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용찬 열사 추모 주기에 붙여

▲ 지난해 열린 양용찬 열사 추모 14주기 행사 모습.
필자에게 1991년은 이전, 이후를 통틀어 어느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참담함을 안겨준 잔혹한 해였다. 87년 이후 지속되어온  민주화에 대한 열정과 희망이 폭력과 배반으로 인해 내 안에 상처와 좌절만 남겨준 해였기 때문이다.

90년 민정당, 통일민주당, 공화당이 만들어낸 3당 야합은 수구진영의 일방독주를 가능케 하였고, 그 결과로  91년에는 노태우 정권으로 하여금 파쇼적 폭압을 더욱 노골화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91년 봄에 명지대 1학년이었던 강경대 학생이 전경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타살당한 사건은 파쇼 권력의 횡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노동운동에 대한 정권의 탄압 또한 극에 달했는데 그 예로 부산의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던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해 시신이 되어 가족들 품에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한진중공업 인근에서 학교를 다녔던 필자는 아빠의 주검 앞에서 고인(故人)의 여섯 살 난 아들 '박용찬'이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던 것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사건 역시 권력의 야만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91년 여름에는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국내 사회변혁운동을 담당하던 주체들로 하여금 이념의 혼돈과 희망의 상실을 경험하게 하기도 했고,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면서 국제적으로 한반도 내 2개의 정부가 공인되기도 했다.

여기까지 모든 일은 훗날 언론이 386이라 칭했던 세대들이 경험했던 91년 민주진영의 절망과 혼돈에 대한 집단적 기억일 것이다.

제주도개발 특별법과 신 모교수에 대한 '단상'

91년이 내안에 고이 기억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제주도개발특별법’에 대한 추억에 있다. 처음에는 제주대학교 학생들을 통해 전해오는 소식을 대도시에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던 향우회 소속 학생들을 투사로 만들게 되었던 사건은 ‘양용찬 열사’의 죽음에 관한 급보였다. 

제주도개발특별법에 반대하며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양열사가 유서를 대신해 어머니에게 남겼다는 시 한편은 타지에서 공부하던 많은 향우회 학생들을 반정부 투사로 만들어버렸다.

특별법반대 대열을 따라다니던 중 특별법의 해악을 설명하게 위해 전국을 순회하시던 ‘고창훈’ 선생을 직접 뵐 수 있었던 것도 당시 필자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고창훈 선생의 논문이 들어가 있는 ‘해방전후사의인식’이라는 책을 필자가 너무도 열독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년 후 필자가 다시 대입시험을 치르고 제주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우연히도 91년 당시 특별법안을 만드는데 참여해서 학생들에게 비난을 받았다던 신모 교수의 교양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참 기 막한 악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신 교수가 먼저 91년 당시의 일을 소회하면서 수업을 진행했다. 그날 강의를 빙자해서 그가 내 뱉었던 내용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 제주지역은 지리적 폐쇄성과 역사적 수탈경험으로 인해 외지인들을 경계하는 폐쇄성이 있어서 지금도 육지 며느리를 맞지 않으려는 경향이 남아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신교수 자신)은 부모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열린 마음으로 육지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다.

3. 신 교수 자신이 제주주민들의 폐쇄성을 가정 절실히 체험한 것은 91년 제주도 개발 특별법을 만들 때였는데, 당시는 제주 주민들이 법안에 무조건 반대했고 학생들은 자신을 오적(五賊)중 한 사람이라 표현하며 화형식까지 하더라.

교수라는 그 분은 당시 특별법안에 개발지구내 토지를 강제 수용할 수 있고, 토지수용에 응하지 않으면 토지주를 징역에 처할 수도 있다는 독소조항이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게 독소조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만했다.

그리고 그 독소조항에 많은 젊은이들이 저항했고 그 와중에 한 젊은 영혼이 목숨까지 버렸는데 신교수는 그 저항의 원인이 제주지역 주민들의 의식의 폐쇄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1991년 상황과 닮은 꼴...되살아 나는 2006년 말

필자가 제주도민으로 91년 특별법반대 대열을 잠시 따라다닌 것에 불과하면서 15년 지난 그 일을 기억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은 번민이 많았던 만학(晩學)의 과정 중에 아주 우연히도 제주도개발특별법과 연관된 어느 교수의 오만한 강의를 묵묵히 경청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다.

지난 97년 정권교체 이후 무덤에 빠져있던 우근민씨를 부활시켜서 민주당 공천을 받게하고 도정의 중심으로 세운 결정적 역할을 도내 386세력이 담당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런데 이들은 91년 특별법 정국에 우 도정을 ‘중앙정부의 대리점’이라 공격하면서 각을 세웠던 인물들이니 저들의 신념이란 것이 얼마나 값싼 것인지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지난 5.31 지방선거를 통해 꽤 많은 386운동권 출신들이 제주도 지방의회에 진입했고 그 의원들 중 상당수가 양용찬 열사와 같은 시기에 같은 깃발아래 서 있었던 이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제주도 개발특별법에 반대하던 주민과 학생들을 ‘폐쇄적’이라 비웃는 그 교수는 도의회의 동의하에 감사위원장에 취임했다. 죽은 자에게 선거권은 없다지만 가끔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라는 충고를 전하고 싶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국민들이 성금을 받고 당선된 대통령이 연정을 부르짖으며 한나라당에 구애의 손길을 보내는 것을 포함하여 이미 여러 군데서 보수대연합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미 참여정부와 제1야당이 힘을 모아 이라크 파병을 진행했고, 농민들의 생존을 벼랑 끝에 내몰지도 모르는 한미FTA를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있다.

적어도 집권정당과 제1야당 사이에 이런 국가 중대사에 대한 이견이 존재하지 않으니 보수대연합은 국민이 모르는 사이에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시위중인 농민이 사망해도 정치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으니 91년 상황과 너무나도 닮은꼴이다.

91년 연말 거대하고 오만한 권력에 맞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던 양용찬 열사의 외침이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2006년 연말 너무나도 절실히 가슴속에 되살아나는 이유는 저들의 그 허망한  하여가(何如歌)의 끝이 필경 대중에 대한 폭력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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