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19)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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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출처=알라딘.

맥아더는 단지 자신의 입장에서 전쟁을 승리고 이끌고자 한 전형적인 군인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 《맥아더와 한국전쟁》 중에서

이 책은 맥아더에 대한 역사적 인물사적 평가, 그리고 한국전쟁과 연관된 맥아더에 대한 평가를 실사구시의 태도로 담담하게 탐색한다.
 
맥아더는 1880년 육군 중장 출신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형 2명이 모두 군인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군인 엘리트 출신 집안으로 맥아더 또한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프랑스 전투작전과 라인 지구 점령군의 전투에 참여했고, 1919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22년 필리핀 마닐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18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7년 후에 소장이 된 맥아더는 1930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면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군의 최고수뇌로서 5년 동안 주력한 사업은 대공황의 타격으로 약해져가는 미 육군의 군사력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1937년 9월 건강상의 이유로 전역을 했지만,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5개월 전이 1941년 7월 26일 미 극동육군 사령관으로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다.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에 맞서 필리핀을 방위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1941년 12월 일본군의 기습으로 남부 지역으로 퇴각했다.

1942년 4월 18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맥아더는 남서태평양 전역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었다. 참모진과 정보부대를 완비한 맥아더는 1943년 필리핀에서 붕괴된 미 극동공군을 새로이 설립했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솔로몬 제도의 남태평양군은 일제히 북진해 라바울 시를 제압하고 많은 일본군 부대를 우회하는 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퇴했다.

1944년 12월 16일 미국 상원은 육군대장 4명과 해군대장 3명을 원수로 승진시키는 안을 승인했다. 루즈벨트는 즉시 마셜과 맥아더, 아이젠하워, 그리고 아놀드를 육군원수로, 레이히와 킹, 니미치를 해군원수로 임명했다.

육군 원수로 승진하고 4개월 후 맥아더에게는 태평양의 모든 지상군의 지휘권이 가진 미 태평양육군사령부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또한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8월 12일, 트루먼은 영국의 애틀리 수상,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장제스로부터 맥아더를 일본 점령 연합국최고사령관에 지명한다는 데에 동의를 얻었고, 8월 15일 공식적으로 이를 맥아더에게 통보했다. 태평양전쟁을 승리를 이끈 맥아더는 세계의 가장 주목받은 군인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종결 이후 맥아더는 일본 통치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맥아더의 일본 점령정책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초기 점령정책은 군국주의 제거, 경제 복구, 자유주의 헌법의 기초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냉전이 시작되며 일본이 공산주의 상징적 방어지역으로 전환된 1947년 이후 이러한 개혁정책도 보수화 정책으로 반전되었다. 1947년 1월 1일 맥아더는 극동군 총사령관직도 맡았다. 극동군사령부는 일본, 남한, 류큐 제도, 필리핀, 마리아나 및 보닌 제도에 있는 미군을 모두 관할했다.

일명 맥아더사령부로 통칭되는 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GHQ/SCAP), 태평양육군사령부(GHQ/AFPAC), 극동군사령부(GHQ/FECOM) 모두 맥아더가 총사령관이었던 것이다.

연합국최고사령관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발발로 인해 미군이 참전하자, 1950년 7월 7일 유엔군총사령관의 임무도 겸임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초기 지연전술을 통해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반격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는 38선 북진을 통해 북한 지역의 점령을 완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인해 전황을 역전되었고, 맥아더는 중국으로의 확전을 주장하면 워싱턴 정가와 대립했다. 

결국 1951년 4월 12일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전격적으로 해임되었다, 4월 20일 맥아더는 상하 양원합동의회 연설에서 훗날 유명해진 고별사를 낭독했다. 1964년 4월 3일 84세의 나이로 워싱턴 DC에서 타계하여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저자는 맥아더의 약력에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하고 있다. 對아시아관과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이 그것이다. 맥아더의 생애 가운데 20여 년을 아시아 지역에서 근무했고, 그의 이러한 경험은 그가 아시아우선주의자로 대표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맥아더는 태평양전쟁보다 유럽 전쟁을 우선시하고 자기가 담당한 남서태평양지역보다 중부태평양 전역을 우선시하는 상부의 결정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유럽은 이미 기울어져가고 있는 대륙인 반면에 아시아는 미국의 장래에 중요한 전략적 대륙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맥아더의 견해는 유럽에서 영국 및 소련과 협조관계를 통해 전쟁을 수행하려는 국제주의자들에 맞서 태평양전쟁에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공화당 고립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맥아더에게 반공주의는 견고화 된 신념이었다. 또한 맥아더에게 반공주의와 더불어 중요했던 것은 기독교 사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독교주의는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로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맥아더의 신앙은 일본과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맥아더의 아시아우선주의와 반공주의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맥아더의 호의는 일본을 향하고 있었고 한반도는 반공의 시선만이 강타한 지역이었다. 맥아더는 의회 청문회에서 일본과 대만을 미국의 안보와 이해관계에서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지역으로 평가했다. 반면에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의 안보에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으로 평가했다.     
1945년 8월 30일 오후 2시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일본의 아츠기 공항에 내린 이후, 맥아더는 ‘푸른 눈의 대군’, ‘일본의 구원자’로 상징되었다. 가해자 일본인에게 맥아더는 관대한 통치자였다. 그러나 피해자 한국인에게는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특히 맥아더 포고령으로 대변되는 미군정정책은 피해자 한국인에게는 냉혹한 점령정책이었다. 남한의 현지 사령관 하지중장은 맥아더의 직접 지시를 받는 상하관계에 있었고 따라서 국무무나 국방부 또는 합참의 지시는 맥아더사령부를 거쳐 전달되었다.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에서 개최된 항복조인식에서, 미 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은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 대장을 대신하여 나는 남조선 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자 조인을 시작하겠다”라고 선언했다. 맥아더의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령은 점령군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군정 실시도 명확히 하고 있다. 오히려 패전국에나 어울릴만한 성명이었고, 이렇게 위협적인 포고령은 한국인들에게 위협적이었을 거라고 맥아더의 전기 작가 제임스는 평가했다.

맥아더의 반공주의는 남한 점령 이후에 더욱 확고하게 한반도에 투영되었다. 맥아더는 하지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는 점령성이 강한 질병으로 강제로라도 박멸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고, 따라서 남한 내의 소요사태를 공산주의 확산의 전조로 간주했다.

인천상륙작전의 빛나는 전과로 전황을 역전시키고 부하들과 인천 앞 바다를 걸어가는 그 유명한 포즈는 전 세계의 전파를 탔다. 선글라스, 파이프, 그 예의 포즈 속에서 최고의 군인으로 인기 있었던 맥아더는 우리에게는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기독교인 이승만에게는 관대했지만, 한국인의 자주적 독립국가 수립의 열망에는 관심이 없었던 맥아더의 정책은 하지의 24군단의 미군정에게 이어졌다. 반공주의의자 맥아더에게 한국전쟁은 공산 중국까지 분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 바람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한국전쟁이 맥아더에게 어떤 의미였는가는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맥아더가 영웅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맥아더에 대한 역사적, 인물사적 평가가 우선되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맥아더의 일생과 사상, 그리고 한국전쟁의 역사적 맥락을 탐색했다. 저자의 논거와 열정을 지지하지만, 맥아더에 대한 비판적 감정이 먼저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저자의 지적대로 나의 시대는 아직은 맥아더에 대한 비판의 시간대에 머무르는 듯하다.

▷ 양정심
현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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