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도를 파괴하는 ‘무지개 새’의 비상
지옥도를 파괴하는 ‘무지개 새’의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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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世通, 제주 읽기] (133) 메도루마 슌, 《무지개 새》, 곽형덕 옮김, 아시아, 2019.
메도루마 슌, 《무지개 새》, 곽형덕 옮김, 아시아, 2019. 출처=알라딘.
메도루마 슌, 《무지개 새》, 곽형덕 옮김, 아시아, 2019. 출처=알라딘.

1.

마침내 계간 《제주작가》에 2년 간 연재된 오키나와 작가 메도루마 슌의 장편소설 <무지개 새>(2006)가 일본문학 연구자 곽형덕 교수의 번역으로 최근 출간되었다. 《제주작가》에 처음으로 이 작품이 소개될 때에도 오키나와 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준 작품이기에 이번 완역된 단행본을 통해 독자들이 그 전모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한국 독서계의 또 다른 풍요로움이 아닐 수 없다. 

메도루마 슌의 장편소설 <무지개 새>를 읽기 전 제목에서 자연스레 연상되는 서사적 이미지와 그 정동(情動)은, 오키나와가 품고 있는 열도(列島)의 낭만적 신비와 환상의 아우라와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무지개 새>는 이것과 전혀 관련이 없는 잔혹하고 끔찍하며 섬뜩한, 게다가 환멸과 절망이 버물어진 파괴의 지옥도를 보여준다. 이 지옥도를 구성하는 것 중 가장 눈에 띄는 풍경은 오키나와의 중학교에서 일어나는 학교 폭력과, 오키나와의 일상 깊숙이 파고든 성매매 산업에 유착된 폭력, 그리고 오키나와 전쟁을 거치면서 겪은 숱한 전쟁 폭력 속에서 특히 미일안보체제 아래 미국의 군사기지로 전락한 오키나와의 일상을 파괴하고 위협하는 미군의 폭력 등이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지옥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확연히 부각되고 있는 세 가지 폭력은 서로 무관하지 않고 매우 긴밀히 서로 간섭하고 중층적으로 포개지며,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폭력의 시작과 끝을 구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폭력이 발생하였는지 말 그대로 그것이 터져 열린 부분도 알 수 없기 때문에 폭력을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방지 및 봉쇄해야 할 부분도 도무지 알 수 없다. 작중인물뿐만 아니라 독자들 모두 ‘폭력의 미망(迷妄)’에서 허우적거린다고 할까. 

이와 관련하여, 작중 인물 ‘마유’의 돌출 행동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 문제의식인바, 이것은 작가 메도루마 슌이 우리에게 타전하고 있는 소설적 전언에 접속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마유의 행동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매춘 현장에서 마유의 성을 산 상대방 남자를 상대로 아주 잔혹하고 엽기적 방식으로 흡사 성 고문과 다를 바 없는 성폭력을 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유의 삶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미군 병사의 순진무구한 어린 딸을 도로 휴게소에서 납치하여 죽인 것이다. 사실, 마유의 이 같은 돌출 행동은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마유는 17살 미성년자로서 매춘업을 하고 있는 ‘히가’의 폭력조직에 구속돼 있어 “몸과 마음 깊고 깊은 곳에서 아주 천천히 파괴가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약자의 전형으로, “돈을 낳는 생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 그리하여 오키나와의 성매매 산업에서 최말단 부분을 구성하는 수단, 시쳇말로 섹스머신에 불과할 뿐 마유가 직접 폭력의 주체로서 타자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 자체를 쉽사리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복되는 말이듯, <무지개 새>를 이해하는 일은 마유가 저지른 폭력의 안팎을 세밀히 추적하는 길을 찾아가는 셈이다. 

2.

우선, 학교 폭력의 양상을 살펴보자.

