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4.3연구소는 30일 열일곱 번째 4.3증언본풀이를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제주4.3연구소 열일곱 번째 4.3증언본풀이...학살로 고향 떠난 이들 증언

영화 보다 영화 같은 삶이다. 제주4.3으로 운명이 송두리째 바뀐 기구한 사연들. 고향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고백이 흘러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눈물을 훔치며, 또 숨죽이며 한 개인이 받아들이기 버거운 역사를 마주했다.

제주4.3연구소는 30일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일곱 번째 4.3증언본풀이를 개최했다. 4.3증언본풀이는 2002년부터 시작해 매해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도민 사회에 들려줬다. 올해는 4.3 70주년을 맞아 ‘70년 만의 귀향 70년의 기억’이란 주제로 세 명을 섭외했다. 이들 모두 4.3을 겪으며 어쩔 수 없이 터전을 옮긴 인물이다.

이삼문(78) 씨는 제주시 노형동(옛 노형리 함박이굴) 출신으로 현재 전라남도 목포시에 거주하고 있다. 양농옥(88) 씨는 제주시 오라동(옛 도노미마을)에서 태어나 현재 경기도 의왕시에 살고 있다. 송복희(88) 씨는 서귀포시 서귀동(옛 서귀면) 출신으로 현재 일본 오사카에 있다.

▲ 이삼문 씨. ⓒ제주의소리

# 이삼문 : 성도 나이도 바뀔 수밖에 없던 이유

이 씨는 4.3으로 아버지, 어머니, 두 형, 누나, 할머니까지 모두 잃었다. 졸지에 고아가 되고, 굶주림과 외로움을 이겨낸 이야기는 어느 영화, 드라마 못지않다.

그는 “4.3사건이 터지자 낮에는 군인·경찰들이 마을에 들어오고, 밤이면 좌익머리 쓴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왔다. 아버지, 큰형, 누나는 밤중에 좌익머리 쓴 사람에게 끌려갔다”며 “그 뒤에 어머니, 할머니, 작은 형과 함께 경찰 피난촌에서 살았는데 어머니가 ‘가족 중에 산에 올라간 사람은 나오라’는 경찰 말을 ‘가족 중에 산 사람한테 죽은 사람은 나오라’는 말로 잘못 알아듣고 총살당했다. 그 후로 할머니까지 돌아가시고 작은 형과 나만 남겨졌다”고 지난 과거를 고통스럽게 기억했다.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작은 할머니집에 머물다 제주비행장 부근에 사는 다른 친족 집으로 보내졌다. 배고픔에 집에서 나왔지만 운이 따라 해군장교 김종군 씨에게 잠시 의탁했다. 이후 고아원에 보내진 뒤 목포로 가면서 형과도 헤어졌다. 목포로 간 이유는 해군장교가 ‘아이를 목포로 데려다주면 자기가 찾으러 가겠다’는 말을 고아원에 남기면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해군장교와의 조우는 물거품이 됐고 음식을 찾아 목포 시내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됐다. 인민군이 도시를 점령 했을 때는 굴에 숨어 지냈다. 그 뒤에 무작정 배를 골라 타서 해남 산이면 상공리라는 마을에 도달했다. 그리고 불 켜진 큰 집으로 갔는데 그곳이 바로 제2의 가족이 돼버린 박호배 씨의 집이었다.

이 씨는 “그곳 사랑방에서 지낸지 3년쯤 지나서 13살이 됐을 때, 주인어른 박호배씨가 저를 부르더니 나를 호적에 올려놨다고 알려줬다. 다만 원래 아들 위로 올릴 수 없어서 나이를 낮춰 1953년생 박삼문이 됐다”는 기구한 사연을 털어놨다.

그는 4.3증언본풀이를 계기로 제주에 온 게 무려 66년 만이다. 자신을 반기는 건 제주4.3평화공원에 안치된 가족 위패, 그리고 자신 이름이 적힌 위패다. 

▲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 하다가 눈물을 훔치는 이삼문 씨. ⓒ제주의소리

그는 “막상 공원에 와서 아버지 위패 옆에 제 이름이 새겨진 위패를 보니... 가슴이 떨렸다. 4.3사건으로 우리 가족이 모두 죽었으니까, 9살 어린아이 혼자서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못했을 것 같다”며 “그래도 이번에 제주에 와서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 어머니 무덤을 찾았다. 세 번이나 찾아가서 한 없이 울었다. 부모님께 ‘잘 살아서 왔다’고 말씀 드렸다. 남은 생에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고향을 찾아오려 한다”고 연신 눈매를 훔쳤다.

