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제주 더듬기] 돌부리에 채여 넘어질때마다 마음속 굴렁쇠를 굴립니다

▲ 제주의 시골길은 중산간 읍면지역에 두루 있다.
고향에 다녀오다가 앞서 가는 시골버스를 뒤따라가게 됐다. 속도는 시속 40 정도. 예전에도 그랬다. 급한 사람은 문명의 세계에 몸을 내맡긴 나 혼자일 뿐, 여전히 버스는 과거의 시간 속을 달린다. 그렇게 보였다. 버스 안에는 얼핏 보기에 할아버지 한 분, 할머니 두 분이 앉아 있는 것 같다.

울퉁불퉁했던 꼬부랑길이 포장이 되고 제법 곧게 펼쳐진 도로가 다를 뿐 내 고향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 어린 시절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마을 어른들이 가고 없을 뿐, 동네를 호령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고함소리가 사라졌을 뿐...하지만 시골버스 안 어르신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면 고향도 나이를 먹고 있다는 생각을 털어 낼 수가 없다.

나에게 고향은 언제나 어린 날의 흑백영상이다. 시골버스가 아직도 건재하듯이 내 마음 속의 고향은 늙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문명에 짓밟히고 망가질수록 지켜야 할 삶의 공동체이기에.

새마을운동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차삯은 10원이었다. 기본요금을 말한다. 그게 몇 년 지나서 15원, 20원으로 올랐지만 나의 기억은 10원부터였던 것 같다. 당시 10원은 시골에서 유일하게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최소 단위가 된 셈이다.

우리들의 버스요금에 비해 버스차장(조수)의 월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옛날 버스에는 두 명의 차장이 있었다. 앞차장과 뒷차장. 70년대 말 아주 잠깐 버스안내양이 있었다가 사라진 것말고는 전부 남자가 차장 일을 했다.

앞차장 월급이 500원이고, 뒷차장은 무보수였다. 어떻게 무보수로 일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겠다. 뒷차장은 일을 배우는 사람이다. 당시로서는 대우받는 직종이 운전기사였다. 버스에 타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운전기사에게는 '선상님' 이상으로 깍듯이 예의를 갖출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이다.

버스가 소를 쳐도 소가 죄를 지은 거지 버스가 잘못한 것이 아닌 시절이었다. "버스운전사가 구속되면 우리 산골에 누가 버스 몰고 올 것 같으냐..."는 말에 소 주인은 그저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저 눔의 소,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고 이게 무신 꼴여어~~"

한솥밥을 먹는 차장 입장에서도 운전기사가 얼마나 부러운 존재였을까. 대기업 총수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존경 반 두려움 반으로 우러러 보는 절대적인 위치였다. 뒷차장이 무보수로 일을 배우면서도 잘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버스기사가 되는 꿈 때문이었으리라.

애환도 없지 않았다. 앞차장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겠지만 뒷차장과 비교할 수는 없다. 앞차장과 버스기사를 상전 모시듯 하지 않으면 일을 배울 수가 없었다. 청소는 기본이고, 심지어는 고참 차장과 운전기사의 런닝 빤스 다 빨아주고, 땀 닦아주고, 마실 물 떠다주고...앞차장 대신 매도 맞고 그랬다.

이렇게까지 생고생하며 일을 배우느니 차라리 운전학원 가서 배우면 될 게 아니냐고 아는 체 하지 말라. 그게 쉽지가 않다. 그 당시 운전학원 수강료가 1000원. 앞차장의 두달 월급과 맞먹는 큰돈을 내며 기약 없는 운전면허를 마냥 도전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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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버스에서 벌어지는 희비도 적지 않다. 시골버스는 사람만 타지 않았다. 오일장날에는 닭도 태우고, 검둥개도 태우고, 도새기(돼지)도 태웠다. 운전기사는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이 버스밖에 달리 없다는 것을 잘 아는지라 마지못해 사람들 틈에 같이 태워줬다. 그렇다고 좌석 하나 차지하여 척 다리 꼬고 앉게 한 것은 아니고.

문제는 요금이다.

"예팬 삼춘, 도새기 운임은 내야 되쿠다!" (여자삼촌, 돼지운임은 내야됩니다)
"못내쿠다. 크르렁" (못 냅니다)
"닭도 똥강생이도 아니고 덩치 큰 도새기를 그냥 태우면 어떵허쿠광?" (어떻합니까)
"사름도 아닌디 무사 돈낼 말이우꽝!" (사람도 아닌데 왜 돈 낸단 말입니까)

제주여인의 무대뽀 저항정신 앞에는 운전기사도 결국 굴복하고 만다. 대신 앞차장에게 어떻게 해보라고 도끼눈을 날려보지만 어디 한 두 번 겪는 일인가. 저물녘 장을 마친 사람들은 다시 버스에 오르면서 운전기사에게 공짜로 도새기를 태워 준 답례를 잊지 않았다. 막걸리나 고등어, 보리빵, 타올, 싸구려 잠바를 운전대 옆에 슬그머니 갖다 놓는다.

