받고 오던 때만 해도 지역에서는 그다지 별 반응이 없었다. 선댄스영화제에서 상 받기 시작하면서 반응이 완전히 바뀌었다. 포털 사이트 대문에 걸리고 아홉시 뉴스에도 소개됐다. 예상했던 바인가.

“사실 끝나지 않은 세월 시사회 할 때 사나흘 동안 매회 매진되고 사람이 꽉 찼다. 3000~4000명 가까이 영화를 봤다. 첫 시도여서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영화적인 완성도에서 평가가 안 좋다보니 끝나지 않은 세월II를 만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싸늘했다. 게다가 제목도 ‘꿀꿀꿀’이었다. 제목만으로 봤을 때는 영화가 잘 나올 거라는 예상을 한 분이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 여기저기서 끌어다 쓴 지원금을 총 합치면 1억3000만원 가량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머지 금액은 영화수입으로 충당해야할 텐데, 손익분기점이 어느 정도인가.

“주지 못한 인건비와 빚이 아직 남았다. 1인당 7000원이라 치면 10만명이 와야 7억이다. 그 중 50% 극장이 가져간다. 나머지 3억 5천 정도에서 배급사가 일부 떼어간다. 그래야 남은 게 2억5천이다.”

- 국외 유수 영화제에서 ‘지슬’을 선보인 후 실제 반응이 궁금하다.

“선댄스 영화제는 기술적인 면이나 시스템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야기가 좋아도 촬영 기술이 떨어지면 큰 상을 받지 못한다. 완성도를 아주 높게 평가한다. 충무로나 독립영화 감독들이 두드려도 잘 안됐던 것이 그 이유다. 촬영, 사운드, 기술 등 다 따져본 상태에서 상을 주기 때문에 전 세계 독립영화제 중에서 가장 높게 평가를 받는다. 선댄스에서 상을 받은 작품들이 인정받는 이유다.”

“유럽에서는 기술적인 것보다 미학적, 예술적인 면을 많이 본다. 내용이나 영화상에서 구조 이런 것들이 감정이나 흡입력을 많이 본다. 지슬은 화면의 앵글, 장면, 연기, 시나리오까지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지슬의 제작사인 설문대영상 고혁진 대표. 제주독립영화협회 대표이기도 하다. ⓒ제주의소리 김태연기자

- 영화를 본 4.3유족들이 ‘내용이 좀 더 참혹해야하는데, 왜 미군정 이야기는 안 하느냐’는 반응이 있다.

“유족회 어르신들은 11월 제주 시사회 때 알고 있던 상처에 비해서는 덜 표현돼서 아쉬워하셨다. 선댄스 상받기 전이었다. 이젠 상도 받고 언론에도 나오니 영화 하나로 모든 걸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신 듯 하다. 앞으로 제주도에서 자체적으로 지원을 많이 해서 4.3 영화를 꾸준히 만들 수 있도록 한다면 더 좋은 작품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마지막쯤 자막에 미군정에 대한 언급이 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항공모함이 제주에 오면서 사격을 한다든지, 제주에 물리적인 폭격을 하는 설정도 있었다. 항공모함을 섭외할 수 없으니 뺐다. 또한 미군 수뇌부가 이야기 나누는 장면 등으로 설정할 수 있었지만 세트를 만드는 것도 돈이었다. 돈이 없어 간당간당 겨우 만든 영화다. 초가집 하나 못 태울 정도인데 그런 걸 집어넣으면 거의 7~8억 10억 가까이 든다. 왜 그런 장면이 없냐고 묻는데 제작비와 관련이 있어서다.”

- 결국은 어려운 사정 탓이었다.

“영화 하나로 4.3에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기도 하다. 집에 가서 찾아보고 4.3을 한 번 더 알아보게 하는 계기만 된다고 해도 성공한 것이다. 영화에서 구구절절 설명해버렸다면 이런 완성도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오 감독도 누누이 하는 이야기인데 이 영화는 교육을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다. 교육적 의미까지 염두에 둘 수가 없다. 영화 만든 사람으로서는 완성도에 집중하는 게 맞다. ‘제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영화’ 그것이 가장 맞는 의미다.”

- 1만을 넘겼으니 4월 말까지 제주에서 3만 관객 이상을 불러들인다는 목표가 남았다.

“돈이 없어서 영화 마케팅비용을 거의 못썼다. 현수막이나 버스광고가 전부다. 언론 홍보 SNS 통한 홍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도 1만 관객이 극장에 와주셨다. 4.3주간에 탄력이 붙는다면 3만명 돌파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보고 있다.”

- 전국 개봉도 코앞이다.

“서울, 전주, 부산, 대구, 강릉 등 전국 50개 정도 상영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입소문이 많이 난다면 관을 더 열 수도 있다. CGV제주에서는 21일까지 상영하기로 했는데 연장 요청이 있어서 4월 3일까지는 추가 상영한다. 제주영화예술문화센터에서는 더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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