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37) 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 한울, 2015.

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 한울, 2015. 출처=알라딘.

이 책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분수령으로 박정희 정권이 성립하기까지 15년간의 기독교 역사를 담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보수 반공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핵심적인 집단은 한국 기독교회이며, 그 역사적 계보의 중심에는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냉전 체제에서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미국을 활용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핵심을 장악하고, 오늘날까지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월남 기독교인들은 세계 교회와 미국 교회의 지지와 연대로 강력한 반공 세력이자 정치적.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매개로 미국과 세계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미국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이승만과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들은 전쟁 구호물자를 거의 독점하면서 세력을 강화했다. 또한 군종제도를 만들어 교회뿐만 아니라 군에서도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다져나갔다. 군종제도는 1950년 9월에 정식으로 만들어졌다.

소련 군정 아래의 북한을 가장 먼저 탈출한 기독교 지도자는 한경직과 윤하영이었다. 월남 후 윤하영은 미 군정청 공보부 여론 조사과장으로 일을 했으므로, 기독교 지도자인 한경직이 베다니 전도교회(이후 영락교회)를 설립하자, 월남한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은 한경직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결집했다.

한국전쟁 직후 장로교는 고신파, 기독교장로회, 예수교장로회 등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총회의 주도권은 예수교장로회, 즉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인들이 장악했다. 이는 한국전쟁기 구호물자, 선교자금, 선교사 등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기독교 외원 단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CWS(기독교세계봉사회) 이었다. 1946년 미국에서 창설된 이 단체가 한국사회에 관심을 둔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어려움에 처한 북한에서 월남한 기독교인들 때문이었다.
 
미국 교회가 주도하던 WCC(세계교회협의회)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의 전쟁 참전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미국인을 비롯한 세계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이 장기화되자 WCC는 휴전회담을 촉구했다. 이승만은 당황했고, WCC를 용공세력으로 공격했다. 그 공격은 KNCC(한국기독교협의회)를 주도하던 세력에 의해 중심부에서 밀려나 있던 고신파에게 맡겼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동요하던 KNCC는 이승만을 선택했다. KNCC를 주도하던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휴전회담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함으로써 반공의 대표적인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19세기 말부터 근대 사회를 지향했던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반공이라는 선명성으로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회의 변동에 누구보다 빨리 적응했으며, 한국의 변화를 가속화 하고 주도했다. 또한 반공이라는 선명성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집단이 되었다. 반면 WCC를 공격해 미국정부를 압박하려 했던 이승만은 미국과의 관계가 점차 소원해지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어갔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들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전쟁고아 사업을 기반으로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세력이 되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월드비전, 기독교아동복리회(CCF), 홀트 입양 프로그램 등의 전쟁고아 사업을 통해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국가를 가족적인 관계로 만듦으로써 반공 정책에 기여했다. 한국에서 그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집단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 이후 한경직과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경계했으나, 그들은 도리어 미국 복음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통해 남한에서 정치적.사회적 기반을 확고히 했다. 한경직은 이를 바탕으로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5.16이 일어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친선 사절단이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이 친선 사절단에는 한경직, 동아일보사 사장, 최두선,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등이 있었다. 한경직은 미국에서 가장 큰 기독교 세력이면서 미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WCC, WEF의 인사들과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고아로 구성된 선명회합창단의 미국 순회공연을 여러 차례 기획했고, 한미관계가 가족적 혈맹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한경직과 박정희는 더욱 밀착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1973년 박정희는 한경직에게 신년 인사 편지를 보냈다. 한경직은 그레이엄을 초청해 여의도에서 대규모의 부흥집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는 반공을 통해 한미관계의 강고함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을 설득하고 지지를 얻으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정부 차원에서 이 부흥집회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1974년 박정희는 남강 이승훈 동상 재건위원회 회장이던 한경직에게 동상 건립을 위한 금일봉을 전달함으로써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 《한국전쟁과 기독교》, 214쪽

한국전쟁을 통해 성장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서북 출신 군 장성들과 함께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를 지지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정권을 지지한 또 하나의 배경은 군사정권의 주역에 많은 서북청년회 출신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에 결성되어 1848년 12월 대한청년단의 결성으로 해체된 대표적인 우익 청년 단체였다. 한경직이 세운 영락교회의 학생회와 청년회는 서북청년회의 중심 세력이었다. 4.3 전후 제주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서북청년회는 1948년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이승만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여순사건 이후 점차 배제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 출신들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월남한 서북 기독교인과 서북청년회, 그리고 박정희가 사상적으로 결합하게 된 배경에는 ‘승공주의’가 있었다. 1950년대 중후반 이후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반공을 재정의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외의 변화와 국내 현실에 따른 것이었다. 소련은 제3세계로의 팽창, 북한은 전후 재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반면에 국내 현실은 암담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승만 정권이 주장하는 맹목적이고 전투적인 반공주의를 비판했다. 대신에 반공을 민주주의 질서 확립과 경제적 안정을 통해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재정의 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제기했던 승공 담론은 5.16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재구성되었다. 승공 담론은 군사정권에 의해 국시로 승격되었다. 군사정권과 승공을 제기한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을 비롯한 한국 기독교들과의 결합,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대다수 한국인의 승공론에 대한 지지는 한국 사회를 경제적으로 성장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박정희 시대에 정치와 경제 발전을 주도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제국주의가 밀려오는 19세기 말 조선에서 근대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와 조우했다. 기독교인이 된 조선인들은 근대식 교육을 받고 근대화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서북 지역은 그 대표적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시련은 분단과 함께 찾아왔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월남 이후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미국 기독교계의 지원 아래 독재 정권과 반공의 이름 아래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이 책은 그 과정을 담담하게 추적하고 있다. 다만 제주에서의 학살 전위대였던 서북청년회와 기독교계의 연관성은 무척이나 가슴 아프다. 고향에서 쫓겨난 그들의 아픔을 조금은 이해하더라도 그래도 제주에게 그들은 너무나 잔혹했다.   
 

▷ 양정심

현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전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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