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의 역사, 통곡의 세월'…4·3 희생자 가족들 58년 만의 증언

   
반세기 넘어 꼭꼭 묻어두었던 설움과 한을 안고 살아온 이들.
그러나 마음 한 켠엔 다시는 이 땅에서 야만의 역사가 되살아나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

다시 그런 세상이 온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싫은 분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인권과 평화가 넘실대는 땅을 자자손손 물려주는 것이다.

(사)제주4.3연구소가 제주4.3 제58주년을 맞아 29일 오후 2시부터 열린 '4.3증언 본풀이 마당'.

'항쟁의 역사, 통곡의 세월'을 살아온 이들의 오늘 이야기는 그 동안 손자에게도, 자식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저 한풀이가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오순도순 살아가는 평화로운 삶의 밑거름이 될 이들의 소중한 이야기었다.

58년 동안 암흑 속에 갇혀 있던, 오랫동안 숨죽이고 살아온 세월을 손자뻘의 20대 젊은 청년들 앞에서 담담하게 그리고 잔잔한 목소리로 풀어낸 이들의 소리는 곧 한(恨)의 소리였다.

"이제 다시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약먹엉 죽주, 다신 살수가 어서."

이날 다섯 번째 4·3증언 본풀이 마당에서 생생하게 증언을 한 홍난선(77.조천읍 대흘리)할머니와 양달후(80.조천읍 대흘리)할아버지 부부는 국인의 파렴치한 만행과 미국의 문제에 대해 낱낱이 고발했다.

"이거여 저거야 해도 미국의 군대가 와가지고 멀쩡히 4.3운동을 맨들어분거란 말이여."

▲ 양달후.홍난선 부부

▲ 현광하(남, 1928년생, 제주 아라)

도피 입산 후 귀순...재검속되어 죽을 고비 넘겨

   
"나는 소개를 안 갔다. 아래 가도 죽을 거고 산으로 갔다. 여기 있는 식량을 가지고 가서 동네 사람들과 살았다. 15~20명 정도가 계속 같이 지냈다. 산에 있다가 귀순 명령이 내리니까 내려왔다. 양력으로 1949년 2.3월경에 귀순했다. 감옥 안에 있다가 조사 받고 석방된 것이다. 내려 와서 주정공장에 더러 담고 1구서에 간 사람도 있고 나는 주정공장에서 40일정도 있다가 석방되었다. 주로 주정공장에 많이 갔는데 조사를 받으면서 죄가 없는 사람들은 석방되어 나오고 형무소 간 사람들도 죄가 없는 사람들이지만은 죄가 있는 것으로 해서 징역간 것이고 석방해서 나온 사람보다 징역간 사람들이 더 많았다. 4.3사건때 산에 있다가 내려 오지 않았어. 그 후에 재검속이 있었다 우리 동네에도 5~6명이 재검속을 당했는데 49년 21세에 재검속 되었다. 시에서 무슨 청년 훈련이 있었는데 그 훈련을 받고 올라오는 도중 삼성혈 부근에서 쉬고 있는데 위에서 트럭이 내려오는데 보니 군인들과 동네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안아무개라는 사람이 나를 지적하더니 나도 차에 타라고 했다. 우리 형님도 타고 있었다. 관덕정 어느 여관으로 데려가더니 취조를 했다. 하나하나씩 부르면서 취조를 받았는데 다듬이 하는 방방이로 때리기 시작하면 공식이 20번이다. 45도 각도로 굽게 해서 20대 때리기였다. 매를 맞다가 실신을 하면 물을 뿌려서 깨어나게 하고 전기 취조도 받았다. 성기에 전기고문도 했다. 여기서 하루동안 취조를 받고 동척회사로 옮겼다. 거기서도 결박당한 상태에서 무릎을 끊은 자세로 하루를 살았다. 조사도 한번 받고 오후 5시경 사람들을 호명하면서 “이 사람은 대석방이다”고 하면서 차에 싣고 갔다. 그때 나간 사람은 시체도 찾지 못하고 어디서 죽였는지 알지를 못한다. 거기에 형님도 계셨다. 방안에는 70~80여명이 있었는데 그 중 40~50여명이 불려나갔다." 
 
