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3) '이철수-새는 온몸으로 난다'
시중화 화중시(詩中畵 畵中詩)의 예술세계

▲ <새는 온몸으로 난다>, 2010년 작 ©이철수 www.mokpan.com

‘그러니 부디 생명에 가혹해지지 말자’

‘새는 온몸으로 난다’는 이번 이철수 목판화전의 타이틀이다. 다음은 그의 그림 속에 판각된 글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몸으로 난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 온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새가 그러하고, 사람이 그러하고, 세계가 그러하다. 죽음처럼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거기서 이미 죽음에 이른 사람들까지, 온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는다. 그러니 부디 생명에 가혹해지지 말자.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말은 ‘고 리영희 선생’이 한 말이다. 이념적으로 지극히 편향된 사회, 좌와 우가 공존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되지 않음을 강변한 말이다. “당신네들, 하늘을 나는 저 새를 보시오, 저 새가 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소?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 크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이오.” 그는 바로 이 멋있게 나는 대한민국을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철수는 이러한 그의 명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니다, 새는 온몸으로 나는 것’이라고. 상징에 대한 상징의 전복이다. 그리고 왜냐하면 “모든 생명은 저마다 온전한 세계이기 때문”에.

모든 생명은 온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말하며 그 말미에 그러니 부디 생명에 가혹해지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의 제안에 강정이 떠오르고 구럼비가 떠오르고 쌍용차가 떠오르고 용산참사가 떠오른다. 리영희의 ‘좌우의 균형 있는 사회’만으로 이룰 수 없는 더 근본적인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화두로 하고 있는 것이다. 늘 이런 식이다. 그의 글과 그림들은 결국 보다 근본적인 곳을 향하고 있다. 그의 지난 30년 화력(畵歷)은 그가 이 근본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기간과 궤적을 같이한다.

“온몸이라고 하는 게 과녁이나 표적을 향해서 거침없이 날아가는 에너지 충만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아프면 울고 힘겨우면 지쳐 쓰러지고 사랑 없이는 외로움을 타는, 그런 존재들이잖아요. ‘온몸’ 속엔 그런 다채로운 인간적인 약점들이 다 깃들 자리가 있어요. 팔 하나가 없어도 온몸은 있어요. 걷지를 못해도 온몸은 있고…. 그죠? 혼신을 다해 그 온몸으로 살아가는 것. 그러면 되는 거죠.”(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인용)

온몸에 대한 그의 해설이다. 그에게 있어 온몸으로 산다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삶’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업은 온몸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칼자국으로 대신하는 응원가들이다. 그의 판화글 중 “그러니 부디, 생명에 가혹해지지 말자”라고 판각된 이 한 줄이 필자에게는 가장 꽂히는 말이다. 어쩌면 그의 온 생애를 관통하는 화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 따스하게 스미어 있는 미학은 바로 이 ‘가혹해지지 않는 태도’, ‘가혹해지지 않는 측은지심의 경지’일 것이다. <가난한 머루송이에게>는 그런 그의 태도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 <가난한 머루송이에게>, 2000년 작, 60cm×50cm ©이철수 www.mokpan.com

이런 그의 30년 화력을 짚어 볼 수 있는 대형 전시가 제주섬에서 열리고 있다. 돌문화공원 오백장군 갤러리에 마련된 <이철수 작가의 30년 기획회고전-새는 온몸으로 난다>가 그것이다. 전시작품 수만 110점이나 되니 대형 전시이기도 하다. 특히 이 전시는 한 화가의 30년 화업의 결산이라는 측면에서, 또한 30년 동안의 시기별 작품의 변천사를 한 눈에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전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5월 16일부터 시작해 이달 말까지 열리고 있으니 아직도 못 보신 분들은 지금이라도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이 귀한 전시를 꼭 한번쯤 봐 두실 것을 권하고 싶다. 아마도 다른 어떤 전시나 재미있는 영화 한 편보다 얻는 것이 훨씬 많을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며, 제주에서는 보기 힘든 전시이기에 관람자의 눈과 미감을 호사롭게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손수 농사짓는 판화가

