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을 읽고

그린비 출판사에서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 6번째 편으로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을 발간했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길로 안내하기 위해 쓴 책이다.

아나키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상호부조론'은 아나키스트 '표톨 크로포트킨'이 인간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바탕으로 작성한 선언문이다

아나키즘

   
 
 
나키즘(anarchism)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 단어 아나코스(anarchos)는 "지도자가 없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들"을 뜻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이것이 무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장이 없다는 것은 누구라도 선장이 될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둔다는 의미이므로, 고정된 질서를 억지로 강요하면 곧바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수수한 혼돈, 그것이 곧 아나키즘이다.

아나키즘의 신념과 그에 따른 실천을 두려워한 지배집단은 아나키즘을 비난하기 위한 수많은 용어들을 개발하였다. '무정부주의'라는 말이 식민지해방운동에 가담한 아나키스트들을 이간질하는 말이라면, '테러리스트'라는 말은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아나키스트들을 도덕적으로 매장하려는 무기였다. '상호부조론'은 이런 비난과 그에 따른 오해로부터 아나키즘을 변호하기 위해 쓴 선언문이다.

크로포트킨

크로포트킨은 1842년 모스크바 명문 귀족가문에서 태어나서 황실의 부속학교인 근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근위사관학교의 생활 속에서 "규율보다는 열정과 신뢰만이 병사들에게 불가능한 일도 감행하게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중에 근위사관학교의 상사로 임명되어 궁정에 출입할 때 황실의 사치와 부패를 직접 목격하게 되면서 군대를 떠나 "진흙 같은 빵 한 조각 때문에 투쟁하는 농민들을 위해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기치 아래 창립된 제1인터내셔널(국제사회주의자동맹) 내부에서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대립을 목격한 크로포트킨은 이들의 대립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을 풀기 위해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만나보았다.

그러던 중 스위스 쥐라산 기슭에 살고 있던 시계공들을 만나고 그들 사이에 공유되던 '평등주의', '표현의 독립성' 등 아나키스트 적 경향에 경도되어 아나키즘에 입문하였다.

쥐라연합의 활동 도중 여러 차례 이주와 망명을 거듭하다가 1882년 프랑스 리옹에서 일어났던 폭파사건에 가담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5년 형을 언도받고, 오브 주(州) 클로르보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크로포트킨은 감옥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학장이었던 케슬러 교수의 원고 <상호부조의 법칙에 대하여>를 접하면서 '동물계의 진화에서 상호 경쟁법칙보다 더 중요한 상호부조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크로포트킨은 이 원고를 통해 농민공동체나 콤뮨에 대한 생물학적 근거를 제시받았고,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상호부조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886년 석방된 크로포트킨은 영국으로 이주한 후 <자유>지를 발간하고, 상호부조에 관한 논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다. <상호부조론>은 이 논문들을 모아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상호부조론

<상호부조론>은 다윈의 <종의기원>을 재해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크로포트킨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을 인간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다윈 추종자들에 맞서 "진화의 한 요인인 상호부조는 어떤 개체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메뚜기, 나비, 개미, 매미, 꿀벌 등을 예로 들면서 수많은 하등 동물들의 삶 속에서도 상호투쟁보다는 상호부조가 더 자주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런 상호부조 정신에 사람에게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19세기까지 유럽과 아시아에 남아있는 원시부족을 분석하여 "절제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근대의 산물이지 원시인의 특징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또 유럽의 촌락공동체를 분석하면서 촌락공동체는 여러 가지 형태로 가능한 상호지지, 폭력에서 보호, 지식이나 인종 간의 결속, 그리고 도덕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합이었고, 민회는 민주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촌락공동체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자유주의와 계몽사상이 성장하던 중세 도시에는 촌락공동체의 연대원리 말고도 새로운 요소가 필요했는데, 길드는 이런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고 했다. 길드는 구성원 간에 언제나 평등하게 대하기로 합의하고, 서로 도와주며 분쟁은 모든 사람들이 선출한 재판장에 의해 해결되었다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몽골과 터키 등 강력한 정복국가가 출현함에 따라 외부의 침략세력에 맞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중세도시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유럽 전역(특히 스위스)에서 공유제가 유지되고 있었던 사실을 예로 들면서 그 이후에도 상호부조의 삶은 남아있었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아나키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1980년대 말에도 아나키즘은 폭주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에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비판하는 운동에 이르기까지 어김없이 자신들의 상징인 검은 깃발을 들어올렸다.

생태주의와 대안공동체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아나키즘은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감을 내세우는 주장"인 동시에 "정치변혁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회적 자기결정권 행동"이다. 아나키스트들이 교육에 관심을 둔 이유는 바로 사회적 자기결정권을 형성하는 과정이 교육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에 따라 아나키즘은 레페에 의해 스페인의 '근대학교'에서 꽃을 피웠다. '근대학교'는 "학교에 다니는 소년 소녀들이 진실하고 정의로우며 편견에서 해방될 수 있게끔" 돕겠다는 설립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아나키즘은 때론 사회주의자의 모습으로, 때론 마르크시즘과 대립하면서 때론 테러리스트의 모습으로, 때론 평화주의 실천 활동으로 역사에서 다양한 얼굴로 그 생명을 이어 왔다. 세대와 환경이 변하더라도 인간의 사회성과 연대에 대한 무한한 확신은 민중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아나키즘을 무덤에서 소생시켰다.

정치도 경제도 신자유주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고, 사회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져 가는 대한민국의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행복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을까? 잃어버린 행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출범했던 정권 하에서도 어김없이 배신과 절망의 나락으로 내던져진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아나키즘이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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