가족 피해...부모님, 큰형님, 작은 형님 모두 죽음

큰형님(玄孟奉 36세) 작은형님(玄榮河 27세) 두 분과 어머니(金次善 61세), 아버지(玄商雲 59세)가 사망했다. 네 분이 돌아가셨다. 당시에 부락이 소각을 당했다. 군인들이 와가지고 어디로 피신하라고 했다. 그러니 아버지 어머니 큰형님은 도남으로 소개를 갔다. 부친은 도남으로 소개를 갔는데 식량을 가지러 올라왔다가 잡혀서 돌아가셨다. 내가 스무 살 때이다. 도남이 서쪽인데 식량가지고 왔다가 희생된 것이다. 아버지가 마당에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도남에 있다가 모략에 의해서 잡혀가고 큰형님도 모략에 의해서 잡혀갔다."

"박성내 학살 현장에는 피가 내를 넘칠 정도"

"소개 전이다. 오등교라는 다리라고 거기가 박성내인데 북쪽 내창위에 엉덕이라고 층전층하가 있는데 그곳에 세워 놓고 총을 쏘아버렸다. 이 동네에서는 그 총소리가 다 들렸다 그러니 겁을 안 먹을 수가 없었다. 초가을이니까 거기서 총소리가 나다가 조금 조용해지면 가보는데 한차 실어다가 한꺼번에 거기서 죽여버린다. 시체를 그냥 놔둘수는 없으니까 마을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서 시체를 꺼내서 밭으로 놔서 흙을 지치고 해주었다. 피가 내를 넘칠 정도로 되었다. 그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의사 있었으면 살아날 사람도 있었다. “살려달라, 살려달라”하는 소리도 들렸다. 마을 사람들이 옆에 밭에 시체들을 쭉 갔다 놔서 시신을 찾아가기 좋게 해주었다. 소문 들으면서 가족들이 와서 나중 시신을 다 찾아갔다. "

   
▲ 김순동(여, 1929년생, 조천 조천)

4·3초기 남편 희생...자수사건으로 부친·외삼촌 희생 당해

   

"남편은 4.3사건이란 말 나기도 전에 그냥 일본을 왔다 갔다 하던 사람이라, 결혼해놓고 금방 가서 있다가 들어왔어. 들어왔는데 그때가 아마도 4.3사건 초기인 모양이라. 그냥 동네와도 어수선하고 사람들도 으상으상하고. 젊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어짜고 한다고 그런 소리를 들어서 내가 겁이 나가지고 서방보고 “당신 또 나가라고. 나가서 나를 부르라고. 그러면 나도 따라 나가겠다고” 경핸 부산까지 갔는데 암만해도 혼자 못가겠던 모양이라. 내 생각이 나서. 결혼해서 몇달 안된 사람이니까 신부 생각날 것 사실 아니? 게서 들어오면서 여비해갔고 가라고 헌 돈으로 비누를 한 트럭이나 사갖고 왔어. 그때 비누가 귀할 때라. 빨래비누를. 그래갖고 그것을 친구들은 어떻게 많은지 친구들하고 장날 소리 지르면서 재미나게 그것을 팔았는데, 그걸 팔고 한잔씩 먹고 헤어졌어. 그 뒷날인가... 삼월달일거라. 삼월 물찌. 보름 물찌. 보말잡고 허잖아요? 대섬이라는 데가 있어요. 신촌하고 조천 사이에. 거기를 친구들하고 많이 놀러 갔는데 나도 따라가서 오분잭인가 뭔가를 켄다고. 나는 구쟁기 잡으러 가서 그거 하고 있는데 남자들은 술 한 잔 갖다놓고 먹고. 막 춤판이 벌어져 갖고 재미나게 춤을 춥디다. 그러면서 날이 저물어가니까 나는 밥을 하러 집에 갔는데, 일곱시가 되도 안와. 여덟시가 되도. 그때 여덟시가 통행금지였어요. 딱 여덟시 5분되니까 총소리가 팡 납디다. 깜짝 놀라가지고 아이고 뭔소린고. 바깥으로 나갈라니까 사람들이 벌써 못나가게 붙잡고. “아이고 왜 못나가게 하십니까?” “아이고 나가면 죽여분다고” 막 나가는 사람마다 다 죽인다고 못나가게 하는거라. “하이고 나가서 안들어온 사람이 있는데, 왜 못나가게 허냐고 놔주라고” 해도 안 놔주고. 그냥 “나가지 말라고. 나가지 말라고. 큰일난다고” 있는데, “아무개가 죽었다!” 그런 소리가 나요. 아니, 삐라뿌리고 다니는 사람이 구두 싣고 다녀요? 시계보고 늦었으니까 달음박질로 집에 딜려오는데 그 사람은 뒤에서. 그때 순경도 아니고 서북청년이라고. 그 사람들이 “누구냐!” 소리도 안하고 그냥 덮어놓고 쏴버린거예요. 맨 처음..."