   

판화가 이철수, 보통 그의 이름 앞에 붙는 별칭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목판화가’다. 대한민국에서 그의 이름은 이미 판화가의 영역을 넘어서, 예술판의 경계를 넘어서 대중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그는 성공한 몇 안 되는 미술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명망은 판화가 이철수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오히려 장애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주로 겉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한 개인을 안다는 것은 늘 겉모습일 뿐이기에, 우리는 작가의 내면과 오늘에 이른 길을 모른 채 마치 코끼리 엉덩이 쓰다듬는 앎에 머무를 위험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그런 오류를 벗어날 수 있는 전시로서, 즉 이철수의 어느 단면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전시는 그의 화력, 전 시대가 망라된 것이기에 더욱 뜻 깊다. 제주에서는 다시 만나기 힘든 작가 개인의 전작 전시회라는 말이다. 그만큼 이 전시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전시이다.

일찍이 학승으로 명망 높던 ‘법정 스님’은 그의 글과 그림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철수의 글에서는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산촌에서 쇠여물 삶는 질박하고 구수한 그런 냄새가 난다. 단순하고 질박한 그의 판화가 곁들인 간결한 화제는 그림과 어울려 선미(禪味)를 풍겨주고 있다. 그의 그림에는 시(詩)가 깃들어 있다. 이런 질박하고도 구수한 문장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목소리다.” 학승(學僧)의 혜안에 포착된 이철수의 진면목이다. 정곡(正鵠)이다.

스님은 그의 글발에서는 질박미를, 그림에서는 선미(禪味)를 느낄 수 있다고 했으며, 이는 온전히 그만의 독특한 소리라는 점을 높이 사고 있다. 다른 말로 그를 제외하고는 이런 맛을 던져주는 화인이 매우 드물거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철수의 작가적 가치는 한국미술사 내부에서, 아니 세계미술사의 통시적 체제 내에서도 매우 드문 지위를 확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평가이기도 하다.

▲ “저물도록 일했습니다. 이제 들어가자고 아내와 남편이 서로 부릅니다. 밥은 달고 잠은 깊을 겁니다.” 손바닥 지문을 차용한 밭에서 저물도록 함께 일한 부부의 풍경. 이 그림 한 장에 부부의 애틋함이 묻어난다. 이철수만이 길어 올릴 수 있는 마음의 풍경이기도 하다. <하늘 이고 저물도록>, 2011년 작, 98cm×58cm ©이철수 www.mokpan.com

스님은 또한 그러한 목소리를 획득하게 된 배경을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평동 마을, 천등산 아래서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흙에 묻혀 살아가는 덕에 그런 열매를 거두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밝히며, 그가 한반도 대지의 흙을 묻혀 살아감에서 그런 경지를 획득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스님의 평가는 그 어떤 전문적인 평론가의 평가보다 정확하고 올바르게 그의 가치와 특질을 잘 포착한 심평(深評)이다.

그렇다. 그는 소위 ‘울고 넘는 박달재’ 아래 소복이 안긴 마을, ‘평동 마을’에 터를 잡은 이후 현재까지 농사일을 손수 해내며, 판화작업도 농사처럼 해내는 판화가다. 물론 농사가 생업인 농민들만큼이야 하겠는가만, 그의 농사일도 이제는 한 농사 한다고 후배들의 입을 통해 들은 바 있다. 그는 소위 어린 시절 농촌에서 농사일을 도왔던 경험도 전무한 전형적인 도시인이었다. 그는 평동 마을에 정착함과 동시에 농사일을 시작해 판화작업과 병행하면서 그의 존재와 환경을 일치시킨 것이다. 그렇기에 법정 스님은 그의 그림이 곧 평동 마을의 흙에서, 아니 한국의 마을에서 시작됨을 간파한 것이리라.

