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식 박사 20년 가까이 매달린 '1901년 제주민란 연구' 책으로 발간

▲ 박찬식 저 '1901년 제주민란 연구-근대 외래문화와 토착문화 갈등'. ⓒ제주의소리

1886년 한불수호조약과 1896년 교민조약(敎民條約) 등으로 조선에서는 천주교선교사들이 선교의 자유를 얻는다. 이듬해 1897년 선교를 위해 제주에 온 외국인 신부들은 제주민들을 미개인으로 취급했다. 제주민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다시피해 더더욱 선교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은 교민이라는 이유로 유배인의 옥문을 열고 구출하는 등 관청과 대립각을 보였다. 지금 주한미군 병사들이 국내에서 죄를 짓고도 제대로 수사 받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종교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천주교의 특권을 이용하려는 이들이 늘어갔다. 19세기 말, 조세 수취의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던 이들은 천주교 신자라는 특권을 등에 업고 세력을 키웠다.

당시 제주에 파견됐던 강봉헌이라는 봉세관을 도와 법에도 없는 각종 세금들을 징수하자 제주 민중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제주 백성들은 들고 일어나 민병대를 결성하고 제주성으로 모인다.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제주민란이다.

박찬식 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 특별연구원이 최근 <1901년 제주민란 연구-근대 외래문화와 토착문화 갈등>을 발간했다.

지난 1996년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말 천주교회와 향촌사회-교안의 사례분석을 중심으로’를 썼던 저자는 내내 제주민란에 관심을 가졌다. 지방사 연구에 대한 업신여기던 분위기 등으로 입맛만 다셨다.

관심을 놓지 않은 저자는 그 동안의 연구 성과와 1997년 선교 100주년을 맞은 천주교 제주교구가 새 자료를 내놓으면서 연구에 속도를 내게 됐다.

특히 저자는 제주민란을 한국과 제주지역의 근대가 빚어낸 총체적·복합적 사건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제주도가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중앙과 지방의 갈등, 전통과 외래문화 사이의 충돌"이라고 표현했다.

교회에 입교한 교민이든 민란에 참여한 민군이든 모두 제주의 민중이었다는 점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같은 화전민일지라도 징세를 거부하며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관의 징세를 부정하고 감면시키는 또 다른 힘을 지닌 교회에 입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제주민란을 가리켜 "근대성과 연관된 국가와 지방, 외래종교와 토착문화, 민족과 외세, 권력과 기층민, 향촌사회와 내부의 각 계층 사이의 만남, 수용과 갈등과 같은 각종 각양의 특징이 표면과 이면에 새겨져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총 8장으로 구성된 책은 민란을 보는 인식과 관련 자료, 19세기 말 제주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 천주교의 제주지역 전래와 토착문화와 갈등, 민란의 전개와 결과, 주도와 참여, 천주교회의 동향, 일본인이 본 민란 등 다양한 자료를 모았다.

마지막 8장에서 저자는 기억의 전승, 대립과 화합 등 '제주민란'을 다시 보려는 노력에 대해 강조했다.

저자는 책 말미에 "제주근현대사에서 공동체 분열을 가져왔던 두 사건 중 하나인 '4.3'은 대통령의 사과로 공식성을 인정받고 평화와 화합의 길을 열었다. 이제 110년 전 제주민란에 대해서도 상호 화합의 방향을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에 이르렀다. ‘기억 외면’에서 ‘기억 충돌’로 갔던 시대를 접고 이제 ‘기억 화합’을 천명할 때"라고 강조했다.

도서출판 각. 359쪽. 2만5000원.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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