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주말산책] '변시지전'과 '노은님전'

하나, 절정기에 다다른 팔순의 제주화가 변시지(邊時志)

▲ <태양과 섬과 새> 6호 유화 2001
ⓒ 김형순
 
오는 8월11일까지 서울 운현궁 건너편 인사동쪽 '미술관 가는 길' 미술관 개관기념 초대전에서 광풍 같은 파도가 이는 제주풍물을 담은 변시지 화백 작품 4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광풍은 살아있음의 진원지(?)

제주가 고향인 변시지(1926~) 화백은 평생 그림을 그렸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제주의 미친 듯한 폭풍 속에서 꿈틀댄다. 그림 속 주인공은 외딴 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또 뭔가를 그리워한다. 어느새 그림에선 세월의 흔적은 사라지고, 삶의 잔재만 남는 것 같은 효과를 낸다.

그의 그림에서 바람이 불지 않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지만 바다는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힘과 활력과 열정과 에너지가 넘친다는 뜻인데 이런 극적 효과는 오랜 명상과 모험과 시도 끝에 터득한 그만의 방식이다. 극도의 생략된 색채와 형태 속에 뭐라 할 수 없는 생생함과 절절함이 전해진다.

그 속에는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바다의 파도, 해안가 벼랑에 쓰러질 듯한 초가집, 그리고 안개가 낀 들판의 소나무, 모진 바람에도 꿋꿋이 걸어가는 조랑말이 있다. 그리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꾸부정한 사나이가 있다. 이것은 변시지 그림의 독특한 아이콘들이다.

 
▲ <떠나가는 배> 2호 유화 2005
ⓒ 김형순
 
또한 그의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여백이 넓게 퍼져 있다는 점이다. 바탕색 황토 빛 혹은 황갈색에 황금빛이 투영된 제주의 사면바다가 널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혼자 벌판에 서서 온갖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거적을 입고 외로운 모습으로 뚜벅뚜벅, 느리지만 꾸준히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모습이 바다에 취한 광인 같기도 하고 세상을 다 초월한 성자 같기도 하다. 세속적 시선에 한눈팔지 않고 자신을 끊임없이 반추하며 자신의 길을 걸어온 작가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일본생활 청산, 제주로 귀향

그는 1926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6살 때 부친을 따라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1947년 '일전(日展)'에 입선했고, 1948년 일본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최연소나이에 최고상을 수상하여 일본열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6년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결국 고향인 제주에 정착한다. 그는 매일 바닷가에 나가 관찰하던 중 서울이나 일본과는 다른 자연과 가장 가까운 제주도만의 빛을 발견하고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전설적 설화를 들려주듯이 재창조해냈다.

변시지는 꼭 제주가 아니더라도 고향 이전의 근원적 고향을 그리고 있고, 가장 한국적 코드인 소나무, 초가집, 돌담, 해녀, 조랑말 등을 복원시켜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이대로 가는 길> 100호 유화 2006
ⓒ 김형순
 
이런 그림은 우리도 모르게 세계화단에 닿아있다. 세계적 미술사이트 'www.ocaiw.com'에 세계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드문 한국화가다. 이번 전에 선보이는 <난무>, <이대로 가는 길>도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앞으로 10년간 전시된단다. 한국 문인화양식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가 1981년 파리에 가서 그린 에펠탑 그림에서도 제주도냄새가 난다. 하긴 화가는 가장 많이 본 것을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제주도는 그의 고향이고 가장 많이 봐왔고 가장 잘 알기에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건 당연하다.

어떤 절망도 넓은 품으로 안고

이번 전시회 큐레이터 김현정씨는 "작가가 어떤 절망과 불안, 고립과 고통, 외로움과 기다림을 이야기하든 그 밑바탕에는 언제나 삶과 우주만물을 깊이 품어 안는, 보다 높은 차원의 긍정과 포용이 깔려있다"고 귀띔해준다.

 
▲ <절망> 5호 유화 1991, <절망> 6호 유화 1991
ⓒ 김형순
 
<절망>이라는 작품에서도 나타나지만 그에게도 어두운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60~70년대 이중간첩으로 오인 받아 안기부 미행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기존화단에서 거의 외면당하다시피하여 화가로서도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의 회화구도엔 형언할 수 없는 비애와 고독감이 녹아 있는데 그런 여러 악조건들이 그림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림 속 인물이 대부분 혼자인데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대화'를 촉구하는 것을 암시한단다.

이제 그는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와 세상의 비난을 이겨낸 작은 거인으로, 무아의 경지를 개척한 대가로, 제주의 화가로 달마로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화가로, 한국미술사에 오래 남을 것이다. 그는 평생 관객의 요구에 끌려가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가장 독창적 화풍을 일구어낸 작가로 남게 될 것이다.