   
"겨우 찾아서 굵은 뼈만 찾아 놓고...."

"4.3사건 겪고 나서 얼마 없어서 맨 나중에. 다 끝나갈 때 자수하라고 해서 자수하러 갔더니 잡아다 죽여버렸어. 오등교라고. 박성내. 한 100 명가량. 그때 자수한 사람이 2~300명 됐어. 아버님이 서른 여덟살이었어. 육지 출입을 많이 한 양반이라 아무 뭣도 없이 그때 자수하면 육지로 보내주고 한다니까 육지 갈 욕심으로 자수를 한거지.
다섯 달 만에야 어디 가서 죽은 줄 알았잖아요. 나는 큰 딸이니까 어머니는 애기 데리고 못나가고. 할머니하고 우리 외할아버지는 아들이 없어졌으니까 아들 찾으러 나가고. 나는 아버지. 우리 할머니가 그때 살아 계셨으니까 할머니 하고. 두 사돈하고 나하고. 개나리봇짐 짊어지다시피 대바구리에 밥 한 덩어리 담고. 큰길로는 못 다녔어요. 그런데 서너번 가도 못 찾고 하다가 조천 사는 누가 찾았다고 그래서 거길 가보니깐, 시체가 형편없이... 그냥 겨우 찾아서 굵은 뼈만 찾아 놓고. 시체를 다리 밑으로 다 털어지난 차에서 기관총으로 막 쏘아불어선게. 경허난 쏘아부난 총맞다가 덜 맞은 사람이 원두막에 기어와서 아무가이 아무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해주니까 알았죠. 석유 뿌련 불솔라부런게. 게나네 옷 맨딱 벗은 시체가 여럿이여. 우리 동네 우리 아방이영 동창인데, 그 사람 남편은 앞이 이서도 못찾았어. 그때 시체를 감정허는 거시기도 없었고 허니까 이서도 못찾아. 우리 아버님은 경해도 대님도 있고 고름도 있고 하니까 찾았지. 우선은 그 자리 피해서 임시로 묻었지. 묻어놔두고. 나도 속상하니까 그때는 뱃질이 터져서 육지 간양 13년 동안 제주도 진저리가 나서 안들어와서 거기서 지금 남편을 얻어서 살면서 오남매 낳아서 다 키워서 들어왔지."

