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 시인이 끓여준 깨죽을 아주 맛있게 먹고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제 마무리 기도를 했던 남원초등학교까지 차로 이동하여 거기서부터 길을 걷습니다. 오늘은 "한빛여성회 쉼터" 원장님과 네 분이 함께 길을 걷습니다. 쉴 때마다 가져오신 산죽차와 된장차를 마십니다.

도법스님께서는 열을 내리고 감기, 홧병에 좋다는 산죽차 만드는 법에 아주 관심이 많으십니다. 식물들 중 가장 알칼리 성분이 강하다는군요. 산죽을 베어 작두로 잘게 잘라 말려서 이틀 동안 물에 우려서 살짝 끓여 마신다는군요. 된장차는 집 된장에 찬물을 넣은 것인데 맛이 아주 정갈합니다.

남원읍사무소에 도착하니 제주 4.3 유족 분들이 박수로 저희를 맞아주십니다. 차로 이동해서 10시30분경 의귀리 "속냉이골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 4.3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군부대가 의귀리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하면서 의귀·수망·한남리 마을에 회오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 12월26일, 2연대는 의귀초등학교에 진을 치고 의귀·수망·한남리에 대한 총살극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총살극은 1949년 1월9일을 전후해 숨어 있던 주민 100여명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의귀초등학교에 수감된 이후부터랍니다.

1949년 1월10일, 산사람(빨치산)들이 5시경에 주민들을 구출하려 한다는 정보가 그 두 시간 전인 3시경에 2연대에 흘러들어갔답니다.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습격한 15명의 산사람은 학교 지붕 위에 기관총을 장착하고서 기다리던 군인들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그들의 주검을 "빨갱이다"라며 주민들을 시켜 인근의 밭에 던지고 몇 줌 흙으로 대충 덮었다고 합니다.

이 곳은 그 15명의 산사람이 묻힌 곳입니다. 속냉이골 무덤엔 꽃들과 풀들이 무성했습니다. 이 무덤은 바로 한 달 전에 발견했답니다. 지금까지는 그 옆길 일제시대 무덤이 있던 곳이 유골이 묻힌 곳인 줄 알았답니다. 속냉이골 무덤 옆에 살았던 주민의 증언으로 이 곳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덤 옆에는 전봇대가 서 있습니다. 원래는 무덤 자리에 들어설 것을 그 분이 이 곳은 유골이 묻힌 곳이라서 안 된다 해서 옆으로 자리잡았답니다. 참 고마우신 분입니다.

여기에 묻힌 산사람들은 빨갱이로 규정되어 아직도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답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날인 1월11일 11명의 수감자가 군인들에게 학살되고, 다음날인 1월12일 새벽 재산무장대가 2연대 2중대를 습격했습니다. 그래서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퇴했는데 이 과정에서 군인이 4명 희생되었습니다. 흥분한 군인들이 수감자들을 끌어내 같은 장소에서 80여명을 총살한 참혹한 학살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아픔 앞에서 우리들은 속냉이골 무덤 앞에서 작은 천도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유족들과 함께 하루 시간을 내어서 벌초를 하고 푯말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이 주변에 있던 3기의 묘를 유족들이 남원읍 수망리에 이장을 한 '현의합장묘'로 갔습니다. 이곳 1733평의 땅을 유족들이 법원경매 입찰에서 5200만원으로 낙찰 받고서 묘 3개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묘 하나 하나에 17구, 8구, 14구로 총 39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겨우 9구만 짜맞출 수 있었고, 나머지는 시신을 볼 수도 없었다 합니다. 흙들과 함께 이것을 화장해서 그대로 이장했다 합니다.

80여구의 시신들을 의귀리에 아무렇게나 맬젓 담듯이 3개의 묘에 의귀리에 매장해 버렸습니다.

유족들은 묘 앞에서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 라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원래 이 일대는 '신선마루터 신령이 노니는 동산터'라고 합니다.

유족분들과 함께 순례단은 천도재를 지냈습니다. 마지막 순서로 묘 주변을 나무아미타불을 염(念)하며 도는데 갑자기 까마귀 5마리가 날아와 저희들과 함께 두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리고는 주변에 빽빽이 들어선 측백나무 꼭대기에 앉아 끝까지 지켜보는 것입니다.

까마귀 한 마리는 흰점이 있었습니다. 음복을 하는 시간이 되자 측백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측백나무 사이를 낮게 날며 날개를 휘저으며 빠져나오더니 무덤 주위를 몇바퀴 돌고는 날아갔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양인필(농사·70)님은 동창생과 가족들이 이곳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그때 나이가 14살이었는데 양인필님은 남원으로 소개명령을 받고 갔고 나머지 분들은 뒷날 내려가려 했는데 불행하게도 전투가 벌어져 학살되었다 합니다. 그 분은 어린 젖먹이에서 90세 노인까지 이 곳에 한데 묻힌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합니다. 그때 5학년 2명, 6학년 2명도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도법스님이 말씀처럼 이 역사적 슬픔 앞에서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후손들이 이런 비극을 두 번다시 당하지 않고 아름답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이 보장되지 않는 이 땅의 현실이 더 슬픈 것 같습니다.

유족회분들이 음식을 마련해 오셔서 그곳에서 순례단을 포함해서 60여명이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유족회 분들이 마음을 모아 탁발금을 모아주셨습니다. 천도재 내내 눈물을 흘리시던 그분들의 마음을 소중히 받았습니다.

다시 길을 걷습니다.

표선면 가시리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주말에 비가 온다더니 바람도 없고 덥고 습기가 많은 날씨지만 그 길을 걷노라니 힘든 줄도 모르겠습니다. 보라색 골무꽃도 보고 하얀 찔레꽃 새순을 벗겨서 꽃과 함께 먹어도 봅니다.

제주 진행을 맡은 오병윤님은 어릴 때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찔레꽃을 가시채로 새순을 먹어야만이 대장이 될 수 있었다 합니다. 먹어보니 가시도 부드럽습니다.

도꼬리낭도 보고 천선과 나무 열매도 따 먹었습니다. 꼭 무화과 열매 같은데 이를 젖꼭지 나무라고도 한답니다. 물론 열매가 젖꼭지처럼 생겼더군요.

'자연사랑'(포토갤러리)에 가서 마무리 명상을 하고 그 곳에서 제주도의 사계와 오름들 사진을 작가님의 설명을 들으며 감상했습니다.

제주인들에게 어디에서 보는 한라산이 가장 아름답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고향을 안다고 합니다. 한라산은 보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데,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서 보는 한라산이 모두들 제일 아름답다고 한답니다. 그리고 주민들은 그 마을에서 보이는 한라산의 모습을 닮는다고 합니다. 정말 다양한 모습입니다.

팬션 등 무분별한 개발로 지금은 없어진 산주변 풍성한 유채꽃과 메밀꽃들을 볼 수 없다는 게 참 아쉽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헐벗은 산에 나무심기를 시작으로 오름에 삼나무를 많이 심어서 오름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며 작가는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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