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35) 수전 손택, 이재원 역,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2002.

수전 손택, 이재원 역,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2002. 출처=알라딘.
수전 손택, 이재원 역,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2002. 출처=알라딘.

수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평론으로 이름난 미국의 평론가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이다. 게다가 그녀는 극작가이자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그리고 사회운동가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다.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평론으로, 해석이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그녀는 예술을 지적 해석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를 잘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며 스타일에 주목하라고 주문하면서, 이른바 ‘예술의 성애학(erotics)’을 주창했다.

《은유로서의 질병》의 역자 이재원은, 손택의 저서들의 공통점을 ‘투명성(Transparency)’에 대한 천착으로 꼽는다.(옮긴이 해설, 258쪽) 어떤 왜곡되거나 굴절된 시각이 아니라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 대상을 곧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되었든 질병이 되었든 대상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손택의 비평적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일 것이다. 손택 역시 비평가로서 탁월한 ‘해석자’의 한 사람일 텐데, 그녀의 비평적 에세이 작업들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해석을 그저 만들고 유포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과도한 해석을 벗겨내는 작업을 동시에 수행해낸다는 점이다.

비평가는 비평 대상을 우상화하거나 심지어는 신화화하는 작업만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다. 물론 비평가는 해석 작업을 통해서 대상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수행하지만, 동시에 부당하거나 왜곡된 의미를 포착하고 그것을 탈(脫)신화화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근래의 비평(내가 알기엔, 적어도 문학비평)이 비평의 한 쪽 날개를 잃어버린 듯한 상황에서, 손택의 작업들이 비평의 귀중한 전범으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은 질병의 문화적 의미와 ‘신화’적 편견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손택에 의하면, 질병에 대한 과학적 무지는 질병을 사회적 차원에서 부정적인 은유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게 만든다. 특히, 질병의 의미에 도덕적 심판이라는 함의를 부여하면서 환자의 인권을 가혹하게 유린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손택의 비평적 에세이는 문학 텍스트 또는 작가의 질병과 관련해서 풍부한 예시를 들고 있어서, 질병을 다룬 문학에 나타난 질병의 의미론으로 참조할 만하다. 예컨대, 낭만주의가 바라본 결핵의 이미지에서처럼, “질병은 어떤 사람을 ‘흥미롭게’ 만들어 주는 방식”(50쪽)으로써 작중인물의 개성에 관여한다는 점 역시 문학의 인물 형상화 문제를 고려할 때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많은 한국 문학 연구자들은 손택의 이 책을 참조하여 한국 소설의 질병을 분석해 왔다. 하지만 손택의 작업이 실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점과 비교한다면 우리 연구자들의 작업은 대체로 문학 연구의 울타리에 갇혀 있다는 점이 아쉽다. 심지어는 손택의 의도와 달리 질병의 은유를 비판하는 이론을 어쩌면 질병의 은유를 문화적으로 강화시키는 데 활용했다는 의심마저도 들기도 한다. 그 점에서 나 또한 문학 연구자이자 비평가로서 반성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한편, 손택은 질병을 거의 ‘생물의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예를 들어, 그녀는 질병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현대의 편향적 태도를 비판한다. 

“심리학이 좀 더 고상해진 관념론, 즉 좀 더 세속화되고, ‘정신’이 물질에 우선한다는 주장을 마치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는 방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85쪽) 

정신 우월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매우 타당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질병에 대한 단일 요인 분석이라는 생물의학 패러다임의 한계에 은연중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아직 그 병인이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질병을 생각할 때에 다양한 병인으로만 어떤 질병을 설명할 수 있다는 관념에 젖곤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느껴질 만한 은유로 사용될 가능성이 가장 많은 질병도, 이처럼 다양한 병인이 있다고 (즉 신비스럽다고) 여겨지는 질병이다.” (93쪽)

질병에 대한 왜곡된 신화가 발생한 원인에 대한 분석은 타당할지 몰라도, 질병에 한 가지 원인(신체적 원인)만이 작용한다는 사고 역시 ‘신학·형이상학적 사고’로 볼 수 있다.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르네 뒤보스의 《건강이라는 환상》을 인용하면서 병원체설, 넓게는 병의 특이 원인론을 비판했다.

“결핵균은 결핵의 ‘원인’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인간이 결핵균이나 그 밖의 미생물 병원체에 감염된다. 우리는 미생물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미생물이 없으면 소화도 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없다. 몸속에 병원체가 있는 것과 발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 원래 하나의 ‘원인’을 확정지으려는 사상이야말로 신학·형이상학적인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역, <병이라는 의미>,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민음사, 1997, 150쪽)

물론 손택이 비판하는 대상이 질병에 관한 왜곡된 문화적 이미지와 신화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이 암 환자였다는 자전적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를테면, 다음 대목에서 생물의학에 대한 과학에 대한 손택의 낙관과 기대를 엿볼 수 있다. 

“암을 일으키는 단 하나의 주요 병인이 발견되어 단 하나의 치료 방법으로 암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92쪽) 

물론, 아직까지도 손택의 기대는 실현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질병에 덧씌워진 과도하거나 왜곡된 사회문화적 의미나 은유를 걷어내는 것은 필요하지만, 육체나 세균의 문제만을 질병의 원인으로 삼는 태도 역시 비과학적인 사고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손택이 비판하는 질병의 은유론은 오랫동안 의미 있는 비평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질병은 언제나 새롭게 발견되며 (에이즈도 오랫동안 있어 왔겠지만 우리는 비교적 최근에 그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른 사회문화적인 의미와 은유들은 계속 뒤따라오기 때문이다. 손택의 말처럼, 은유는 모조리 없애버릴 수는 없다. 레이코프와 존슨의 인지철학적 분석에 따르면 정말로 은유는 사고의 뿌리를 이루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질병의 은유가 환자를 부당하게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한 투명한 폭로가 끝없이 이어져야 한다. 질병에 덧씌워진 나쁜 은유는 ‘비평적 치료’의 대상이다. 그렇다. 치료, 이것이 손택이 이 책을 쓴 정확한 이유이다.

“에이즈, 또는 사람들에게서 자책감이나 수치스러움을 끌어내는 특정 질병에 관한 한, 해당 질병 자체에서 이런 의미와 은유들을 떼어내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고, 우리에게 위안을 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은유의 사용을 절제한다고 해서 은유를 멀리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은유를 폭로하고, 비판하고, 물고 늘어져, 완전히 쓸모없게 만들어야 한다.” (239쪽)

▷ 노대원 제주대 교수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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