"삼춘, 영허지 않아도 되는디 마씀?" (삼촌,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고마완 드렴시난 좀좀허영 받읍써" (고마워서 드리는 거니 잔말말고 받으세요)
"이런거 말고 곱드글락 헌 아가씨는 어십데강?~" (곱디고운 아가씨는 없었습니까)
"안 폴안십데다!" (팔지 않고 있었어요)

   
 
 

앞서 가던 버스가 다리를 지나가고, 나는 냇가에 자동차를 세웠다. 제주에는 강이 없다. 대부분이 '내창'이다. 내창은 '건천'의 제주말이다. 물이 흐르지 않는 마른 하천을 말한다. 흐르다 고인 물들은 한라산에서 줄달음쳐 내려왔다가 계곡을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들이다. 하천이 범람할 정도로 물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을 제주에서는 '내 터진다'라고 부른다.

'내창' 옆에 차를 세운 것은 버스 안에서 사람처럼 대접받던 도새기가 말썽을 부리던 일이 생각나서다. 중학생이었을 때다. 다시 사람을 태우고 문이 닫히기도 전에 출발하는 순간 덜컹대는 비포장길이 영 못마땅했던지, 아니면 버스 안이 답답하여 갈증을 느꼈던지 도새기가 날센돌이 마냥 냇가로 도망쳐버린 것이다.

도새기를 잡으러 주인 아주머니가 먼저 뛰쳐나가고, 그 뒤를 이어 운전기사, 앞차장, 뒷차장, 함께 탔던 동네 아저씨도 추격전에 합류했다. 도새기는 지 세상 만난 듯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끔 엉덩이를 내밀어 '나 잡아봐라'며 사람들에게 놀리지를 않나, 난리가 아니었다. 차에 남아있는 승객들은 언제면 잡히려나 가슴을 조이고, 굴렁쇠는 재밌다고 "도새기 넘, 힘내라~"며 열심히 응원하고...그 순간은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버스가 지연된다고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합동추격전은 40여분 동안 펼쳐졌다. 종전을 알리는 토끼몰이식 유격전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제일 용맹을 떨쳤던 동네아저씨가 도새기에 몸을 날려 기어이 뒷다리를 붙잡고 넘어졌다. 잡았다! 모두가 함성을 내질렀다.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불멸의 전사들처럼.

요즘 같았으면 어땠을까. 다른 것 다 빼고 조류인플루엔자(AI)로 온 국민이 걱정하는 이 마당에 어느 동네 아주머니가 침 질질 흘리는 도새기를 안고 버스에 오른다면. 아마도 도새기가 냇가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승객들이 먼저 차에서 뛰어 내려 들로 산으로 줄달음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버스기사도 슬그머니 핸들을 놓고 승객 뒤따라 도망갈거고...하하하.

시골버스의 추억은 즐거운 기억만으로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콩나물 시루 같던 아수라장이었다는 생각이 떠오른 순간,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숨이 컥컥 막힌다. 여름철에는 더욱 그랬다. 쏟아지는 땀과 거친 호흡, 살려달라는 비명소리, 발작과 체념, 압사 직전의 그 전쟁 같은 시간들. 본의 아니게 여학생과 남학생이 한몸이 되어 부둥켜안아도 성범죄가 되지 않았던 시절. 버스 밖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팔뚝 센 차장 형님의 이를 악문 버티기 덕분이었을 것이다.

겨울철에는 여기에다 일거리 하나가 더 생겼다. 눈길에 자주 미끄러지는 바람에 모두 버스에서 내려 바퀴를 끌어올리느라 어지간히 낑낑대기도 했다. 열심히 밀고 있는데도 운전기사 아저씨는 '똑바로 하라'며 으름장을 놓고...개노므시키~

이마에 자동으로 손이 올라갔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거울 없이도 매만져 진다. 악동의 기질을 발휘하여 애월중학교에서부터 내 고향 어음리까지 10리를 버스 뒤에 매달려 갔던 일이 있다. 불과 우리 집 앞 정류소까지 500미터를 남겨놓고 세우는 줄 알았던 버스가 다시 속력을 내는 바람에 크게 사고가 났다. 차 꽁무니에서 뛰어 내리던 굴렁쇠가 순식간에 세 번을 구르고 말았다. 얼굴은 피범벅이 됐다. 사고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누이가 달려왔다. 친구집에 누워 있던 아들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어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지었다. 얼마나 놀랬을까. 품안의 자식을 세상에 내 놓은 심정은 어땠을까.

내 아들은 가끔 묻는다. 이마에 남아있는 흉터가 왜 생겼냐고.
"어, 날아가던 새가 쪼았어."

하루에 몇 차례씩 산골마을을 운행하는 시골버스. 쓸쓸하지만은 않다. 나의 차에는 담배냄새가 배어 있지만 시골버스에는 고향냄새가 묻어 있다. 언젠가 시골버스에 탔을 때 어르신들의 주고받는 대화에서 구수한 된장국의 맛을 느꼈다. 서러운 황혼길이지만 그들의 주름살에 그려진 아름답고 행복했던 인생은 감추지 못했다.

다시 고향 갈 때는 시골버스를 타고 다녀와야겠다. 예전처럼 비포장길이 아니어서 덜컹거리지는 않겠지만, 내 가슴은 30년 전 중학생을 만나 아마 쿵쾅거리겠지.

# 여기 올린 사진들은 네이버의 네오무크님, 무심님, 돌돌님, IWISH4U님과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분의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일일이 링크를 걸지 않은 점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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