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이 발간한 '軍史' 아예 복사…4.3보고서는 애당초 검토대상서 '제외'

제주4.3 당시 양민 학살에 대한 군의 작전을 의도적으로 왜곡해 도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국방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가 가깝게는 2년, 멀게는 18년전에 이미 나왔던 자료를 거의 완벽하게 베낀 것으로 드러나 다시 한번 도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특히 군사편찬연구소는 지난 6월에 발간한 '6.25전쟁사'가 새로운 연구결과를 토대로 한국전쟁을 집대성했다고 밝혔으나 이중 최소한 '제주4.3관련' 부분만큼은 이미 2년 전에 발표됐던 내용을 거의 완벽하게 짜깁기 한 것으로 드러나 역사적 진실에 대한 왜곡과 함께 군사연구기관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마저 내 팽개쳤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이에 따라 '6.25전쟁사'는 지난해 10월 정부의 의견으로 공식적으로 확정·발간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를 의도적으로 배척한 것으로 나타나 4.3분야에 대한 집필자 조사와 함께 군사편찬연구소가 제주4.3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 했는지에 대해 진상조사와 그에 따른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88년, 2002년 정석균 연구원이 쓴 '군사' 연구논문 18년 지난후 고스란히 복사

'제주의 소리'가 자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Ⅰ-전쟁의 배경과 원인' 중 제주4.3사건 부분에서 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이뤄지는 '군사 작전' 부분은 지난 1988년 8월과 2002년 12월 자신들이 발간한 간행물 '軍史'에 이미 실려있는 부분을 거의 완벽하다고 할 정도로 베낀 것으로 드러났다.

'軍史' 16호(1988년 8월 발행)와 47호(2002년 12월)에서 정석균 전 국방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제주도 폭동과 토벌작전' '濟州4.3事件時 軍·警의 討伐作戰'이란 연구논문을 통해 4.3당시 군·경의 토벌작전을 이끈 11연대와 9연대, 2연대,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그리고 해병대사령부 작전을 싣고 있다.

그런데 군사편찬연구소가 지난 6월23일 발간한 '6.25전쟁사' 중 제주4.3사건 편 28쪽 분량에서 양민학살의 핵심을 다루는 군·경의 토벌작전이 실린 17쪽이 놀랍게도 군사 16호와 47호에 실린 내용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해 사실상 그대로 베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6.25전쟁사' 중 '제주4.3사건' 분야를 집필한 필자가 '군사'에 연구논문을 실은 정석균 전 국방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이미 자신이 18년전과 2년전에 쓴 논문을 그대로 반영했거나, 아니면 제3의 필자가 정 연구원의 논문을 그대로 베낀 것인 셈이다.

# 사례1 : 11연대의 토벌작전

4.3발발 초기 진압작전을 부여 받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보직 해임되고 박진경 9연대장으로 임명하게 된 배경, 또 11연대 본부와 1개 대대, 5연대 제2대대를 제주도로 이동시켜 9연대와 함께 11연대에 배속시킨 후 박진경 중령으로 하여금 이 연대를 지휘하게 한 상황을 쓰면서 과거의 자료를 그대로 인용했다.

▲ 왼쪽부터 '6.25전쟁사', '군사' 47호.
'경비대총사령부는 진압작전을 좀 더 강력하게 추진할 목적으로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을 보직해임하고 박진경 중령을 임명하였다. 박진경 중령은 일본군 학병출신으로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도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일본군이 한라산에 구축한 동굴진지의 구조와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경비대 총사령부는 5월 1일 수원에서 창설된 제11연대 본부와 1개 대대를 5월15일 제주도로 이동시켰다. 경비대총사령부는 제9연대(실병력 1개 대대)와 제5연대 제2대대를 제11연대에 배속함으로써 제11연대를 3개 대대 규모로 대폭 증강하고 박진경 중령으로 하여금 이 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6.25전쟁사 440쪽/ 군사 16호 200쪽/  군사 47호 9쪽)

'박진경 대령의 후임으로 제11연대장에 임명된 최경록 중령은 전임연대장의 살해범 체포에 전력을 기울여 7월 초순 문상길 일당을 체포하였다….중략…우선 11연대는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하여 폐허화된 지역의 주민과 선무공작으로 하산한 피난민을 수용하였다….중략…이처럼 제11연대가 계속해서 적극적인 토벌작전을 실시하게 되자, 인민유격대는 투쟁방향을 장기항전으로 전환하여 조직을 재정비 하고 식량의 자급자족 대책을 강구하면서 유격활동을 일체 중지하기에 이르렀다'(6.25전쟁사 441쪽/ 군사 47호 11쪽)