"자수허라, 자수허라...일주일 수감 고초 겪어"

"아버지가 함덕으로 자수하러 간 날, 어떤 예편이 “하이구 당신네 이름이 지서에 올랐더라고. 어서 자수허러 가라고 자수하면은 살려준다”고 “우리 한것이 없는 뭐하러 가냐”고 “그래도 자수해그네 자수증만 주면은 자유스럽다. 가라고”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는 깜짝 놀라갖고 “혼저 지서에 가라고. 자수허라. 느네 아버지도 자수허래 가는디, 느네랑 지서에 강 자수허라” 허니까 조천지서에 갔는데, 1구서로 잡아갔어요. 이렇게 들어갈라니까 감방이 없어요. 꽉 들어차서. 사람위에 사람이 앉아 있어. 너무 좁으니까 움직거리다 보면 약한 사람은 이렇게 다른 사람 어깨위에 올라가서 앉았어요. 옆에서 뚜드려 맞아서 죽는 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여. 하루면 수십명썩. 홍두깨라고. 홍두깨라고 알죠? 빨래 이렇게 감아서 때리는거. 홍두깨로 막 때려. 홍두깨로. 그러면 몇번 안맞고 죽어불지... 느그 남편은 어디 갔느냐. 산에 뭔 심부름 했느냐.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결혼해서 얼마 안되서 당신네들 쏘는 것에 죽었는데,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냐고. 그러면 남편이 산에 갔는데 거짓말 하는 것 아니냐고."

▲ 홍난선(여, 1929년생, 조천 대흘)

'마을 불탄 후 해안마을 피신 중 토벌대에 붙잡혀'

 "함덕 대대본부의 실상...대흘리가 불타고 신촌으로"

"대흘에 군인들이 불 붙여수다. 남편은 그냥 어스름에 나가서 없고. 나만 그냥 어느 트멍에 아장 그날 저녁 군인들 갈 동안 그 애기 안고 있었주. 친정어머니도 따로, 12살 난 우리 동생도 따로 자기만씩 도망가수다. 뒷날 아침엔 ‘어머니네도 죽어신지 어떵해신지 몰르고. 이제랑 올라강 보주’ 해서 갔는데, 우리 어머니도 동생도 살안. 오히려 내가 그 불타는 집에 깔려 죽은 줄 알고 남편이랑 시아주버니랑 불타서 무너져내린 집을 뒤지고 있었다. 산에 사람들은 서방 없이 아래 가면 죽여버린다 하고, 남편도 내려가자고 하면 우이 사람들이 못가게 했다. 5~6일 정도 불타버린 집 근처에서 흩어진 곡식들 주워 먹으며 지냈다. 군인들이 온다하면 도망가는데 젊은 사람은 금방 달아나지만 애기 업은 나는 그 사람들하고 같이 도망 갈 수가 없었수다. 대엿새를 경 댕기당 한번은 남편을 만나난 “도저히 난 이런 식으로 살 수가 어시난 서방 안데려왔젠 죽여부러도 해변에 내려가쿠다, 어떵허쿠가?” 우리 집이 아방은 이제 내려가면 죽여분댄만 허멍 안 내려가고. 이젠 할 수 어시 친정어머니네는 조천으로 동생들 데령 내려가고 나는 시어머니하고 시누이하고 우리 애기하고 우리 동네 친구네 식구하고 아홉식구가 신촌으로 내려가십주게. 10월 스무여드레날인디 어둑어가난 눈이 막 옵디다게. 신촌리 동수동서 토벌허는 군인이 사방에 탁 덮어진거라. 군인들이 “저년들 산에 폭도들신디 간에 연락해뒁 오는 년들이니까 일로 와”. 난 그냥 애기 안앙 가시난 이제 애기만 울리면 다 쏘아불켄, 애기 울리지 말랜. 겐 이제 ‘아이고, 어둑어가면 가랜헐테주’. 어둑우난 가랜 헙네까? 보름만 팡팡 불고 눈은 자락자락 오는디. (음력)시월 스무 여드렛날이난, 어스름허난 캄캄할거 아니꽈? 그 밤에. 그날 밤새 그냥 꿇어앉은 채 그 두집이 식구 아홉식구가 밤새 그디서 그냥 살안. 군인들이 이제 함덕으로 글랜. 함덕을 글랜 행 그냥 걸언에 그디서 함덕을 군인들 따라 가지 안해수꽈. 따라간 보니까 함덕중학교에 막사가 이신디 90명도 담고 80명도 담고 헌디, 여러 개 이서수다. 선인동 사람, 와산 사람, 선흘 사람, 우리 아는 사람들도 왔고 막 심어 와십디다게."