▲ <우리 집>, 1987년 작, 43cm×57cm ©이철수 www.mokpan.com

언젠가 딱 한 번 그의 집과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오래전 이야기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니. 그가 깃든 평동 마을의 집은 전형적인 시골농가로, 육지의 흔한 농가주택이었는데, 규모는 농가치고는 꽤 넓은 그런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집은 그의 정착 초기 시기의 작품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그때는 흙 내음 진득한 충청도의 산골 농촌에 이주하고 정착한 지 얼마 안 되던 시절이었는데, 사람과 집이 참 잘 어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치 애초부터 그 집 주인이었고, 그 마을 주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시중화 화중시(詩中畵 畵中詩)’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이라는 말이 있다. 동양화, 좀 더 좁혀서 문인화에서 시, 서, 화, 세 가지가 모두 뛰어난 경우 또는 한 작품에 이 세 요소가 잘 어우러진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서양미술사나 예술비평사에서는 볼 수 없는 가치이자, 미적 개념이기도 하다. 이는 온전히 동양적 예술사상이기 때문이다. 그 유래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이른다. 그만큼 동양에서는 시서화 이 세 요소의 적절한 조화가 서화작품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셈이다. 애초부터 동양에서는 시서화를 별개의 장르로 보지 않고 통섭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사실 시는 시대로 서는 서대로 화는 화대로 보는 방식은 근대 이후의 일이며, 우리에겐 더 더딘 일제 이후의 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러한 삼절의 미는 요즘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철수의 작품에서는 온전히 이 삼절의 미를 만날 수 있다. 글과 그림이 하나이면서 그림이 곧 시이기도 한, 그 어느 것 하나 빠질 수 없는 말과 글, 글과 글씨, 그림과 글의 조화가 온통 한 작품의 각각의 요소로 융합되어 있는 것이 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그의 작품을 표현한다면 ‘시서각(詩書刻) 삼절’이라 부르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또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중국 북송 때의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문인화의 개조(開祖)로 알려졌으며, 시와 그림에 있어 두루 뛰어나 이름이 높았던 당(唐)시대의 시인이며 화가였던 ‘왕유(王維)’의 작품을 보고 평했다는 ‘시중화 화중시(詩中畵 畵中詩)’를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로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라는 이 말은 그의 승선적(僧仙的) 분위기의 작품들 전반에 딱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즉,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글들은 소위 고전과 경전의 깊이를 동반한 엄청난 독서에 받침된 것이며, 그에 따른 깊은 사유의 정수들이다. 그의 짧은 글들은 사실 모두가 지혜의 언어인 ‘잠언(箴言)’류에 속한다. 거기에 더하여 평동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육화(肉化)된 ‘흙의 감성’으로 건져 올린 도상(圖像)들은 농사로 단련된 건강한 근육이 판각해낸 것들이기에, ‘시서각 삼절’이요, ‘시중화 화중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글과 그림은 저절로 한 몸, 한 화면을 이룬다. 형식적으로 시화일치(詩畵一致), 서화일치(書畵一致)이며, 정신적으로 승선일치(僧仙一致), 문화일치(文畵一致)의 작품이라 부를 만하다.

▲ 예의 법정의 논평에 부합되는 작품으로 “호미 놓지 말아라!”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렇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은 땀 없이 먹고 사는 이들이 세상을 쥐락펴락 하는 데서 오는 법이니. 이철수는 호미 끝에 화두를 싣고 밭에서 살라고 하고 있다. 호미가 일이고 밭이 삶이리라. ©이철수 www.mokpan.com

공명(共鳴)의 화가

공명(共鳴)이란 한자 뜻 그대로 풀면 ‘함께 울린다.’라는 말이다. 즉, 모든 물체는 자신과 같은 진동수를 가진 외부로부터의 진동을 받으면 진폭이 뚜렷하게 증가하는데, 이러한 현상을 ‘공명’이라 부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쉽게 공명한다. 왜냐하면, 새겨내고 찍어낸 화면이, 거기에 새겨진 글과 그림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같은 동류의 공감을 끌어내고, 조용하지만 마음 깊은 파장으로 울리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미술에 문외한인 일반 대중들도 어렵지 않게 다가설 수 있게 한다. 하지만 20세기 이래 미술사에서 그러한 대중과 작품과의 친근성, 접근성, 그리고 소통 가능성은 외려 희귀한 현상에 속한다. 그것은 소위 현대미술이 미술사 내부의 역사, 미술 내부의 언어개발에 치중한 나머지 대중과 쉬이 소통되는 방식은 퇴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미술작품을 가까이 하려 해도 거의 암호문에 가까운 소위 ‘개성’적인 작품들은 극소수의 마니아나 콜렉터(수집가), 또는 평론가들의 영역일 뿐,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대중이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2002년 10월부터 시작해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이메일로 보내는 인터넷엽서다. ©이철수 www.mokpan.com