작품 속 학교 폭력의 현실은 마유가 어떻게 이러한 유사 폭력에 쉽게 노출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이 학교 폭력 구조로부터 좀처럼 해방되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를 이해하도록 한다. 중학교 시절 마유를 대상으로 한 또래들의 성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집단폭력은 중학교 시절에만 국한된 게 결코 아니었다. 학교 폭력이 얼마나 일상화되었는지, 그 시절 폭력을 가한 학생들 중 하나가 마유를 우연히 만나 언제 그러한 폭력 가해를 했냐는 듯 태연히 마유에게 접근을 하더니 과거의 가해자들과 함께 마유가 그토록 잊고 싶어하고 해방되기를 원했던 그 폭력 사건을 애오라지 들춰내는 것도 모자라 마유가 성폭력을 당하고 있는 치욕스러운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제 고등학생이 된 폭력 가해자들은 성폭력을 당하는 그의 사진을 지속적으로 사도록 하는 또 다른 유형의 폭력을 마유에게 가한다. 그러더니 마유는 히가의 매춘업에 가담을 하고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자신의 치욕스런 사진을 구입하고, 점점 더 큰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마유를 움쭉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구속하고 있는 폭력의 연쇄는 이렇게 중학교 시절의 학교 폭력과 직접 연계돼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폭력에 대한 피해자로서 마유의 상처를 치유해줄 뿐만 아니라 마유의 파괴된 일상을 복원하고 그로 하여금 다시 일상의 정상으로 복귀하도록 해주는 주변의 어떠한 도움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히가의 폭력에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학교가 지배를 당하면서 학교의 구성원인 선생님과 또래 학생 및 부모가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제공하지 못한 채 오히려 보복과 더 큰 폭력으로 피해자의 삶을 자칫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마유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방식은 폭력이 팽배해진 일상에서 좀 더 강한 폭력 구조에 자신의 존재형식을 접속시키는 게 아닐까. 마유를 에워싸고 있는 현실에서 폭력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마유는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또 다른 폭력의 가해자로 부각된다. 특히 미군 병사의 어린 딸을 마유가 죽인 것은 오키나와가 폭력의 지옥도라는 것을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알 수 있듯, 미군 병사 셋이 초등학교 여학생을 상대로 집단 성폭력을 자행한 사건에 대해 오키나와 주민들은 집회를 벌이는데, “아무리 집회를 하고 데모를 해도 소용없어. 공무원은 참 한가해서 좋겠다”는 작중 인물의 푸념에서 단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오키나와의 경찰행정 권력이 미군의 폭력행위에 대해 이렇다 할 책임을 추궁할 수 없고 합당한 처벌도 내릴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한밤중에 여자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안 된다니까. 어린 미군들은 철이 없어. 부모가 좀 더 조심을 했어야지…….”라는 반응을 보일 뿐이다. 이 반응은 미군기지가 주둔하고 있는 오키나와의 현실을 매섭게 증언해준다. 그러니까, 오키나와 초등학교 여학생이 미군들에 의해 집단 성폭력을 당한 것은 그 일차적 책임이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있다는, 곧 위험한 밤늦은 거리를 다니지 말 것을 오키나와 초등학교 여학생을 자식으로 둔 부모들이 잘 주지시키지 않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미군 병사들의 성폭력이 지닌 가해성을 적당한 선에서 축소 및 은폐하려고 한다. 게다가 위 말줄임표에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러한 정도 미군의 성폭력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응당 감내해야 한다는 억설마저 내포하고 있다. 

3.
그런데, 여기서 예의주시할 대목은 이러한 말을 무심결 내뱉은 이가 다름 아니라 가쓰야의 어머니로서 그녀뿐만 아니라 가쓰야의 아버지와 형들은 미군의 “군용지 대여료를 받아 기지의 은혜를 입고” 사는, 즉 미군기지 때문에 그 경제적 혜택을 받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에게 군용지를 대여해준 대가로 술집과 바를 비롯하여 도박장 등 유흥업소를 운영하면서 오키나와에서의 경제적 삶을 살고 있다. 가쓰야 부모의 이러한 삶은 가쓰야네 가족에게만 적용된 게 아니라 오키나와 전쟁 이후 그리고 일본으로 복귀 이후 오키나와 경제의 상당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 같은 오키나와 경제의 미군기지에의 실질적 예속 상태는, 작품 속 가쓰야의 어머니의 자연스런 반응에서 보이듯, 미군에 대한 그리고 미군기지를 집중 배치한 일본에 대한 오키나와의 왜곡된 정치경제적 정동(情動)이다. 

이와 관련하여, 메도루마 슌의 이러한 서사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을 염두에 둘 때, 마유가 저지른 미군 병사의 딸을 죽인 행위는 어떻게 보면 오키나와를 폭력의 연쇄와 닫힌 구조 안에 봉합해버림으로써 오키나와의 현재적 비극성과 전망의 부재를 보다 극적 서사로 드러낸 것이다. 메도루마 슌에게 마유의 이 폭력은 일종의 ‘문학적 보복’의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무지개 새>에서 보이는 ‘문학적 보복’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유와 가쓰야를 에워싼 오키나와의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조금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미래의 전망이 마유의 등에 새겨진 ‘무지개 새’의 환상적 비상으로 작품의 대미가 장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유와 가쓰야는 함께 전설의 무지개 새가 살고 있는 오키나와의 북쪽 얀바루 숲으로 가고 있다. 

여기서, 얀바루 숲에 살고 있는 ‘무지개 새’에는 전설이 있는데, 이 전설에서 귀 기울여야 할 것은 극한의 고통과 지옥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해주는 것도 ‘무지개 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덧씌운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신생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무지개 새’ 전설이 함의한 진실이 아닐까. 이것은 바꿔 말해 ‘무지개 새’가 신생의 삶을 살기 위한 통과제의적 주술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작품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그래 모두 죽어 없어지면 된다.”

는 문장이 별도로 독립된 한 행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한 문장은, 마치 작가 메도루마 슌이 오키나와의 샤먼 자격으로서 오키나와의 온갖 폭력 구조 속에서 고통과 상처를 앓아온, 작중에서는 마유와 가쓰야가 함의한 지옥의 현실을 파괴하고 죽이는 통과제의적 주술사(呪術辭)를 통해 이제 곧 도착할 얀바루 숲에서 신생의 기운을 회복하는 것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투사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오키나와에서 자행되고 있는 모든 폭력에 대한 근절과 평화의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오키나와의 생의 의지가 담겨 있다. 

▷고명철 교수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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