"난 집이서 살림만 하고 아무 것도 안해수다"

   

"그디선 그 억대 같은 청년들도 끌려강 매 두세 번만 때려가면 남로당에도 가입했수다, 민애청에도 가입했수다 뭐 왓샤도 했수다 허는거라마씨. 지금이면 한 저녁 4시쯤 해가 거의 져갈 때 마지막으로 나를 부릅디다. 가니까 남로당에 가입했냐? 무엇을 했냐? 뭐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냐? 허멍 날 고라 문초를 헙디다. 나는 어린 아이 데리고 늙은 시부모 모시고 그렇게 해서 허니까 난 아무것도 안했수다. 난 집이서 살림하고 애기만 키웠주 아무것도 안했수다 허난. 그 고무 호수 이만한걸로 양쪽으로 들어 상 막 그냥 이건 보리태작허듯 막 두드려도, 나 정신이 어서가도 그자 아니했수다 아니했수다 허는 걸, 막 정신이 어서가도록 그 말만 막 귀에 듣는 거라 마씀.
취조 받안 가마니만 깐데 던지니까 보초서는 사람 말이 “저 사람 찬 물 주지 맙서, 찬 물 주면은 지금 당장 죽습니다.” 경헙디다. 하여튼 우리 어머니가 나 얼굴을 몰랐수게. 이 얼굴이고 온 몸뚱이가 새카망 해부니까, 어머니가 봐도 날 몰라서마씨. 그 거멍한 피독이 다 몸에 굳어분거라마씸. 3일 동안 나 손가락 하나를 나대로 꼬딱을 못해서마씨. 게난 4일째 날은 군인들이 나오랜 행 열 한 명을 수용소로 보내고 나머지 90여 명 사람들은 서우봉으로 끌고 올라간 게 총살시경 그 사람들 죽여불고."

"시누이 시신은 찾지도 못하고..."

수용소에서 한 보름을 살아신디 아, 한번은 저녁 먹고 누어신디, 한 10시쯤 되난에 군인들이 한 8명쯤 완에 “다 일어낭 얼굴 들러 얼굴 들러!” 막 헙디다게. 다 일어낭 얼굴 들르난에 자기네 보기에 젊고, 애기라도 없고 그런 사람덜. 그런 사람덜을 일주일 저녁을, 하여튼 매날 저녁에 왕 데려나가서 강간을 하는 거라마씀. 그 놈들 여덟이. 높은 놈들이니까 나온 거주 쫄병이면 나와집니까? 게난 소위급들이라마씨. 이놈들이. 경허믄 이젠 그 여자들을 경 강간 해불민 그 여자들은 돌아오민 그냥 밥도 아니 먹고, 그냥 매날 아장 울움을 경 울어서마씸 여자들이 경. 허다 허다 책임자 어른이 이거 눈으로 볼 수가 없댄. 대대장신디 사실이 영영 핸에 우리 함덕 3구 수용소에는 이러 이러 한 일이 이신디 이제 어떵허민 좋습니까. 게난 조사해서 그것들을 감방에 가둬놨다허니까, 우리 책임자 되는 어른이 막 걱정헙디다.  이제 저놈들 나오믄  어떤 핑계를 대도 꼭 일이 생김직허우다. 큰일 났수다. 이 놈들이 8일씩 징역을 살고 나오난 대대장한테 “함덕 3구에 젊은 여자들 젊은 남자들은 밤이면 맨날 저녁 산에 연락을 헌다 허영 대대장한티, 탁 투서를 한거 아니꽈. 게난 젊은 사람들을 서모봉으로 끌고 하얗게 막 올라갑디다. 호끔이시난 와다다다 와다다다 막 볶으는 소리 난게, 이제 다 죽었주. 경허난 가족들은 그 군인 몰르게 사람 빌언에 도둑질허듯 그냥 그 시체들을 간 가져오는디, 짤라분거 못 찾는건, 혼바당 물러레 털어져부난 못허는거. 우리 시누인 지금 허지도 못해수다게. 허지도 못핸 이제 기냥 내불고."