그런 의미에서 이철수는 20세기 이후 이런 미술의 조류, 서구미술을 비판 없이 수용해 온 현대 한국미술에 저항해 온몸으로 날고 있는 한 마리 ‘수리’인지도 모른다. 사실, 동양화의 세계에서 ‘시서화 삼절’이니 ‘시중화 화중시’의 전통은 단절 없이 이어져 왔다. 그쪽 동네에서는 그리 색다른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새롭지 않다. 즉, ‘법고창신’되지 않았기에 고루하고 진부하다.

이철수의 특장은 바로 여기에 있는바, 그것이 붓에서 칼로 바뀐 차이쯤으로 생긴 ‘다름’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고 그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자기 것으로 하는 동시대의 작가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그의 새로움은 단순히 형식의 변화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이 그가 그저 붓자랑이나 하는 쟁이들과는 사뭇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즉, 그의 작업들은 앞에서도 논한 바 있지만, 사상적으로 ‘삼교의 통’과 예술 내적으로 80년대 시대를 횡단하는 도저한 시대정신의 체현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같음에도 다를 수밖에 없는 삶의 경험이 가져다주는 차이인 것이다.

이러한 이철수만의 독특한 작가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의 연대기를 잠시 살펴보자. 이철수는 고교시절엔 미술반 활동을 하던 문학소년이었다. 청소년기에 이미 <사상계>나 <창비>의 독자였을 정도니, 그의 독서취미는 보통은 넘는 수준이었던 듯한데, 이러한 경력은 이후 ‘시서화 삼절’이 어우러진 ‘승선적 판화’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소위 화가 양성소인 미술대학을 다니지 않았다. 당시 가정형편 때문에 미대를 포기했다고 한다. 요즘 시대에 미대를 나오지 않고 화가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대학이 곧 지식권력의 자산이 되는 나라에서 학벌은 성공의 기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남들 다 대학 가는 시절에도 대학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가 대중과 쉽게 소통하는 작업으로 자신의 방식을 정한 것은 아마도 대학교육의 폐해를 겪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러한 기존 체제와의 거리 두기가 그가 소위 뻔한 방식의 예술가의 길을 택하지 않았던 예기치 않은 자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무게>, 1990년 작, 42cm×50cm ©이철수 www.mokpan.com

 

오히려 그는 대학의 밖에서 시대를 호흡했던 큰 스승들을 만났다. 바로 ‘이현주 목사’와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선생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이현주 목사는 무위당 선생의 제자이며, 아동문학가이자 번역문학가이기도 하다. 그는 동서양과 유불선을 넘나드는 종교인이기도 한데, 이철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듯하다.

그가 평동 마을로 깃들게 된 것도 이 목사의 소개로 이루어진 일이라 한다. 무위당 선생은 1970년대 반독재투쟁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고, 생명운동,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분이기도 하다. 그 또한 서화에 뛰어난 예인이기도 했다. 이들 선배와 어른에게서 받은 사상적 영향은 지금 그의 ‘생명에 가혹해지지 말자’라는 측은지심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들을 통해 이철수는 세상에 대해 더욱 깊게 사유하는 법을 배운 듯하다.

그의 작품이 대중성이 높고 공명이 쉬운 이유는 불교적인 선화 계열의 작품이거나 생활 속의 이야기들을 그려낸 작품경향 때문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그의 작품은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미덕을 지니고 있었다. 그 판화가 북을 치는 그림이든, 화염병을 든 그림이든 말이다. 이런 그의 대중친밀성은 그의 고도의 문화전략에서 나온다.