둘, 자연철학자 경지에 다다른 재독화가 노은님(盧恩任)

 
▲ <불사조, 왼쪽> 50×70cm 유화 <미쉘스타트 정원> 50×70cm 유화 2006
ⓒ 김형순
 
재독작가 '노은님전'이 서울 관훈동 갤러리아트링크에서 7월29일까지 열린다.

노은님(1946~)은 24살에 간호보조원으로 독일로 떠나 1970년대 우여곡절 끝에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해 유명작가가 되었고 지금은 모교의 대학교수다. 최근엔 독일인 화가와 결혼하여 소꿉장난하듯 재미있게 살고 있단다.

그의 그림은 얼핏 보면 어린 초등학생이 그린 것 같다. 무심하게 선을 내려간 것 같다. 장난삼아 아무런 의도 없이 그린 것 같다. 그렇지만 완숙기에 들어서면서 이젠 거의 대가의 경지에 닿아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원래 대가란 천진의 세계를 추구하지 않는가!

현대인들이 수월하고 편안하고 재미있는 것을 찾는 것은 그들의 일상이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리라. 마치 관객들에게 마음의 서비스라도 하듯 그렇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내면의 어둠과 먹구름을 말끔히 씻어준다.

자연 속 여행 떠나기

 
▲ <바다 속> 50×70cm 유화 2006 <바다 속> 50×60cm 유화 2006
ⓒ 김형순
 
그녀의 작품에는 유난히 물고기가 많다. 작가의 무의식적 세계에는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놀이경험이 모든 창작의 모태와 근거가 되는 모양이다. 작가는 자신의 수필집 <내 짐은 내 날개다>(2004년)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전주시 교동 집 앞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옆으로 한벽루(寒碧樓)가 있고 오목대산이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동물을 좋아하시던 아버님 덕분에 어린 시절 동물들과 자랐고 산으로 돌아다니며 컸다. 매일 물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는 것이 내 일과였다."

그녀는 독일에 살면서도 조용한 자연 속에서 영원을 느끼고 우주와 하나 되려는 동양적 자연관을 간직하고 있었다. 자연은 그녀에게 구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자연을 말없는 화가요 조각가로 보았다. 그래서 자연을 닮은 그림을 지금도 계속 그리고 있다.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

작가는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면서 가장 행복한 날은 오늘이라고 말한다. 어제에 얽매이지 않고 내일에 기대지 않고 하루라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작가로서 안으로 품고 있는 치열한 창작의 열정과 각오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의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 <무제> 180×240cm 유화 2006
ⓒ 김형순
 
작가는 고통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그녀가 독일의 낯선 문화와 귀머거리 생활에서 얻은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컸으리라. 한 번은 인디언으로 몰려 인종적 고초를 겪기도 했단다.

그러나 그런 소수자, 약자로 살면서 수모를 당했기에 오히려 그녀는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또 작가를 괴롭혔던 독일 사람들에게 예술로 갚아줄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화가에 열광하는 독일인들

1992년 사간동 '갤러리현대'의 고은님전에서 그녀를 피카소에 비견될 작가로 소개하는 독일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따지기를 좋아하고 복잡한 일상을 사는 독일인들에게 왜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동양작가는 더 큰 위로와 공감을 주었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를 국립대학교수로도 초빙하며 그렇게 열광할 이유가 뭔가.

그녀는 60살이 다 되었건만 아직 자신의 사춘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정신은 그녀의 작품에 반영되어 철없는 아이의 장난기 같은 선긋기로 나타난다. 아래 99년 작 공공미술품에도 그런 점이 잘 드러난다.

 
▲ <봄나들이> 1999 1440×240cm 유리 조명 등 혼합재료. 2호선 역삼역에서 GS 강남센터 가는 연결 통로에 위치. 굵은 선의 해학적 터치가 인상적이다
ⓒ 김형순
 

작가의 작품과정이 담긴 수필을 읽다보면 그녀는 이제 거의 자연철학자나 노자의 경지에 닿은 것 같다. 앞으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기대해본다.

"가을이면 사람들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흩어지는 맨몸의 나무로 서 있는 것 같다. …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진리의 길이 열리고 그 길에서 모든 원초와 만난다. 그건 바로 도(道) 혹은 무(無)와 통한다. 예쁜 것, 귀한 것, 미운 것, 천한 것 할 것 없이 말없이 그냥 느낀 대로 살 뿐이다. 내가 아직 누군지 몰라도 상관없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의 기사제휴 협약에 의해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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