# 사례2 : 9연대의 재편성과 토벌작전

'경비사령부는 제11연대가 복귀함에 따라 제5연대의 1개 개대, 제6연대의 1개 대대로 제9연대를 재편성하고 연대장에 제11연대 부연대장이던 송요찬 중령을 임명하였다. 재편성된 9연대는 8월 한달동안 부대정비와 훈련을 실시하고 9월초부터 제11연대의 작전개념을 그대로 적용하여 토벌작전을 개시하였다. (전쟁사 442쪽/ 군사47호 15쪽·16쪽)

'제주도경비사령부의 작년개념은 대대별로 작전책임지역을 할당하여 지역경비와 토벌작전을 병행하는 것이었다…..중략…그러나 인민유격대는 제14연대 반란사건에 크게 고무하여 더욱 기세를 올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중략…이 작전기간 중 제9연대는 일부병력을 제14연대 반란군으로 가장해 조천지구에 상륙시켜 이에 동조하는 무장대를 소탕하려는 작전을 계획하기도 했다."(전쟁사 443쪽/ 군사 47호 18쪽)

# 사례3 : 제2연대의 토벌작전

이어지는 제2연대의 토벌작전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작전은 아예 1988년 군사와 2002년 군사를 송두리째 옮겨와 실었다.

'제2연대는 연대본부를 제주비행장에 위치시키고 제1대대를 남쪽 서귀포에, 제3대대를 북쪽 오동리에, 제2대대를 연대예비로 제주읍에 각각 배치하여 필요시 신속이 증원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중략… 정부는 이와 같은 정황을 감안하여 제주도에 발령했던 계엄령을 1948년 12월31일부로 해제하였다.'(전쟁사 445쪽/ 군사 47호 23쪽)

'2연대장은 제2대대를 기습한 인민유격대의 규모를 1개 대대로 판단하고 이들을 섬

▲ 위부터 차례대로 '6.25전쟁사', '군사' 16호, '군사' 47호.
멸하기 위해 1월 4일부터 해군함정과 항공대의 경비행기를 지원 받아 합동작전을 전개하였다. …중략…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작전을 지휘하면서 주민들이 한라산일대의 동굴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토벌작전보다는 선무공작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중략… 토벌부대의 선무공작으로 이들 중 상당수가 산에서 내려와 정착하였지만 여전히 많은 주민들이 산속에 남아 있었다. 제2연대는 이들 주민들을 인민유격대와 분리시키기 위해 갱생원(피난민 집단수용소)을 설치하고 적극적인 주민 선무활동을 전개한 결과 산에서 내려온 주민이 1,500명에 달하였다. 연대는 이들을 갱생원에 수용하여 구호물자를 배급하는 한편 포로가 된 인민유격대를 처형하지 않고 사상계몽을 통하여 선량한 국민으로 갱생시켰으며, 양민으로 인정된 자는 전원 귀향 조치하였다'(전쟁사 446~447쪽/ 군사 16호 208~209쪽/ 군사 47호 25~26쪽)

하산한 주민들을 적법절차도 거치지 않은 군사재판을 통해 수백명을 정뜨르 비행장 등에 끌고가 총살시켰으며, 나머지는 바다에 수장 시키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시킨 후 6.25전쟁 직후 집단 학살했다는 증언과 연구자료, 그리고 4.3보고서가 이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사는 "전원 귀향 조치하였다"는 18년전의 왜곡된자료만을 그대로 실었다.

이 부분에 대한 출처는 1971년 육군본부에서 발간된 '공비연혁'이나 정석균 연구원은 1988년 군사 16호에서 이를 인용하면서 산에서 내려온 15,000명의 주민수를 1,500명으로 잘못 옮겼는데, 이는 군사 47호, 그리고 이번 '6.25전쟁사'에서도 계속 1,500명으로 기재하는 오류를 범했다.

