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천~3천년전 유적, 단단한 화산재층 아래서 유물·유구 출토
조선일보 ‘특별’보도에 관계자들 당황…보고서 이미 지난해 발간

약 5000년~3000년 전 유적으로 발굴 조사된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유적에 대한 관심이 뒤늦게 집중되고 있다.

3일자 조선일보가 ‘한국판 폼페이 유적’‘국내 고고학 사상 첫 화산폭발 발굴유적’이라고 소개하며 ‘때늦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하모리 유적’은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가 소규모(약600평)로 구제발굴(표본발굴)한 유적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최근 발간한 보고서’라는 보도와 달리 이미 지난해 12월 제주문화예술재단과 서귀포시청이 보고서를 발간, 문화재청 등 관련기관에 보고되고 언론에 소개된 유적이다.

하모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도 지난 2004년 8월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2005년 10월~2006년 2월까지 구제발굴 조사가 이루어진바 있다.

조사결과 신석기시대 후기의 유물산포지와 집석유구 5기, 수혈유구 1기 등과 조사지역 내 구역을 달리해 청동기시대 후기의 수혈유구 7기, 집석유구 7기가 확인됐다.

3일 문화예술재단 고재원 팀장은 “하모리 유적 발굴조사결과 신석기시대 후기의 유물산포지와 수혈유구, 청동기시대 후기의 수혈유구, 집석유구 등이 확인돼 그동안 구체화하지 못했던 선사인들의 생활상 일부분을 엿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고 팀장은 또 “인골(人骨)이 전혀 나오지 않은 하모리 유적과 폼페이 유적은 분명히 성격이 다르다”며 “폼페이의 경우 사람이 살던 상황에서 화산폭발로 유적이 묻혔던 곳이고 하모리 유적은 이미 사람들이 머물지 않은 상태에서 화산폭발로 묻힌 곳”이라고 설명했다.

발굴당시 책임조사원을 맡았던 김경주 전 문화예술재단연구사도 “하모리 유적은 시굴조사와 구제발굴 현장설명회를 통해 지난 해 언론에서도 이미 다뤘던 내용인데 뒤늦게 부각되는 것이 좀 의아스럽다”면서 “그러나 지난번 조사로 신석기시대 후기 선사인들의 생업활동과 생활의 일면을 이해하는데 좋은 유적이다”고 하모리 유적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 전 연구사는 또 “발굴당시 표토층과 흑색사질점토층 아래로 매우 단단한 화산재층(응회암층)이 1m 두께로 확인돼 화산재층 아래로는 유물이 없을 것으로 당초 판단했으나 한군데를 뚫어보았더니 신석기 후기 토기편이 출토됐다”면서 “또 최하부층에서 다량이 식물화석도 출토돼 당시 식생상황과 선사인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선사인들의 해안가에서 해산물 채취와 어로 등의 생업활동과 그와 연계된 생활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라며 “응회암층 내에 퇴적된 참나무과의 낙엽활엽수와 열매, 고사리류, 맥문아재비 등 식물화석은 당시 유적 주변에 참나무과의 자연 숲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또 청동기시대 후기층에서 나온 유구와 유물은 송국리형 마을유적(삼양동 등)과 관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이청규 교수(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등 고고학계 관계자들은 “하모리 유적을 화산폭발에 의해 묻힌 유적이라는 공통점만으로 폼페이 유적에 비유하는 것은 지나치게 선정적이다”고 지적하고 “다만 제주도 송악산을 중심으로 자리한 하모리, 상모리, 가파도와 마라도, 사계리, 화순리 등 인근에는 많은 유적들이 분포해 유적의 중요성은 크다. 장기적으로 좀 더 광범위한 발굴조사가 이뤄진다면 인류의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 언급했다.

한편, 이날 하모리 유적에 대한 조선일보의 ‘특별’한 보도로 제주문화예술재단과 관할지역 행정시인 서귀포시청 관계자들은 언론사와 상급기관들의 잇따른 문의가 쏟아지자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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