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연구소 29일 열여덟 번째 증언본풀이...희생자·후유장애 불인정 사례 토로

제주4.3연구소는 29일 열여덟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을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제주4.3연구소는 29일 열여덟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을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강산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여전히 제주4.3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 4.3희생자, 후유장애인이라는 최소한의 명예 회복·보상마저도 외면 받는 생존자들이 세상 앞에 섰다.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는 3월 29일 오후 2시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여덟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 ‘그늘 속의 4.3, 그 후 10년 - 나는 4.3희생자입니다’를 개최했다.

‘그늘 속의 4.3’은 2009년 증언본풀이 주제다. 당시에는 희생자,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가 소개됐다. 올해도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희생자, 후유장애인이 되지 못한 가족과 당사자를 초청, 4.3의 그늘이 여전히 걷히지 않았음을 알렸다.

1940년생 김낭규 씨는 신촌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김대진)가 산으로 도피했다는 이유로 4.3 때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희생당한 아픔을 품고 70년 세월을 살았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자녀들은 연좌제 피해를 봤고, 아버지 위패가 4.3평화공원에서 내려지는 수난을 겪었다. 대담은 허호준 한겨레신문 기자가 맡았다.

1942년생 강양자 씨는 4.3 당시 돌아오지 않은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밖을 나섰다가 돌무더기에 깔려 허리를 크게 다쳤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평생 허리가 휘어진 채로 살아야 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은 경찰에 의해 희생됐다. 부모는 4.3 전에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4.3 희생자로 인정됐지만 후유장애는 인정받지 못했다. 대담은 김은희 4.3연구소 연구실장이 맡았다.

1935년생 정순희 씨는 2남 4녀 중 막내다. 둘째 오빠가 4.3때 행방불명 됐다는 이유로 셋째 언니와 경찰서에 끌려가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 고초를 겪었다. 어머니는 13세 정 씨가 보는 앞에서 서북청년회에 의해 총살당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고생했지만,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후유장애인 심사에서 탈락했다. 대담은 오화선 4.3연구소 자료실장이 맡았다.

세 사람은 4.3 당시 겪었던 고통만큼이나 희생자·후유장애 거부로 인한 정신적 고통도 크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희생자·후유장애 선정에 있어 정부의 전향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김낭규 씨는 “아버지가 관덕정 마당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다가 경찰에 연행된 적이 있는데, 신촌리 주민들이 아버지 석방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할 만큼 훌륭한 분이었다. 근래에도 주변에서 ‘김대진 선생님 자녀냐, 아버지가 막 훌륭한 분’이라는 이야기를 우리 형제들이 들었다. 아버지 자녀라는 긍지를 가지고 살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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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증언자로 나선 4.3생존자 김낭규 씨(왼쪽). ⓒ제주의소리
가족을 잃어버린 순간을 기억하며 눈물 짓는 김낭규 씨. ⓒ제주의소리
가족을 떠나보낸 순간을 기억하며 눈물 짓는 김낭규 씨. ⓒ제주의소리

김낭규 씨는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나, 마을에 불을 질렀나. 경찰이 와서 불을 붙였지. 마을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신촌리 사람들 눈 뜨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좋은 일만 했다”며 “아버지 위패가 평화공원에서 내려진 후 3일간 울었다. 지금도 수면제 없으면 잠을 못 잔다. 희생자 추가 신청 때마다 아버지를 계속 신청하겠다.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될 때까지 계속 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강양자 씨는 “내가 후유장애를 왜 거짓으로 구차하게 신고하겠나. 정부에서 신고하라고 하니 신고했는데 인정하지 않으니 정말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담당 직원들이 ‘안 될 겁니다’라는 거절부터 나오니까 ‘국가가 나를 의심 하는구나’라는 생각부터 앞선다. 나는 분명 4.3으로 인해 장애를 얻었다. 규제가 너무 많다”면서 "호적 상 나이(1945년생)와 실제 나이(1942년생)가 다르고, 초등학교 학생기록부에 허리 부상 원인이 '결핵'으로 기록돼버렸고, 후유장애 신청 당시 부상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아서 아직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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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본풀이에 나선 4.3생존자 강양자 씨(왼쪽). ⓒ제주의소리
일어서서 허리 부상을 직접 설명하는 강양자 씨. ⓒ제주의소리
일어서서 허리 부상을 직접 설명하는 강양자 씨. ⓒ제주의소리

강양자 씨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까지 다 돌아가시게 하고, 나까지 이렇게 만든 4.3이 왜 일어났는지 난 아직도 납득이 안된다”며 “지금부터 살면 얼마나 살지...죽는 날까지 하루하루 아픈 것을 견디며 지내보자는 마음 뿐”이라고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정순희 씨는 “내가 13살 때였다. 경찰은 내 온몸을 묶고 거꾸로 세워 고춧가루 섞은 물을 코와 입에 부었다. 이제 죽는구나 싶은 만큼 숨이 막혔다. 바른 말 하라며 쇠꼬챙이를 치아 사이에 집어넣어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해 오랫동안 치아 두 개 없이 살았다”며 “막대기를 허벅지, 등에 찌르면 ‘찌르륵 찌르륵’ 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기고문인 것 같다. 어머니가 총살 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로는 지금도 수면제를 먹어도 한두 시간이면 잠이 깬다”고 트라우마를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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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본풀이에 참여한 4.3생존자 정순희 씨.(왼쪽) ⓒ제주의소리
고문 경험을 설명하면서 무릎을 만지는 정순희 씨. ⓒ제주의소리
고통스러운 고문 경험을 설명하면서 무릎을 만지는 정순희 씨. ⓒ제주의소리

정순희 씨는 “첫 4.3후유장애 신청에서 불인정됐다. 고문 받은 흔적이 별로 없다는 이유였다. 내 몸은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데 말이다”라며 “2018년 정부가 후유장애 신고를 다시 받는다고 해서 서귀포의료원에 갔다. 의사가 말하기를 눈에 보이는 상처, 손이 끊어지거나, 다리가 잘렸거나 한 상처가 없기 때문에 진단서를 끊어줄 수 없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고 토로했다.

이규배 4.3연구소 이사장은 “이번 증언자들은 긴 세월 동안 4.3희생자임에도 희생자의 이름에서 배제된 분들”이라며 “이들의 증언이 슬픔으로 그치는 자리여선 안 된다. 용기와 희망의 자리, 당당하게 희생자의 이름을 올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4.3생존자들과 4.3연구소, 참석자들이 함께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주의소리
4.3생존자들과 4.3연구소, 참석자들이 함께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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