이 씨는 호적상 4.3희생자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4.3특별법이 개정돼야 가능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4.3은 현재 진행형이다.

# 양농옥 : 아버지 끌려가던 모습 아직도 생생해

양 씨는 도노미마을에 살다가 4.3 때 소개령으로 큰 언니가 사는 도두리 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군인들에 의해 아버지가 끌려가 총살당하고, 도두리 언니 시집 식구들도 몰살당하는 끔찍한 경험을 겪는다. 4.3 고아였던 남편을 만났지만 경찰에게 당한 구타 휴유증에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양 씨는 “10월 그믐 날, 할아버지 제사 해먹고 나니 다음 달 11월 1일에 군인들이 도두국민학교로 다 나오라고 했다. 몽둥이 들고 쫓아내서 도두리 사람들이 다 나왔다”며 “학교 운동장에 모여 있는데 몰레물에서 사람 싣고 지프차가 왔다. 세 사람 씩 세 줄 아홉이었는데 눈을 가린 채 있었다. 그 사람들을 학교 앞 한 길 건너 보리밭으로 데려가더니 담배 한 대 씩 탁탁 물려주고 바로 ‘빠빵’ 하더니 퍽퍽 쓰러졌다. 그 장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리면 몽둥이로 후려치면서 보게 했다”고 기억했다.

양 씨는 “그러고 난 후 연미동 주민 김모씨가 아버지를 가리켰고 9명이 태워온 지프에 눈도 가리지 않고 아버지를 태워갔다”며 “5일이 지나 지프차에 앉아있는 아버지를 발견했고, 차를 뒤쫓아 달려갔지만 보초가 막아섰다”고 말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조우였다. 

▲ 양농옥 씨. ⓒ제주의소리

양 씨는 “다시 5일이 지나 그 차가 오라리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칠성통 갑자정 마크사로 가던 중에 ‘오라리로 간사람 다 죽었져’하는 소리도 들었다”며 “이모가 소고기를 사주며 밥해서 상에 올리라고 했다. 상 차려서 상식(上食)하며 도두리에서 세 자매가 당분간 살았다”고 밝혔다.

피붙이를 잃은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도두리에 시집간 우리 언니도 도두 지서에서 고문 받고 나와 총으로도 안 죽이고 대창으로 찔러 죽였다. 형부는 군인들이 부축해서 서쪽 제주시쪽으로 가고 언니는 반대편으로 끌려갔다”며 “헤어질 때 형부가 ‘아이는 업고 가다가 오레물동산에 가면 내려놓고 가버리라’고 하더라. 어리니까 그러면 살까 했던 것이다. 돌이 못 된 아이였다. 나는 그런 장면을 보기만 했고, 혈육이 볼까봐 나서지도 못하고 숨어서 이 광경을 봤다”고 힘들게 이야기했다.

▲ 송복희 씨. ⓒ제주의소리

# 송복희 :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끔찍했던 서귀포 풍경

송 씨는 4.3 당시 아버지, 동생, 오빠와 함께 서귀면 서귀리(현 서귀동)에 살고 있었다. 서귀포 중심가에서 두 눈으로 목격한 2연대 군인들의 자행은 잊을 수 없이 끔찍했다. 친척 중에는 서귀포에서 유명한 송문희 면장이 정방폭포 부근 논밭에서 총살당했고, 송 면장 부인과 어업조합장이었던 작은 아버지, ‘송구장’으로 불린 마을 대표는 예비검속 당해 행방불명됐다.

송 씨는 “내 나이가 열여섯 살이었는데, 2연대 군인들이 여러 사람 목을 전봇대에 달아맸다. 그 중에 머리 긴 여자는 지금 기억하면 일본 영화에 나오는 귀신같아 정말 무서웠다”며 “군인들이 와서 담배에 불을 붙여서 시체 코에 찔러 넣으면서 놀았다. 군인이 잡아온 여자는 남편이 산에 갔다고 하니 옷을 다 벗겨서 거리를 돌게 했다”고 무서운 기억을 꺼냈다.

그러면서 “서귀포시는 일본 밀항 이후 처음으로 찾았는데 가기 싫다. 모두 다 변해버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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