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근 교수 "4·3=억압적 성격의 제노사이드"

▲ 미 육군역사연구소 윌슨 컬렉션에서 발견된 사진. 이 사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으나 형무소 집단 학살 현장으로 추정된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푸른역사
제주도 전체 인구의 1/10 가량이 죽음을 당한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인 제주4.3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강화 기도에서 비롯된 정치적 학살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저항의 소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비판적 엘리트들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제주4.3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실행에 옮긴 억압적 성격의 제노사이드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4.3 58주기를 맞아 제주4.3연구소가 1일 주최한 전국학술대회에 참석한 최호근 교수(고려대 역사연구소)는 사전에 제출한 '제노사이드 국제연구 성과에 비추어 본 4.3의 성격'이란 연구논문을 통해 제주4.3은 제노사이드로 정의를 내렸다.

1948년 12월 9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는 모두 19개 조항으로 구성된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으며 협약 제2조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는 '국민·인종·민족·종교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최호근 교수는 지난 2003년 10월에 작성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결론을 통해 제노사이드와 4.3이 무관하지 않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으나 4.3보고서 작성주체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국가기구로 여러 가지 유형의 '정치적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국제법적 구속력을 갖고 있는 협약의 규정을 축자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어 4.3의 성격을 제노사이드로 명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그러나 지금의 제노사이드 협약은 유엔 내에서조차 개정 필요성이 계속 제기될 만큼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제주4.3을 제노사이드로 분류했다.

▲ 1952년 군 지프를 타고 제주도를 순시중인 이승만 대통령. 뒷줄은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대장과 제1훈련소장 장도영 준장. ⓒ 국가기록원 소장.
'제주도민=빨갱이' 이데올로기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된 학살

최 교수는 그 근거로 '누가 가해자인가?' 즉 ▲국가의 개입 ▲의도의 존재 ▲학살의 체계성을 분석하면서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던 기간에 이승만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재구성하기는 어렵지만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들은 학살의 절정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사태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의 실질적 정점에 서 있었으며, 1948년 12월 10일 서울시공관에서 열린 서북청년회 총회에서 행한 연설은 준군사단체까지 동원해서라도 제주의 소요를 신속하게 평정하려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제주4.3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 강화 의도에서 비롯된 억압적 성격의 정치적 학살(repressive political massacre)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또 "학살을 계획하고 명령한 권력 핵심부와 현장에서 학살을 집행한 군경 지휘관들을 사로잡았던 공통의 이데올로기는 '제주도민 = 빨갱이'라는 논리였다"면서 "일제 치하에서 내면화된 인명경시 풍조에서부터 복수심과 출세욕, 축재 욕구를 거쳐 유희적 살인충동에 이르기까지 동기는 무궁무진하고 군경조직 특유의 명령과 복종 논리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이 모든 동기들을 합해도 '제주도민 = 빨갱이'라는 주술적 이데올로기가 없었다면 엄청난 규모의 집단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제민일보 4.3취재반이 밝혀낸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 명의로 포고된 (법적근거가 없는) 계엄령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학살이 결정되고 감독되었음을 확인해주는 결정적 근거라면서 "군이 주도하고 경찰이 도우며 서북청년단이 보조하는 식의 역할분담 속에서 학살은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됐다"고 분석했다.

▲ 귀순자 가운데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심문반(1949.4)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 발췌
엘리트 제거-저항소지 차단, 토벌대 1명당 무장대 150명 희생…일방적 학살   

최 교수는 이어 희생자의 비율과 엘리트층의 파괴를 들면서 4.3은 제노사이드로 볼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비율로만 본다면 4.3의 파괴적 결과는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전형적인 제노사이드들에 비해 훨씬 작았다고도 할 수 있으나 ▲제주의 학살이 명실상부한 내전이나 국가간의 전면전 중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19세기 초반 식민지 개척기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원주민과 영국인들이 충돌했을 당시 무장대와 토벌대간 사망자 비율이 10대 1 정도였던 반면, 제주4.3은 150 대 1에 이른다는 G-2 보고서의 내용은 4.3이 치열한 교전의 결과 발생한 불가피한 희생이 아니라 일방적 학살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희생의 정도가 미미하더라도 지도층에 대해 주도면밀한 절멸이 시도될 경우에는 제노사이드로 볼 수 있다는 선례에 비춰, 학살이 끝난 이후 제주도민들 사이에 "몰명한 우리만 살아남았다" "똑똑한 사람 다 죽었다"고 말할 정도로 엘리트층의 희생이 매우 컸다는 것은 토벌대의 목표가 비판적 엘리트들을 도민들로부터 고립시키는 수준을 넘어 물리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저항의 소지를 완전히 차단하는데 있었다는 점도 주요한 근거로 들었다.