그는 처음부터 민족미술의 구현을 뚜렷이 자기 목표로 가지고 있었다. 청년기엔 청년기 나름의 철학과 패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판화는 그의 그런 목표를 이루는 데 더없이 적합한 매체였던 것이다. 또한 대중과 함께하는 민중미술이라는 모토는 쉬운 언어로 자신의 사유의 결과물들을 담아내야 했기에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형식, 즉 사실적 도상과 글 그림이 어우러져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형식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특히 운동을 넘어서서 삶의 희로애락을 담고, 그 속에서의 깨달음의 경지를 전달하기 쉽게 진화한 셈이다. 그의 작품이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달리, 쉬우면서도 속 깊은 이유다. 그의 그림들은 어렵지 않지만,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 또는 전달하는 내용들은 쉬운 내용이 아니다. 그것들은 어떤 ‘경지(境地)’와 ‘지평(地坪)’의 것이다.

▲ 이랑 긴 콩밭 언덕을 오르는 노인이 있는 풍경 속, “그 산밭길, 젊어서도 힘들었다.”라는 단 한 줄에 우리네 농촌의 고달픔과 그 고달픔이 어제 오늘이 일이 아님을 웅변한다. 어떤 풍경화에서 이처럼 농촌의 서정과 농촌의 현실을 절묘하게 한 화면에 비벼 놓을 수가 있을까? <당신의 길>, 2004년 작, 67cm×42cm ©이철수 www.mokpan.com

이철수는 1980년대 초반 한국민중목판화의 개조(開祖)라 할 오윤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민족미술운동과 민중목판화운동에 깊숙이 발을 들여 놓게 된다. 이 당시는 회화작업을 하던 작가들도 한두 번은 목판화 작업을 할 정도로 민중미술운동에서 목판화의 열풍이 대단했다.

이철수는 오윤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느 한 장르로 귀착되지 않은 실험적인 작가였다. 하지만 오윤과의 만남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목판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소위 “‘오윤 선배님’의 ‘귀기 서린 칼’을 물려받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이현주 목사는 그의 글에서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는 민중미술의 한복판에서 물 만난 고기마냥 10여 년간 칼춤을 춘다.

오윤을 선배로 또는 동지로 맞아, 본격적인 민중목판화운동의 선두주자가 된다. 그 10여 년간 독자적인 작품 이외에도 포스터, 전단, 깃발, 책표지, 책의 간지 등 소위 출판미술이라 부를 만한 출판매체를 통한 작품들을 다양하게 쏟아낸다. 당시 창비, 풀빛, 실천문학의 시집이나 책에는 그의 판화가 빠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홀연히 평동 마을에 정착한 이후에 그는 방향 전환을 시도한다. 이른바 불교적인 선화(禪畵)로의 전환이었다.

이철수의 작품이 쉬이 읽히고 공명된다는 말이 그의 생각과 깨달음에 의해 새겨진 형상과 의미가 ‘얕다’는 것은 아니다. ‘쉬운 작품’이란 말을 하수(下手)의, 얕은 수의 작품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의 작품은 늘 종으로 ‘유불선(儒彿仙) 포함삼교(包含三敎)’와 같은 통합과 통섭이, 형식적으로는 동도동기(東道東器)의 오랜 맥락 안에 있으며, 횡으로는 황토에 발 담근 생활 속의 깨달음이 씨줄날줄로 엮이어, 이철수의 세계를 직조(織造)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 예수와 부처가 함께 섰다. 어느 종교든 도는 통하는 것. 동병상련과 유유상종, 행색과 말씀이 달라도 깨달음은 통하는 것이다. 그 시끄러운 한국의 두 대종교가 한 화면에서 살갑다. ©이철수 www.mokpan.com

‘유불선(儒彿仙) 포함삼교(包含三敎)’란 신라 말기, 당나라에까지 이름이 드높던 대문장가이자 사상가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신라의 전통 종교사상을 논할 때 표현한 것으로, “나라 안에 오묘한 진리가 있는 종교가 있어 왔는데,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이는 실로 삼교(유불선)를 포함하고 뭇 중생들을 교화한다.”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물론 이는 신라의 ‘풍류도’를 설명하기 위한 글이긴 하나, 이는 이철수의 예술관과 일치한다. 즉, 그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기독교적인 것, 불교적인 것, 노장적인 것,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분단 한국의 현실과 농촌의 이야기, 한국의 사회, 자연 그리고 개인의 생활 속의 깨달음들이 버무려져 있다.

