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정리위원회, 388건 조사개시 결정

▲ 섯알오름 전경
4.3 이후 예비검속자 학살터로 이용된 섯알오름 학살터에 대한 진실규명이 정부차원에서 이뤄진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위·위원장 송기인)는 25일 섯알오름 학살사건을 포함해 388건에 대해 우선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동안 접수된 2,886건 중 포함 된 것.

우선 조사대상으로 결정된 사건은 ▲제주 섯알오름 사건을 비롯해 ▲영동 황간장터 3·1 만세운동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항일독립운동 ▲반탁 운동가들의 소련 유형 진실 규명 ▲단양 곡계굴 사건 ▲경산 코발트 광산 사건 ▲문경 석달 사건 ▲함평 11사단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강기훈씨 유서 대필 사건 ▲이수근 간첩 사건 등이다.

▲ 25일 열린 과거사정리위원회

또 충북 황간면 장터 3.1 만세운동, 신영동군 흥무관학교 출신의 항일독립운동 및 반탁 운동가들의 소련 유형(流刑) 진실 규명 등 민족 독립사건 관련 3건과 고양 금정굴 양민학살사건 등 6·25전쟁 전후에 발생한 집단희생 사건 등이 포함됐다.

과거사정리위가 이날부터 4년간 실시될 조사를 통해 '규명 결정' 또는 '규명 불능 결정' 판정을 내린 후 사안별로 사건 피해자의 피해보상 및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게된다. 가해자에 대해서는 적절한 법적·정치적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또 과거사정리위는 11월30일까지 추가 진실 규명 신청을 받으며 접수된 사건들은 소위원회와 전체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조사 개시가 결정된다. 신청 사건 외에도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은 진실화해위 직권으로 조사를 결정할 수 있다.

이날 조사개시 결정이 내려지자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상임공동대표 이이화 김영훈 임헌영)은 성명을 내고 분발을 촉구했다.

이들은 "사건들은 오랜 기간 피해 유족들이 진상규명 운동을 전개해 진실화해위 출범 이전에도 언론과 국민들의 주목을 받았던 사건이 대부분'이라며 "특히 문경, 함평, 제주 같은 경우에는 유족들이 진실규명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 1960년부터이니 이제야 진실규명을 위한 국가차원의 조사에 착수하게 된 것도 사실은 너무나 늦은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 일부 유해가 발굴된 고양 금정굴과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도 국가가 이들 사건의 해결을 외면해온 지난 10여 년 동안 발굴된 유해와 학살지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들 사건에 대한 신속하고 정확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발표한 10건의 사건 외에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이하 ‘학살규명 범국민위’)가 지난해 11월에 그간의 실태조사를 기초로 하여 펴낸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에 수록된 사건만도 무려 700여 건에 이르며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건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가 최소한 2,000여건에 이를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실정이 이러한데도 앞으로 4년(2년 연장가능) 동안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진실화해위에서 민간인학살 조사(적대세력에 의한 학살 포함)를 전담하고 있는 조사인력은 28명이며 최대 편제로도 38명에 불과하다"며 "오늘 발표한 10건의 사건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는데 과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도 가늠하기 어렵지만 과연 현재의 인원으로 우선 조사에 들어갈 경우 향후 4년간 과연 몇 건의 사건에 대한 조사가 가능할지도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 섯알오름 학살터에 세워진 안내문

섯알오름은 1944년 말부터 시작된 알뜨르지역 군사요새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일본군 폭탄고이다. 야트막한 섯알오름의 내부를 전부 파내어 그 내부를 폭탄고로 사용했으며, 폭탄고 위쪽 오름정상부근에는 두 개의 고각포진지를 만들었다. 이 폭탄고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폭파되어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골짜기를 만든 것이다. 폭탄고가 폭파될 때 고각포진지 하나도 같이 폭파되어 사라져버렸다.

섯알오름은 4.3이후 예비검속자 학살터로 이용된다. 6.25가 발발한 이후 전국적으로 계엄당국은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의 체포를 지시하게 된다. 이 때 제주지구 게엄당국에서도 820명의 주민을 검속하기에 이르는데, 이들 중 모슬포경찰서 관내 한림, 한경, 대정, 안덕 등지에서 374명을 검속하여 이들 중에 132명을 계엄사령부의 지휘하에 대정읍 상모리 절간 고구마 창고에 수감하였다가 송악산 섯알오름의 일제시대 폭탄고 터에서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집단학살한다. 또한 한림지서에 검속되었던 63명은 전날저녁 대정지역으로 옮겨져서 새벽 2시경에 먼저 학살을 하였으며, 132명은 두시간쯤 지난 새벽 4-5시경에 학살되었다고 한다.

희생자 195명 가운데 한림지역 63명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3년만인 1953년 밤중에 몰래 수습할 수 있어서 한림읍 갯거리 오름 만뱅듸 공동장지에 묻힐 수 있었다.

새벽 5시경에 희생된 132명은 유족들의 시신 수습요청을 묵살해 오다, 군부대 확장공사시 유해들이 드러나면서 1957년 4월  사건발생 6년 8개월만에야 시신을 수습하고 사계리 공동묘지에 부지를 마련하고 무덤을 마련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신 수습 당시에는 오랜 시간의 경과로 희생자의 시신을 구분할 수가 없어서 대강의 뼈를 추스려 무덤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족들은 ‘조상은 1백 서른 둘이되  자손은 하나니 자손 한사람한사람이 백할아버지를 다 내 할아버지 모시듯 모시라’라는 의미의 ‘百祖一孫之地’라 명명하였다.     

백조일손 유족들은 이 땅에다가 전면에 ?백조일손지지?, 후면에는 132명의 희생자 이름을 세긴 돌로 만든 묘비를 세웠는데 1961년 5·16직후인 6월 15일 군사정권의 강요에 의해서 백조일손지지 묘비를 철거하게 하고 유족들이 모이는 것을 방해하려고 일부 유족들을 협박하여 2-3개월동안에 23기의 묘가 이장되기에 이른다.<참고=4.3유적지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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