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난민에게서 70년 전 현해탄 건넌 제주 난민을 보다
시리아 난민에게서 70년 전 현해탄 건넌 제주 난민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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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제주민예총이 주최하고 4.3미술제 운영위원회가 주관한 <4370 예술포럼-세계 난민을 4.3의 눈으로>가 20일 예술공간 이아 창의교육실에서 열렸다.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4.3미술제 일환 포럼 <세계 난민을 4.3의 눈으로>...“아픈 역사에서 실천, 생명 존중 느껴”

1948년을 전후로 최대 1만 명에 달하는 제주인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향했다. 그리고 70년이 흘러 머나먼 중동 시리아 땅에서 그때처럼 생존을 건 탈출이 반복되고 있다. 제주4.3과 재일제주인, 그리고 시리아 내전. 시·공간을 넘어 반복되는 역사 속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사)제주민예총이 주최하고 4.3미술제 운영위원회가 주관한 <4370 예술포럼-세계 난민을 4.3의 눈으로>가 20일 예술공간 이아 창의교육실에서 열렸다.

이번 포럼은 4.3을 70년 전 사건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오늘날 문제와 연계해서 이해하자는 올해 4.3미술제의 연계 행사다. 압둘 와합 헬프시리아 사무국장의 강연, 김종민 전 4.3위원회 전문위원과 임흥순 작가, 안혜경 25회 4.3미술제 전시감독의 좌담으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7년째 이어지는 내전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고통 받는 시리아, '또 다른 제주의 역사' 재일제주인과 재일동포 사회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했다.

# 시리아: 7년 째 전쟁,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

한국에 온지 8년이 되가는 압둘 와합은 시리아에서 태어난 청년이다. 다마스쿠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해 변호사로도 일했다. 2013년부터 한국에서 시리아 난민을 돕는 ‘헬프 시리아’ 활동을 시작해 현재 사무국장으로 시리아 현실을 알리고 있다.

그는 ‘시리아 내전’이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과 독재자의 탄압에서 시작해, 지금은 각국이 개입한 국제전 양상이 됐다고 바라봤다.

시작은 2010년 말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서 번졌던 민주화 운동, 일명 ‘아랍의 봄’이 계기였다. 압둘 와합은 “아랍의 봄 당시 2011년 3월,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노래를 시리아 청소년들이 부르고 학교 벽에 쓴 일이 있었다. 그 노래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바라는 이집트 시민들이 시위에서 불렀던 노래”라며 “그런데 시리아 경찰들은 학생들을 체포해 감옥에 보내고 고문까지 저질렀다. 자녀를 만나기 위한 부모들마저 차단했다. 시리아는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대를 이어 권력을 쥐고 있는데, 아사드 대통령은 청소년 체포 사건에 대해 제대로 해명하지 않고 외면하듯 처리해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시위 시민들은 한 손에 장미꽃, 한 손에 물병을 들고 평화적으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사드 정부는 양보나 합의 없이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자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짓고 “more killing”을 지시했다.

압둘 와합은 “정부군의 탄압은 갈수록 잔혹해졌다. 시위가 일어난 마을에 가서 어린 아이들을 부모 보는 앞에서 죽였다. 이런 방법은 더 이상 반정부 시위에 나서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라며 “그러나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고 시위는 일상생활이 됐다. 결국 2012년 3월부터 시위자를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반군(Syria free army)이 만들어지면서 내전 양상으로 진입했다”고 설명했다. 

▲ 압둘 와합.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친일파 경찰·관리의 민간인 발포에 도민들이 총파업으로 맞서고, 이후 강경 진압과 무장봉기, 나아가 학살로 이어지는 제주4.3과 비슷한 면이 엿보인다.

압둘 와합은 정부군의 탄압과 반군 창설, 이어진 내전 과정에서 다른 나라들이 깊숙이 개입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군에게 군인과 무기를 제공한 이란과 러시아, 반군을 지원하면서 군사 활동에 나선 터키, 내전을 틈타 세력을 확장한 IS(이라크·레반트 이슬람 국가), 그리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반군을 이용한 미국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군, 반군, 이란, 러시아, 터키, IS, 미국, 독립을 원하는 쿠르드족까지...전쟁이 길어질수록 상황은 복잡해져만 갔다. 그 사이 민간인들의 피해는 갈수록 심해졌다. 

압둘 와합은 시리아 인구 2300만명 가운데 500만명은 국경을 넘었고, 700만명은 고향을 떠나 난민캠프 생활 중이라고 내다봤다. 유럽을 비롯한 각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난민이 된 시리아인들, 고향을 떠나 요르단·레바논 등 인접한 나라 국경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는 사람 모두 인간으로서 기본 생활이 힘든 처지에 놓여있다.

