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18) 올더스 헉슬리 저, 안정효 역, 《멋진 신세계》, 소담출판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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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더스 헉슬리 저, 안정효 역, 《멋진 신세계》, 소담출판사, 2018. 출처=알라딘.

요즘 중년 남성들에게 최고의 인기 TV 프로그램은 <자연인>이라고들 한다. 복잡한 도시 속의 부대낌에 지친 까닭일까? 도시 생활에 대한 반발일까? 그들이 꿈꾸는 미래가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자리가 아니고, 안락한 대저택이 아니라는 사실은 꽤나 흥미롭다. 그들은 세속의 욕망이 그리는 평범한 장밋빛 환상이 아니라 거친 산 속의 고독과 낭만을 원한다는 것.

물론, 도시의 생활 속에서 남성의 야성을 상실한 그들은, 대자연 속에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롭게 남성성을 표출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획일적으로 제시되는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왕국과 삶의 법칙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인적이 드문 저 산골밖에 없다는 처절한 인식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 즐겨 보는 프로그램도 아닌데, <자연인>을 떠올린 것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때문이다. 반(反)/유토피아 문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이 소설은 1932년에 발표되었다. 소설이 그리는 ‘멋진 신세계’는 A. F.(After Ford: 포드 기원[紀元]) 632년의 세상이다. 소설이 그리는 세계의 사람들은, 1908년 자동차 대량생산에 성공한 포드를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한다. 그들은 신을 부르는 대신(Oh, Lord), ‘오 포드여’(Oh, Ford)라고 부른다.

이처럼 이 소설 속의 ‘세계국(World State)’은 먼 미래를 그리기는 했으나, 집필 시기인 1920~30년대의 사회적 조건과 과학기술의 수준을 반영한다. 즉, 과학소설의 중요한 기법인 외삽법(外揷法, extrapolation)을 활용해서, 당시 사회적 상황을 기준으로 삼아 미래의 과학기술의 발전과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상상한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헨리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해서 T형 포드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는 체계, 즉 이른바 ‘포디즘’을 최초로 고안했다. 오늘날, 포디즘은 포드 사(社)의 공정 체계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로 이루어지는 경제와 산업 사회를 두루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이 포디즘이 세계국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 이곳에서 포디즘을 통해 생산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다. 

소설의 첫 장면은 ‘부화-습성 훈련 런던 총본부’라는 곳에서 시험관 아기가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의 자동차처럼 ‘대량 생산’되는 풍경을 묘사한다. 이곳에서는 난자 하나에 96명의 인간이 태어난다. 개성과 자유를 상실한, 획일적인 현대인을 향한 경고였을까. 게다가, 그들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처럼, 신체적 조건과 지적 능력에 근거해서 사회 계급이 나뉘어져 있다. 또한, 한 계급 안에서 더블 플러스, 플러스, 마이너스처럼 세분화된 계급이 존재한다. 소설 집필 당시, 우생학적 사고에 대한 풍자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세계국의 시민들이 계급으로 분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불행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아기 때부터 철저히 습성 훈련이라 부르는 조건 반사, 반복적인 세뇌 교육을 통해서 자기 계급에 만족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는 당시 인간을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로 본 행동주의 심리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장면에 불과하겠지만, 작가가 당대의 최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사유했는가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세계국의 인간들이 불만 없이 살아가는 이유는 세뇌 교육만이 아니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소마’(soma)라고 불리는 일종의 마약을 지급 받는다. 소마는 세계국의 인간들을 즉시 만족하게 해주고 슬픔과 고통과 고독을 잊게 해준다. 또한 발전된 과학기술이 그들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해주는 것은 물론이다. 심지어 과학기술은 무한한 발전이 아니라 딱 이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준만큼만 제한된다.

또한 세계국에서는 촉감 영화나 장애물 골프 같은 오락과 스포츠가 그들을 항상 즐겁게 했다. 하나 더. 가족이란 얼마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인가. 아기 공장과 같은 곳에서 태어나는 세계국의 사람들에게 아버지나 어머니란 성가신 존재가 있을 리 없다. 성관계는 어떤가. “우리의 프로이트 님”(80쪽)이 걱정하지 않도록,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공유한다.”(82쪽) 성적 억압이 사라진 이 사회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자유롭게 누구든 성적 유희를 즐긴다. 소마(soma),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 섹스(sex)가 결핍 없이 충족되는 4S의 나라랄까.

그러므로 세계국, 이 ‘멋진 신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불행과 불만을 모른다. 그들은 고독을 모르고, 죽음에 대한 불안과 번뇌도 없다. 그들은 개성과 실존적 삶이 없으며 집단과 공동체의 품 안에서 만족한다. 그저 ‘버나드 마르크스’나 ‘헬름홀츠 왓슨’과 같은 몇몇 극소수의 알파 계급 인간들만 자기 회의와 불만에 휩싸여있을 뿐이다. (버나드 쇼와 칼 마르크스에서 비롯된 이름에 주목하라.) 그나마 그들은 의심하는 관리자에 의해 좌천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불만에 휩싸인 버나드 마르크스가 야만인 보호구역에 여행 갔다가 (본래 세계국 문명인 부모의 아들인) ‘야만인 존’을 데리고 온다. 그는 야만인이되, 늘 셰익스피어의 거의 모든 작품을 외우는 특별한 인간으로 등장한다. 물론, 신과 고급 문학, 순정한 연애, 죽음의 공포 같은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지 오랜 이 신세계에서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들은 그저 폭복절도할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그는 세계국에서 열 명밖에 없는 통제관 가운데 한 사람인 ‘무스타파 몬드’와 대화를 나눌 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멋진 신세계》362~363쪽
존은 ‘멋진 신세계’의 안락과 쾌락을 기꺼이 포기한다. 아니 오히려 그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한다. 그에게, 도시 문명 혹은 과학 문명이 제공해주는 안락은 무조건적인 행복의 다른 이름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행복이란 말로도 담기 어려운 개성과 자유의 가치를 추구해야한다고 믿었던 것인지 모른다.

오늘날, 이 시대의 야만인들은 ‘불행해질 권리’를 새롭게 주장한다. 그들은 아파트 욕실의 온수가 아니라 얼음이 낀 계곡물에 세수를 하면서 포효할 권리를 주장한다. 그들은 정말로 멋진 신세계의 삶은 컨베이어 벨트 위가 아니라 야산과 계곡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멋진 신세계》의 전체주의적 국가 세계국에서조차 야만인 보호구역과 반역적 사상을 지닌 이들을 좌천시키는 아일랜드라는 구역이 존재한다. 그곳은 마치 동물원이나 유배지 취급을 받는 곳이긴 하지만, 적어도 유토피아에 반하는 이들을 완전히 ‘멸균’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적어도 우리 사회의 미래에 최소한 그런 보호구역과 유배지라도 존재하기를 바란다. 오, 포드여(Oh, Ford), 그리하여 그들이 마침내 불온한 상상과 불행할 권리를 부르짖을 수 있도록! 

▷ 노대원 제주대 교수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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