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레코드, 살구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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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레코드> (70) After Hours / Velvet Under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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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lvet Underground / Velvet Underground (1969)

김수영을 생각하면 런닝셔츠를 입은 사진이 맨 먼저 떠오른다. 술 마시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도로를 건널 때는 버스에 치어 세상을 떠난 그가 생각난다. 그를 생각하다 보면 김관식도 생각난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던 괴짜 김관식. 그를 생각하면 막걸리 주전자가 떠오른다. 막걸리를 마실 때는 가끔 김관식처럼 너스레를 떨고 싶어진다. 김관식이 살던 때는 전혜린이 있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고독한 광대뼈가 떠오른다. 김수영 때문에 울고, 김관식 때문에 웃고, 전혜린 때문에 그립다. 영어 원서를 곧잘 읽던 막내 외삼촌은 김수영을 닮았고, 장난스러운 짓을 많이 해서 체통 없어 보였던 생물 선생님은 김관식을 닮았고, 중학교 때 문간방에 세들어 살던 여대생 누나는 정장 비슷한 옷만 입고 다녔는데 전혜린을 닮아 깡말랐고  밤늦게까지 불 켜진 누나의 방 스탠드는 살구색이었다. 누나의 목덜미에선 살구비누 냄새가 났다. 그 무렵 나는 냉장고 소음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중고이긴 했지만 집에 처음 오디오가 들어왔던 그때의 그림자에서도 여전히 위잉위잉 소리가 난다. 막내 외삼촌은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생물 선생님은 젊은 나이에 학교를 그만 두었고, 여대생 누나는 학교를 휴학한 뒤 이사를 가버렸다. 김수영을 생각하면 슬프고, 김관식 생각하면 슬프고, 전혜린을 생각하면 슬프다. 옛날 그림자에선 여전히 레코드가 돌아 검은 소리가 내 귓속에 드리워지는 것이다.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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