즉 그 동안 이에 대한 재검토도 전혀 없이 18년전에 쓴 글을 그냥 복사해 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 사례4 : 2년대 의귀리 토벌사건 

'한편 제2연대는 잔여 인민유격대에 대해서는 주민들의 협조로 1949년 1월31일 남제주군 남원면 의귀리에서 30여명을 사살하는 등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해군, 항공대의 자원을 방아 2월말까지 소탕작전을 계속하였다.'(전쟁사 448쪽/ 군사 16호 209쪽/ 군사 47호 26쪽)

'6.25전쟁사'는 이에 대해 '공비연혁'을 인용했다고 했으나 공비연혁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으며, 이는 '대비정규전사'에 실려있는 것이다. 또한 날자도 1월31일이 아니라 1월13일이다. 처음부터 아무런 연구 없이 20년 가까이 지난 잘못된 자료를 인용한 결과인 셈이다.

6.25 전쟁사는 4.3의 진실이 아직 밝혀지기 전 '폭동'으로 규정하고 군의 '토벌작전'에만 초점을 맞춘 편향되고 왜곡된 자료를 계속 베껴 쓴 탓에 주민 80명을 집단학살한 의귀리 사건을 오히려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인민유격대 30여명을 사살한 전과로 날조했다.

# 사례5 :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작전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먼저 선무공작을 전개하여 인민유격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 위부터 차례대로 '6.25전쟁사', '군사' 16호, '군사' 47호.
후에 토벌작전을 실시한다는 작전개념에 의거해 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제1단계 작전인 선무심리전은 제2연대가 펼친 내용을 약간 보완한 것이었는데, 도내의 지도급 청년들로 선무공작대를 편성해 산으로 올려 보내 하산하지 않고 있는 주민들을 설득하여 하산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중략… 유재흥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은 효율적인 작전임무 수행을 위한 민·관·군의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갖춘다는 계획 하에 민보단 1개 소대(25명)와 경찰 1개 분대, 군 1개 분대로 구성된 민·관·군 혼성부대를 편성하였다. …중략… 그 중에서도 2연대 제1대대의 정수성 상사가 지휘하는 혼성부대는 남로당 제주도군사부조직책  김민성을 비롯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핵심간부들을 사살하고 각종 무기들을 노획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전쟁사 449~450쪽/ 군사 16호 210~211쪽/ 군사 47호 33~34쪽)

결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전쟁사'는 자신들이 서문에서 밝힌 새로운 연구결과는 '완벽히' 반영하지 않고 18년전 자료를 또다시 인용해 제주도민은 물론 군사연구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스스로 떨어뜨렸다.

'6.25전쟁사' 중 제주4.3과 관련한 부분을 집필한 필자가 이처럼 가깝게는 2년, 멀게는 18년 전의 자료를 거의 '복사'하다시피 함에 따라 지난해 10월 확정된 보고서의 새로운 내용은 이번 6.25 편찬사에서 단 한 줄도 실릴 수 없었으며, 아예 인용조차 되지 않아 학자로서의 양심마저 의심 받고 있다.

문제는 군사편찬연구소가 이 같은 사실을 정말 몰랐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모를 수 없는 문제이다. 군사편찬연구소는 4.3중앙위원회에서 '보고서' 작성에 들어가자 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국가의 문서에 의해 밝혀지는 사실이 두려워 군·경출신의 전문위원을 통해 이를 수 차례 저지해 왔기 때문이다.

군에 의한 '양민학살' 은폐...양민을 '무장폭도'로 몰아 작전중 학살 정당성 확보

특히 조영길 국방장관이 당연직으로 참여하고 있는 4.3위원회에서 4.3진상보고서를 확정·통과시켰으며, '6.25전쟁사'를 펴낸 군사편찬연구소장 역시 당연직으로 4.3진상보고서 작성기획단으로 참여한 바 있어 4.3보고서에 새로운 성과물들이 나왔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전혀 부인할 수 없는 처지인 상황이다.

또 군사편찬연구소는 '군사' 간행물 말미에 '本誌에 실린 論文內容은 當硏究所의 公式見解가 아님'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6.25전쟁사'에는 자신들의 견해로 받아들였다.

군사편찬연구소가 이처럼 18년이나 지난 왜곡되고 오류 투성이인 자료를 복사하면서도 정작 정부가 인정한 4.3진상조사보고서를 외면한 것은 군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학살을 결코 인정할 수 없고, 또 양민학살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양민'이 아닌 '무장폭동'에 참여한 '인민유격대'라는 점을 집중 부각시켜 양민학살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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