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시단 최고원로 이기형 시인을 만나...평생 '통일'을 노래해
“4·3영령, 님들은 영웅입니다”…“통일 그날까지 나는 죽지도 입을 다물지도 않을 것”

▲ 한국시단의 최고 원로인 이기형(91) 시인이 4.3 59주년 추모제에 참석했다. 이 시인은 4.3정신 계승이 통일로 한발짝 더 다가서는 길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뭇 사람들이여 / 제주 한라 성산을 함부로 쳐다보지 마시오 / 목욕재계 옷깃을 여미고 정신을 가다듬어 / 머리를 숙였다가 고개를 쳐다보시오 / 거기, / 제주 4.3영웅들의 얼굴이 보일 것입니다.
뭇 친구들이여 / 제주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한 개라도 무심히 짓밟지 마십시오 / 영웅들의 발자욱이 찍혀져 있느니 / 긴 동굴을 어영부영 스치지 마십시오 / 영웅들의 피목청이 들리느니 (제주4·3 59주년 기념시 ‘세계의 한복판 제주도여!’ 중에서)

노시인의 나이 91세다. 불꽃같은 시혼으로 오직 통일을 염원해온 한국시단의 최고 원로인 이기형 시인이 ‘4·3’ 59주년을 맞아 제주 땅을 찾아 왔다.

2일 4·3전야제에서 노구를 이끌고 직접 시낭송을 하더니 3일 오전엔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서 열린 희생자 위령제에까지 걸음을 아끼지 않았다.

4월에도 날이 무디어 지지 않은 칼바람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등산복에 등산화에 옷깃을 세워 완전무장(?)하고도 추위에 돌돌 거리는 기자의 나약함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이 시인은 자신의 모든 시에서 역사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통일기원을 화두로 삼는다. 분단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통곡의 목소리를 절절하게 쏟아낸다.

두류산 깊은 골 / 저 물이 핏물인 줄은 / 미처 몰랐습니다 / 상수리 잎의 흔들림이 / 못다 한 넋의 한풀이 춤인 줄은 / 더욱 몰랐습니다 / 뒷산 두견새 울음은 / 무슨 사연일까요 / 그날 고랑포를 건너 / 가신 임은 / 백발에도 돌아오질 않아 / 이별보다 슬픈 분단 / 그날 이별 아리랑은 열두 굽이였건만 / 오늘 분단 아리랑은 천 굽이런가 / 발굴러 웁니다 / 청사초롱에 불 밝혀라 / 임 맞으러 가자 / 흐응~흥~흥 (‘분단 아리랑’ 전문)

이 시인은 ‘4·3 희생자’들을 ‘영웅’이라 칭했다. 4·3영웅들에게 죄송스럽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항쟁에 함께 하지 못한 부끄러움이다.

4·3을 맞아 제주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다만 그동안 4·3추모시를 이번까지 모두 여섯편을 썼단다. 그러나 그것으론 ‘영웅’들에 대한 죄스러움을 씻을 수가 없단다.

▲ 제주4.3 59년 전야제 행사에서 '세계의 한복판 제주도여!' 시를 직접 낭독하고 있는 이기형 원로시인.

이 시인은 “제주에 와보니 4·3이 더욱 실감이 난다. 4·3당시 난 제주 밖에서 4·3을 바라봤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발발 동동 구르는 것 외에는….”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래서 ‘영웅’들에게 죄송스럽다. 함께 하지 못함이 죄스럽다. 당시 동포 모두가 총궐기해 맞섰다면 미군정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야!”라고 확신했다.

이 시인은 “4·3문제는 한국사회 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의 문제다”라며 “미국이 무력을 앞세워 힘의 논리로 재패하는 곳이면 어디나 4·3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지금 이라크인들이 반미를 부르짖으며 항쟁하는 것도 4·3정신과 같은 맥락이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 시인은 4·3정신을 현대에 계승해 언론도 문학인도 모두 살아있어야 ‘통일’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통일이 되기 전까진 절대 죽지도 늙지도 않고 오직 ‘통일의 염원’을 담은 시, ‘역사’를 담은 시만 쓰겠다고 했다.

이 시인은 평생을 ‘반미’와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화두를 안고 살아왔던 문학인사다. 이 시인은 “분단 60년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팔레스타인보다도, 또 그 어떤 나라보다도 슬픈 일이다. 미국중심의 제국주의를 타파해야 통일은 온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백발청춘이란 표현이 딱 제격이다. 백발이 성성한 91세라는 나아기 믿기지 않을 만큼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의 열변에 압도당한 기자가 ‘어떤 사람을 젊은이라 생각하십니까?’하고 우문을 던졌다.

   
 
 
노구의 이 시인은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정신이 젊어야 젊은이지. 정신이 살아 있지 않다면 그게 어디 젊은인가?”라고 못 박았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 젊은 시인들에게 ‘알량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를 쓰지 말라고 강권한다. 말놀이와 감성놀이는 우리 역사발전에 아무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 시인은 제주의 시인들에게 ‘4·3 서사시’를 쓰라고 권했다. 제주 땅에서 살고 제주 땅에서 호흡하는 작가가 4·3을 노래하는 것이 제대로 4·3의 역사를 담아 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시인은 그 예로 허영선 시인의 ‘무명천 할머니’와 같은 4·3시를 크게 호평했다.

이 시인은 지난 2월15일 시집 ‘해연이 날아온다’를 실천문학사를 통해 출간했다. 91세의 나이로 시집을 낸 것은 한국문학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4년 전 ‘봄은 왜 오지 않는가’를 펴낸 것을 포함해 모두 아홉 번째 시집이다.

이 시인은 말한다. “4·3정신이 살아있어야 통일이 온다. 통일이 되는 그날 까지 나는 입을 다물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 시인은 1917년 함경남도 함주 출생으로 함흥고보를 졸업하고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간 수학했다. 1947년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이후 33년간 일체의 공적인 사회 생활을 중단하고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80년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백낙청, 시인 이시영 등을 만나 분단 조국하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꿔 시작 활동을 결심했다.
1980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했으며, 1989년 시집 <지리산> 필화사건으로 발행인은 구속되고, 자신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대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 시인은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죽지 않겠다"며 "앞으로 여러분들이 노래와 글, 시와 소설 등 무슨 일을 하든지 통일 후에 어떻게  평가받을지를 대비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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