이 비빔밥처럼 버무려진 그의 생각들이 글과 그림으로 엮이어 아! 감탄사를 내뱉게 하는 경지를 만들어 낸다. 이는 온전히 그의 사상적 계보가 어느 한 사유체계나 어느 한 종교교리에 머물지 않고, 바로 고운 선생께서 말한 ‘나라 안의 현묘지도’를 체현하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에겐 교조(敎條)란 없는 듯하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레닌을 만나면 레닌을 죽이고”라는 그의 글처럼, 그는 생명의 모든 것은 늘 변화무쌍한 것이므로, 어떤 사상도 관념도 다 변화하는 성질이 본성임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교조불능자라 할 만한다. 그가 소위 ‘민중목판화다운’ 작업에서 선화풍의 작업으로 옮겨가자 그를 아끼던 사람들은 걱정하기까지 했다. 그가 마치 변질된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독일전시 이후 자신이 생각한 결론에 따라 과감하게 변화를 시도한다. 고인 물은 결국 썩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이 또한 교조를 싫어하는 그의 성품에서 나온 일이다.

또한 그는 권위적이지 않다. 그의 작품이 마냥 아래에 엎드려 있거나 아래를 향하고 있기에 그에게 권위란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겉으로 내세우는 그런 권위 말이다. 한없이 부드럽고 살가운 그의 작품들을 통해 드러나듯, 그의 예술세계를 가르는 한 가지 도(道)가 있다면,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미학’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예의 생명에 가혹해지지 말자던 그러한 삶의 태도 말이다.

▲ 교조불능과 포함삼교에 이르는 그의 철학이 잘 표현된 작품 <개혁> ©이철수 www.mokpan.com


그의 작업은 사상적으로 광대무변하다. 그의 작업을 보다 보면 ‘한 장(掌)’ 짜리 조각도가 왜 이리 크고 넓은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높이 33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단일불상이라는 법주사의 ‘금동미륵대불’도 그의 칼과 판 안에서는 크기를 자랑하지 못하고, 대불의 명성 또한 재평가되며, 보는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 ©이철수 www.mokpan.com

모두가 떠받드는 추사도 그의 안목에서는 모화사상에 젖은 노정객의 면모를 드러낸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칼자국 한 획에 추사의 진면목 중 하나가 드러난다. “오랑캐로 사는 일이 오래구나.”라는 이 한 대목에선 조선의 지성사가 재평가된다. 그의 안목이 허투루 과거와 현재, 미래에 닿아 있지 않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 ©이철수 www.mokpan.com

동도동기(東道東器)의 외로운 길

근대 이후 서양에 지구 문명의 항해사 자리를 통째로 빼앗긴 동양의 입장에서, 서양의 이기(利器)들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근대 100년 이래 동양문화권의 고민이자 화두이기도 하며, 이는 오늘에도 동시대적인 문제이다. 아무리 디지털로 세상이 바뀐 듯해도 본질은 장기 지속적이며, 쉬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은 그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논한 바 있다.

