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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우리 곁으로 온다. 매주 한편씩. 시보다 사람이 큰 시인 김수열.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30여년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며 시를 담은 도시락(島詩樂)을 들고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들과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살다가 시가 된 제주 시인과 그들의 시를 김수열 시인이 배달한다. 섬(島) 시인들이 토해 낸 시(詩)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樂)이 쏠쏠할 테다. 시 낭송은 시를 쓴 시인이 직접 맡고, 김수열 시인은 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끄집어내 우리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닮은 시인의 목소리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슴을 든든히 채워줄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 산책’에 <제주의소리> 독자들도 함께 동행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島詩樂) 산책](19) 못다 쓴 시 - 정군철 시인 / 현택훈


오일장 할머니 장터에 가서
할머니의 거친 손 들여다보고
철공소에서 튀는 불꽃을
또 가만히 들여다보고
봄꽃나무 즐비한 꽃집 앞에서
에쎄 클래식 한 대 피우고
삼덕빌라 202호로 들어와
봄동배추국으로 점심을 먹고
금성오디오로 레너드 코헨을 들으며
베란다 야고 분갈이를 하고
도서관 시창작교실 강의 자료 만들고
필사노트에 좋은 시 한 편 옮겨쓰고
서울에서 교편을 잡은
외동딸에게 이메일로 안부를 묻고
지난 주말에 찍은 동백 낙화 사진을
블로그에 올려 놓고
에쎄 클래식 한 대 피우는데
시가 스멀스멀 신병(身病)으로 다가온다
어둠이 찻잔 속으로
침몰한다


현택훈 :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등이 있음. 제1회 4․3평화문학상 수상.

삼덕빌라 202호에 살았던 한 시인이 있었지요.
오일장에 가서 할머니 장터며 대장간 불꽃이며 봄꽃 즐비한 꽃집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집에 돌아와 레너드 코헨의 느릿느릿한 음악을 들으며 분갈이를 하다가
에쎄클래식 한 대 입에 물고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외동딸에게 메일을 쓰고, 떨어진 동백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고
다시 에쎄클래식 한 대 입에 물고
시가 스멀스멀 신병으로 다가와, 결국 찻잔 속에 가라앉아버린 시인이 있었지요.
그의 기일이 이 즈음일 텐데 레너드 코헨을 듣고 있을 그가 그립습니다.
에쎄클래식 한 대가 간절합니다. / 김수열

김수열 :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 시·시낭송 / 현택훈 시인
* 도시락(島詩樂) 배달 / 김수열 시인
* 영상 제작 / <제주의소리> 박재홍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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