▲ 군의 선무귀순 작전에 의해 하산한 주민들.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 많이 보인다.ⓒ 제2연대 제주도 주둔기 앨범에서
미군정·이승만 '제주 = 변방의 섬 = 모반의 섬 = 빨갱이 섬' 인식

최 교수는 '파괴의 방법과 결과'에 대해서도 "제주는 4.3을 겪으면서 개인의 삶이 위협받고, 삶의 토대가 파괴되었으며, 공동체가 붕괴되고, 공동체 의식도 심각한 훼손을 입었다"고 말하고는 "그러나 파괴는 희생자들에만 국한되지 않고 누군가를 총살하면서 가족에게 박수치게 하고 한 동네 사람에게, 그 마을 사람을 찔러 죽이도록 강요한 그 야만적 경험은 생존자들에게 몇 세대를 지나도 사라지기 어려운 죄책감과 불신감을 심어주었다"면서 "이런 악의 씨앗은 당대에는 복수를 낳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공동체의 정서적 끈과 윤리적 토대를 파괴하는 장기지속의 효과를 낳았다"는 점도 주요하게 제시했다.

그는 이어 제주4.3 학살의 동기에 '민족적(ethnic) 차이'가 있었는지와 관련해서는 "4.3 당시 제주 도민이 독자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소유한 민족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제주는 주민들의 자의식에서만이 아니라 그곳을 바라보는 중앙의 시선에서도 하나의 지역이나 지방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제주도 특유의 튼튼한 씨족관계와 주민들의 지방주의 성향은 미군정과 남로당, 그리고 이승만 정부 모두 깊이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4.3을 해결할 수 있는 양대 주체였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 = 변방의 섬 = 모반의 섬'이라는 역사적 인식을 소재로 삼아 '제주 = 빨갱이 섬'이라는 정치적 이미지를 만들어 냈고, 이렇게 조작된 이미지는 학살의 원인만이 아니라 학살이 그토록 대규모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원인까지도 설명해준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이 같은 분석을 근거로 ▲ 1948~1949년 당시 국가권력의 소재와 대통령의 최측근에 있었던 고위인사들의 동향, 군경과 일반 관료기구의 움직임을 종합하면, 학살이 중앙 국가기구에 의해 결정·계획·통제되었다는 점 ▲학살이 제주 공동체 전체의 물리적 파괴로 귀결되지는 않았지만, 토벌대의 작전과정에서 제주 공동체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현저하게 파괴되었고 그 과정에서 구심점인 엘리트집단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던 사실은 4.3의 제노사이드적 성격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건으로 파악했다.

▲ 4.3 당시 군과 경찰에 끌려간 주민들은 대부분 처형당했다.
4.3당시 빨갱이 논리는 종족주의 감정·인종주의 감정과 다를 바 없다

또 학살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던 '빨갱이' 논리는 당시 공산주의자는 위험한 사람이었지만,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주 도민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빨갱이’ 논리는 본질적으로 후투족이 투치족에 대해 갖고 있던 종족주의 감정이나, 터키인이 아르메니아인에 대해 갖고 있던 인종주의 감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단정했다.

이어 4.3을 통해 제주도민이 경험한 물리적·정신적·경제적 파괴는 이미 제노사이드로 공인된 다른 사례들에 비해 그 정도에서 덜 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4.3이 다른 제노사이드들과 달리 전쟁이나 내전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이 같은 상황을 인식한다면 4.3을 제노사이드와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4.3당시 중앙이 제주를 바라보던 시선은 여느 정부가 특정 지역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의심에 차 있었고, 배타적이었다"면서 "4.3은 이승만 정권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실행에 옮긴 억압적 성격의 제노사이드(repressive genocide)"라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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