이철수의 ‘경계 넘기’는 근본적으로 ‘경계 없애기’라고 할 수 있으며, 상실된 또는 모호해진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하려는 한 ‘깨어 있는 주변인의 노력’이다. 그것은 정복자의 문법에 기대 그것의 산과 강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아니라 자기의 언어를 되살려내고 그것을 현실 속에 사용함으로써 정복자의 언어 자체를 초극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이주헌은 이철수를 “경계 넘는 화가”로 표현하고 있다. 그 경계는 “미술과 문학, 종교와 철학적 관념, 순수와 비순수의 예술의 경계 등으로 기존의 관행적 분류를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경계를 넘는 이철수의 노력을 이주헌은 “(서구에 의해) 상실된 또는 모호해진 우리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회복하려는 한 ‘깨어 있는 (서구에 대해) 주변인의 노력’”이라고 평하고 있다. 특히 정복자의 문법이 아닌 ‘자기의 언어를 되살려내어 정복자의 언어를 초극하려는 노력’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주헌은 이철수의 속내를 간파하고 있다. 이철수의 붓보다 자유로운 조각도는 기실, 오래된 우리 문명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낡은 문명의 유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낡은 유산을 이철수는 새롭게 벼리어 정복자의 언어를 초극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도구들은 제품으로 말하면 헌것이거나 재고품들이다. 족히 1천 년은 사용했음직한 조각도라는 것이 그렇고, 조선시대 내내 우리의 종이였던 한지가 그렇고, 수공적 작업방식은 조각도가 발명될 때부터 생긴 방법이니 역시 케케묵은 헌것일 수밖에. 또한 이 헌것들은 과거 정복자들과의 한판 문화전쟁에서 이미 패배한 무기들이기도 하다. 거기에 시서화 삼절이라니. 이 또한 1,000년은 족히 넘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철수는 그것을 전혀 새로운 문법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사용의 효과 역시 만만치 않은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데서 이주헌의 평가는 올바르다.

▲ <마음이 늘…> ©이철수 www.mokpan.com

‘동도동기(東道東器)’는 불가능한 이론일까? 이미 서양문명이 내부화된 지구촌의 시대에 동도동기는 어떤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까? 정복자의 문법을 초극한다는 것이, 21세기 서도의 끝인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가능한 일이기나 한 것일까? 애초에 동도동기는 있는 것이기나 할까? 이런 의문의 꼬리 속에서도, 고운 선생께서 나라 안의 현묘한 도가 있다고 말한 것은 분명 우리의 동도에 대한 언급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이후 특히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은 극단적인 모화사대주의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 한말까지 두 세기에 걸쳐 정국을 장악한 사대부들, 노론의 후예들은 이름만 제국의 때늦은 황제만 빼고 통째로 나라를 팔아먹었다. 매천 선생은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라며 ‘선비의 나라 조선’의 망국에도 어느 선비 하나 나라를 잃었는데도 슬퍼하여 자결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명줄을 끊었다.

그런 보람도 없이 매국친일세력은 다시 대한민국으로 바뀌어도 여전히 나라 팔아먹는 일을 밥 먹듯이 하고 있는 현실. 참 허약한 동도의 풍경이다. 삼성의 글로벌경영과 상품판매의 눈부신 성과와 소위 한류스타들이 ‘통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동도서기의 승리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한국의 상황논리일 뿐이다. 동도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깊게 보고 공부하지 못했기에 우리의 동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동도 역시 다시 세워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모화사대도 친일식민도 제대로 걷어낸 그 자리에 원류를 올곧게 곧추 세우고, 다시 그 위에 포함 삼교의 원리로, 사상의 비빔밥을 만드는 방식으로, 반도(半島)의 문화를 다시 세워야 하는 것 말이다.

동도동기의 길은 어렵다고 쉽게 포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길을 누구도 성공적으로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 속에 있는 미시(未始)의 길이기도 하다. 서구의 허다한 문화가, 사상이 우리들 안방을 꿰어 찬 지 100년이 넘어가는 시대,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전락한 우리 문화의 유산들 또는 재고품들은 현장에서 쓰이지 못하는 기억의 유산들이 되어 버렸다.

