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근대건축 산책] (8) 일제강점기의 주택정책과 주거형태 上

일제강점기, 행정 관료뿐만 아니라 기업과 가족 단위 등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거주하게 된다. 그들이 거주하기 위해 짓기 시작한 일본인들의 주택을 일식주택(日式住宅), 즉 일본식 주택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의 일식주택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주택정책을 간략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사회적 특성상 권력기관에 의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시행된 주택정책들은 일반주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한국내 심각한 주택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생활의 향상을 위해 1941년 7월에 일본주택영단(日本住宅營團)보다 늦게 조선주택영단을 설비하게 된다.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 해방이후 대한주택영단, 대한주택공사로 변경)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매년 주요도시에 노동자, 일반서민주택용으로 5천호의 주택을 건설하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실질적으로는 일제시대에는 식민통치와 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인을 위한 주거공간마련이 주요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가격이 저렴하고 질 높은 주택을 단기간에 걸쳐 대량으로 공급하기 위해 주택의 표준화를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거주자의 계층에 따라 5가지 유형(갑,을,병,정,무)주택을 제시하고 공급하였다. 이들 주거유형은 주거계층과 목적을 달리하였다. 

갑형(甲型) : 중류상층을 위한 분양주택
을형(乙型) : 중류중층을 위한 분양주택
병형(丙型) ; 중류하층을 위한 임대주택
정형(丁型) ; 노동자를 위한 임대주택(8평)
무형(戊型) : 노동자를 위한 임대주택(6평)

도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을 조직하여 계획적으로 대량 공급하였던 주택의 내부를 보면 우리나라와 같이 좌식생활에 근간은  둔 일식주택에도 남아있는 일본적 문화는 고스란히 담겨있었던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다다미(たたみ), 즈즈기마(続き間), 토코노마(とこのま, 床の間)를 들 수 있다.

다다미(たたみ)는 '접는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한 장의 크기는 보통 90cm×180cm정도의 장방형으로의 크기(다다미 2장이 1평 정도의 넓이)로 일본 전통 주택에서 공간규모를 결정하는 모듈이라고 할 수 있다. 다타미방은 낮에는 거실로 밤에는 침실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즈즈기마(続き間)는 칸막이 門을 열어젖히면 옆방을 하나의 공간을 연결(続き間)하여 쓸 수 있다.

갑형과 을형 주택은 연통이 있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공통적으로 욕실 화장실이 내부에 설치되었다. 외부는 시멘트 기와에 콘크리트기초, 조적벽, 그리고 유리창문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근대화된 주택이었으며 일본식과 서양식의 절충적인 주거양식이었다.

▲ 조선주택영단이 공급한 일식 주택의 평면 사례(갑형)(출처:ハウジングスタディグループ(1990), 韓國現代住居學, 建築知識, 1990, P197)

조선주택영단에 의한 주택건설 이전에도 일식주택은 건축되었지만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계획적으로 공급되었다는 점에서 주거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주택영단에 의해 제주도내에 소위 일식주택이 어느 정도 공급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떠한 형태로든 제주도내 거주하였던 일본인들의 주택에는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주거양식 역시 내부공간과 외부양식에 있어서 일본적인 요소를 포함하면서도 제주도의 기후와 풍토에 맞게 변용된 형식의 주택을 건축했을 것이다.

#. 제주에서의 일식주택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유지하여 왔던 제주건축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기 시작하였다. 제주도내에도 주둔하였던 군인과 군속, 행정관리를 대상으로 한 상업행위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을 무대로 새로운 사업을 꿈꾸며 정착한 일본인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주정공장과 통조림공장 등을 들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촬영된 제주성내 모습을 보면 일장기가 걸린 초가와 근대식 건축물, 그리고 유리창문을 설치한 와가들이 보이는데 이들이 거주하면서 초가와 와가에 의한 전통적인 도시경관은 권위적인 관공서를 비롯하여 일식주택들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근대도시경관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 일제 강점기의 제주성내 모습. 멀리 근대건축들이 보이며 초가집에 걸린 일장기가 강점기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 2009년, P329)

그럼 일제강점기에 제주에는 일본인은 어느 정도 거주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거주자수와 거주지역과 아울러 당시의 사진과 글 등 문헌자료를 통해 전반적인 건축양식과 생활모습 등을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제주도내 제주도민과 일본인의 인구수 (출처: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조선총독부통계연보를 토대로 살펴보면 제주도에 거주하였던 일본인은 패망시기에 가까운 1941년의 경우 1354명이 거주하였고 주택수는 403호인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시와 서귀포시에는 어느 정도 거주하였는지 통계상으로 파악하기 어려우나 1917년 통계자료에는 제주 454명 거주에 140채의 주택이 있었고 서귀포의 경우 100명 거주에 31채의 주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제주시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신분적 우월성을 갖고 대부분 번화가를 중심으로 거주하거나 사업을 하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귀중한 자료가  ‘제주성내 각주거도(濟州城內各住居圖)’이다. 칠성골을 중심으로 중심지를 형성하였는데 신작로 개설과 함께 길의 명칭도 모토마치(元町), 혼마치(本町),아사히마치(朝日町)이라고 이름붙일 정도로 중심지였는데 특히 산지항까지 폭넓게 생활영역을 형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거주하면서 20세기초부터 시작된 제주도시의 도시화는 가속화되었다. 

제주목은 제주도 행정의  관아들이 자리잡아온 대표적인 행정 중심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업의 중심을 이루었던 칠성골과 가까운 제주의 핵심적인 행정 및 상업공간이었으니 지배식민지의 핵심적인 건축물이 자리 잡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대표적인 건축물이 도청사와 경찰서, 그리고 측후소, 무선국들이다. 관공서 건축물은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서양 절충식 건축물이 지어졌다. 이외에 일본인들의 주택, 그리고 제주초가와 와가가 혼재된 도시풍경이었으며 제주도시는 서서히 침탈의 시대가 만들낸 근대도시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 용담동에서 바라본 제주시가지. 일식주택과 근대건축물로 늘어나면서 제주시의 도시풍경도 변하기 시작하였다(출처: 다케노 신이치(竹野新一) 제공)

제주도에 거주하였던 일본인이 작성하였던 당시의 ‘제주성내 각주거도(濟州城內各住居圖)’는 매우 흥미로운데 관덕정의 주변을 따라 도청과 경찰서, 우체국 등 주요 공공건축물이 배치되어 있었고, 관덕정 주변을 따라 제주자동차 주식회사, 제주우체국 등 상업건축물들이 있었다. 산지포구 근처에도 일본인들이 거추하였던 것으로 보아 활발한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일식주택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당시의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태일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

 

▲ 1941년 제주성내 각주거도(濟州城內各住居圖)는 당시 이곳에 거주하였던 일본인이 작성한 주거지도이며 당시의 생활공간의 모습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주: 해방후 일본으로 귀국한 일본인들이 1977년 제주도회를 결성하여 모임멤버인 다케노 신이치(竹野新一)와 야마베 신고(山辺真吾)가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임. 이후 이지치 노리코 교수가 내용을 갱신하였음)

 

▲ 산지항부근 주택과 공장. 초가뿐만 아니라 일식주택과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의 모습도 보인다(출처: 다케노 신이치(竹野新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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