압둘 와합은 “전쟁이 7년째 접어들고 있지만 시리아의 미래는 안타깝게도 밝지 않다. 설사 시리아인들끼리 화해를 해도 이미 개입한 나라들이 전쟁을 멈추지 않게 할 것”이라며 “최근 들어 전쟁 중단 합의에 대한 논의가 나오지만 1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다른 나라 군대가 시리아에서 철수하면 상황은 금세 나아진다. 현재 정부군은 러시아를 비롯한 외부 세력의 지원으로 버티고 있다. 어떤 합의가 나오던지 희생은 오롯이 시리아 국민들의 몫”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70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일이 시리아에서 반복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며 "눈물만으로는 부족하다. 관심은 행동과 함께 와야 한다. 커다란 것이 아닌 작은 것부터 행동해야 한다”고 시리아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 재일동포: 통일한국 미리 보여주는 제3의 공간

김종민 전 위원은 30년간 7000명에 달하는 4.3 희생자 유족을 취재하고,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 보고서>와 <제주4.3사건 자료집>, 《4.3을 말한다》 등을 편찬·집필한 대표적인 4.3전문가다. 그는 4.3을 전후로 한 재일제주인들의 역사와 직접 보고 겪은 사연을 묶어 들려줬다.

김 전 위원은 제주사람들의 일본행이 1910년부터 꾸준히 이어졌다고 봤다. 이유는 단 하나 생존. 척박한 제주에서 나와 밥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떠난 것이다. 1930년대는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직항 정기여객선이 취항할 만큼 가까운 관계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적지 않은 수가 일본을 떠나지 않았다. 열악한 제주도 생활 여건, 터전을 닦아놓은 현실 문제, 제주로 입도할 때 담배 20갑 어치의 재산만 지참하게 제한한 미군정의 조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4.3으로 인한 난민은 해안을 봉쇄한 초토화 작전 이전까지 주로 이뤄졌다. 1947년 3.1기념대회와 3.10 총파업, 그리고 뒤따르는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 국면에서 대거 밀항을 시도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지금까지 재일제주인이란 ‘경계인’으로 살아간다.

▲ 김종민 전 위원.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김 전 위원은 “제주인들의 일본 밀항은 4.3 시기와 1965년 한일 수교 정상화 이후 집중적으로 일어난다”며 “한국에서 그러하듯 교포사회에서도 도민들은 ‘섬놈’이라는 천시와 멸시를 받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여 살게 됐는데, 오사카 이쿠노구 쯔루하시 지역이 대표다. 1990년 일본 취재를 갔을 때 쯔루하시 시장에 가니 메뉴판에 자리물회가 있었다”고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설명했다.

일본에서 난민이 된 제주인들은 오늘날 시리아 난민과 차이가 있다. 제주인들은 먼저 건너간 동포들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비빌 언덕’이 있는지만, 시리아 난민은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결행이다.

그렇지만 재일제주인들의 고난도 만만치 않았다. 김 전 위원은 대표적으로 군사정권 시절 정치공작의 피해를 꼽았다.

김 전 위원은 “조총련 활동을 했거나, 북송사건까지 연관된 재일제주인이라면 군사정권이 일종의 건수를 만들 때 가장 좋은 먹이나 다름없었다”며 “군사정권 당시 조작된 간첩사건 가운데 10%가 제주도 출신이 연관됐다는 데이터도 있다. 제주 인구가 남한 전체의 1% 밖에 되지 않음에도 말이다”라고 강조했다.

사례를 꼽자면 1965년 도쿄올림픽 구경 갔던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간 사건, 1971년 재일제주인에게 학교건물 증축 비용을 받았다며 간첩 혐의로 구속된 조천중학교장, 1977년 고향 찾은 재일제주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제주교육대학 초대 학장 등을 간첩으로 낙인찍은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김 전 위원은 “재일제주인과 관련해 가장 인상 깊은 건 일본에 사는 김시종 시인이 남긴 ‘재일동포 사회는 통일조국의 선험적 존재’라는 말”이라며 “재일동포들은 민단, 조총련으로 갈라 서로 대립해도 친인척이기에 제삿날에나 향우회 같은 모임에는 함께 한다. 남한 사회에서 북한을 다녀왔거나 북한사람들을 만나본 사례는 거의 없다. 그렇기에 생각이 다르지만 공존하는 재일동포 사회야 말로 우리가 통일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선험적 존재”라고 설명했다.

▲ 임흥순 작가.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임흥순 작가는 <숭시>(2011), <비념>(2013),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2017)까지 재일제주인들을 소재로 한 작품의 제작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4.3 당시 15세 나이에 무장대 연락책으로 활동하다 지리산 빨치산에 이어 일본으로 밀항한 김동일, 일본군 군복 만드는데 강제동원돼 일본에 끌려갔다가 해방 후 귀국하고, 4.3 때문에 다시 일본으로 피신해 ‘자식 낳으면 절대 제주도로 보내지말라’고 치를 떨었던 조천읍 신촌리 강모 할머니 등 재일교포 1세대와 만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어 김동일 씨의 아들 김고인, 오광현, 고정자, 오충공, 고이삼 등 2세와 축수선수 안영학을 비롯한 3세까지의 인연도 소개했다.

임 작가는 “10년 가까이 4.3과 재일교포를 취재하면서 느낀 점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차별이 삶 속 구석구석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라며 “4.3 당시 군경, 서북청년회가 제주도민을 사람으로 봤다면 그런 짓은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시리아 내전에서도 느끼지만 우리 모두에게 인간 존중, 나아가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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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3
서귀포 2018-04-21 15:30:36
이젠 4.3에 뭐든지 같다 붙이민 글이네,식민지시절허고 전쟁중인 난민허고 고튼가?좌우간 선동에 귀재들.
1.***.***.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