오리엔탈리즘으로 범벅이 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의 문화가 혼종문화로 나타난 21세기, 서도의 패악이 전쟁과 군산복합체의 워게임, 1%:99%의 대척점을 현실화시키는 시대, 지구온난화와 오일피크 스트레스를 삶의 환경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 서도의 틀로는 더 이상 진전할 수 없는 지구촌의 풍경 속에 동도의 길은 단순히 이상이나 과거회귀로 치부하거나 ‘언젠가는…’으로 밀어둘 일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철수가 동도동기의 ‘깨달은 주변인’으로서 우직하게 자기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은 인상 깊으며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이철수의 동도는 박물관의 그것들처럼 낡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촌스럽거나 시대착오적(문화제국주의의 폐해겠지만)이지 않고 발랄하다. 그의 동도가 사뭇 다른 이유는 그의 옛것을 취하는 사유의 깊이와 사상의 폭에 있다. 정복자의 언어를 초극하는 길은 결국, 정복 이전시대의 언어들에서 법고창신할 수 있는 것들을 추슬러 이 시대의 용도에 맞게 사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철수의 칼과 글은 바로 이런 동도에 기반한 것들이나, 이미 동도 그 자체는 아니다. 본성은 동도이나 내용은 동서도를 망라하며, 동서도의 융합과 통섭으로 이루어지니 이것은 새로이 ‘창신동도(創新東道)’라 부를 만하다. 한글로 새겨진 시(詩) 글과 여백에 붓질처럼 날렵한 칼솜씨로 새겨 넣은 오늘의 삶의 모습들, 그리고 포함삼교를 넘어선 깨달음의 언어들이 그가 가진 동도동기의 결과들이다. 그리고 이에 감응하고 공명한다는 사실이 곧 동도동기의 체현이요 실현이다.

‘화력 30년’, 적어도 이철수의 동도동기의 전략은 미술사나 개인사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결실을 맺고 있는 듯하다. 물론 앞으로도 그의 연대기는 많은 여백으로 남아 있으니 교조를 거부하는 그의 변화가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는 바이나, 이미 산을 이룬 그의 말과 글들은 또한 지향할 바를 예견케 하기도 한다. 늘 그렇듯이 인간은 미루어 안다.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 그것만이 인간이 영장류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앞으로 그의 작업들은 여전히 농사일처럼 진행될 것이리라. 늘 그렇듯이 아래로 향하고 아래에서 더욱 넓어지고 깊어지리라.

▲ <쇼핑-거룩한 집>, 2009년 작, 60cm×50cm ©이철수 www.mokpan.com

다시 한 번 더 감상을 권하며 글을 마치다

그는 결코 서둘거나 허투루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민예총 일이든 동네 일이든 나서야 할 일에는 결코 피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농사일과 조각도를 드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성질이 모나지도 않고 주변이나 후배들에게 박하지도 않다. 천생배필인 형수님과 오순도순 아이들 잘 키우고, 화가들의 트레이드마크인 주벽이나 독특한 기행(奇行)의 에피소드도 없다.

우리가 아는 서구적 문법의 예술가상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산천과 논밭의 주인공들인 마을주민들의 모습은 기실 그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생활이나 그의 생활이나 1년 열두 달을 경영하는 것에서 보면 진배없다. 평동 마을 주민들의 호미와 낫, 가래와 써래 외에 조각도 하나를 더 이용하는 농꾼이기 때문이다.

화력 30년, 이철수는 여전히 길 위에 있고, 여전히 돌봐야 할 논배미며 갈아엎어야 할 밭이랑이 한두 줄이 아닐 것이나, 그는 늘 농부의 칼질로 그의 농사를 지을 것이다. 앞으로 또 얼마나 무릎을 치게 하는 ‘시중화 화중시’를 우리들에게 선보일 것인가? 전시마다 가보지는 못하지만, 늘 그의 전시가 궁금한 것은 그가 그런 믿음을 한 번도 배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다.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전시도 아니다. 한번쯤 꼭 시간 내서 다녀오면, 이 글 때문에 전시장을 다녀온 분은 반드시 필자에게 졸필이지만 고마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글에 실린 그에 대한 이야기나 인터넷 창을 통해 보는 작품들보다 직접 보는 그림은 그 자체로 온전히 전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기다 30년 화력의 전 작품을 볼 수 있다(옛 작품들이 모두 걸리지는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지적인 호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터넷이 편리하고 좋다 해도 실제 작품을 보는 것과는 천지 차이임을 독자들은 다 알 터이고. 필자도 이참에 다시 한 번 보러 갈 생각이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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