▲ 양달후(남, 1926년생, 조천 대흘)

'도피 입산 후 귀순...귀순공작 펼쳐'

   
"개인감정이고 뭐고 간에 정작 문제는 미국이우다. 왜냐하면 4·3 나기 전에 3월 1일 날. 3·1운동 기념대회를 북국민학교에서 가졌거든. 제주도 청년들이 몇 천 명이 전부 모여나수다. 선언문이 끝나고 북국민학교를 나왔는데 우리는 제일 뒤에 떨언졌단 말이야. 우리가 북국민학교 정문을 나오기 전에 총소리가 너댓방 나니까 홈치 난장판이거든. 수천 명 모였다가 목숨은 살라고 동서로 막 흩어졍 도망쳤어. 말자에 들으니까 누가 죽었는진 모르되 총 맞아서 사람이 죽었다 해. 이제 국민들도 그 때문에 악이 났단 말이우다. 왜, 당당히 3·1운동 기념식을 가지는디 좌익인지 우익인지, 보통 청년들도 다 뭔지 것도 모르는데. 미국놈들 명령 하에서 그땐 말 탄 기마병이 수십명 댕기고, 군인 경찰 헐 것 없이 관덕청 마당에 꽉 모여 샀단 말이우다. 이거여 저거여 해도 미국이 군대가 오라가지고 멀쩡히 4·3운동을 맨들어분거란 말이여."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산촌 촌놈덜은 몰라도 죽여불고...'

"농촌에 사는 우리 같은 놈덜은 그땐 허뭇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어떻게 하는지 몰랐단 말이우다. 해변가에서는 날마다 사람이 죽엄다 뭐해도 우린 날마다 일 나가서 어둑으면 집이 들어오고. 이렇게 허다가 이제 경찰, 군인들이 산촌에까지 모여들어서 산촌 사람들까지 죽이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이렇게 허니 이건 농민이고 누게고 밤에 집에서 발 벋엉 잠잘 여유가 없단 말이우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농민들은 숨엉 자당 뒷날은 일하고 토벌들 올라온다허민 다 도망가고, 숨고 이렇게 허는 것이 결국은 제주도 4·3사건이라. 서북내기 경찰관도 그냥 막 담아노니까 무조건 쏘아 죽였단 말이라.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고 올라가곡 헐 여유가 어섯수다. 무조건 허고 쏘아 죽이고 집에 불붙이고. 대흘 김칩에 사람쯤은, 그 사람도 죽었지만.혼 세살쯤 된거 안앙 돋단에, 버치거든. 총 쏘멍 오난 안앙 돋단에 길가에 맹게자왈 밑에 놘, “널랑 여기 밑에 고만이 앉아시라” 해뒁 도망 댕겼단 말이야. 산에 폭도가 뭔지 주동자가 뭐인지도 모르고 우린 목숨 하나 의지해서 살자고. 올라가도 못하고 내려오도 못하고. 이러니 항상 부락 부근 몇㎞ 사이에서만 돌았단 말이우다. 자왈 속에도 강 숨고, 또 그렇지 않으면 굴 같은디도 임시 숨었당 피허고. 음식 같은거 해 먹을 땐 굴속에 강 해먹고. 제일 높이 올라 간 때가 대흘국민학교 붙으는 날. 그날 따라 뒷곶까지 갈 때는 참 조천 면민이 거짐 올랐젠 해도 과언이 아니주게. 3월에, 봄에 내려와서 조천지서에서 시키는 대로 산에 남아 있는 사름들 귀순시키는 일을 했어. 그런데 귀순 시킨 사람들도 여라 사람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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