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127. 아기 설 때는 바람벽까지 떼어먹고 싶어 한다

  * 애기 설 때 : 아기 뱄을 때, 임신했을 때
  * 벡보름 : 바람벽, 방의 벽
  * 먹구쟁 혼다 : 먹고 싶어 한다
 
여자가 임신으로 뱃속에 아이가 들어서면 갖가지 증상이 나타난다. ‘그 집 메누리 허리가 커져서라(그 집 며느리 허리가 커졌더라)’고 하는 건 외양으로 눈에 띄게 나타난 변화를 얘기한 것인데, 그에 그치지 않는다.
 
임산부가 겪어야 하는 특별한 고통이 따로 있다. 입덧이 나타나는 것이다. 심하면 중환자가 따로 없다는 게 입덧이다. 몇 날 며칠, 또는 몇 달을 자리보전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평소보다 닥치는 대로 무얼 먹고 싶어 하기도 해, 심지어는 돌아누워 방 벽을 바른 흙이며 종이라도 떼어 먹게 된다 함이다.
 
먹고 싶은 것은 많은데, 구할 수 없으니 나온 기가 막힌 행태다. 오죽 가난했으면 그랬을까. 농경시대 우리 제주사람들은 참 가난했다. 숙명이었을까. 어지간히 못 살지 않았다. 이 속담이 생겨난 그 시절의 참혹함이 눈에 생생히도 읽힌다.
 
임산부의 왕성한 식욕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옛 시대 배경을 떠올려 볼 일이다. 뱃속 태아는 무슨 죄인가.
 
임신 중 입덧, 구역‧구토는 임산부와 태아 둘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흔한 증상이다. 이것 때문에 임산부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질 수 있고, 직장생활에 지장을 줌은 물론, 병원비 부담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통계가 있다.
 
입덧은 임산부 전체의 70~85%에 이른다 한다. 대개 증상이 지속적이라 중증도를 낮춰 보려는 시도는 별의미가 없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니까 질병이라기보다는 임신 초기에 소화기 계통에 흔히 나타나는 일종의 생리현상이다.
 
임신한 여성이 임신해 2~3개월 됐을 때, 토악질이 나고 입맛이 떨어지면서 몸이 쇠약해지는 증세가 입덧이다. 드라마 등을 통해 익히 알려져 아이들에게도 낯선 말이 아닐 것 같다. 요즘 아이들 질문이 많잖은가. 엄마의 입을 쳐다보며 잔뜩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다가갈 테니까.
 
실제 입덧의 사례는 단지 구토뿐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흔히 밤새 막걸리를 마신 다음날 덜컹거리는 시골 버스에 탔을 때 나타나는 멀미기에 빗댄다.
 
하지만 그리 쉽게 지나치듯 가볍게 비유하면 여성들에게 눈총을 받는다. 그냥 며칠 하다가 그치는 가벼운 증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부에 따라 개인차가 있다. 심하면 남편을 쳐다만 봐도 순간적으로 올라온다는 게 입덧이다.
 
입덧이 심하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없는데 구토가 심하니 뱃속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는데 산부는 먹지 못해 몸무게가 줄어드는 현상인들 왜 없을까. 그렇지만 입덧은 결코 질병이 아니다. 견뎌 내기 힘든 게 문제지만 으레 그러려니 해야 하는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어쩌면 신이 여인에게 내린 운명적 시련일지도 모른다. 흑흑 칠야 어둔 밤, 그 어둠도 새벽 동살이 트기 직전이 가장 짙다. 고통 뒤, 옥동자나 고명딸을 순산한다. 이런 축복이 없다.
 
아예 입덧이 없기도 하고, 입덧으로 식욕이 매우 왕성해져 먹고 싶은 것을 수없이 요구하는가 하면, 속이 메슥거려서 음식을 일절 받아들이지 않는 수도 있어 천차만별이라 한다. 산모에 따라선 평소 입데 대지도 못하던 것이 입맛 당기면서 전혀 비위에 거슬리지 않기도 한다. 보통 임산부와는 정반대의 경우다.
 
재미있는 설명이 있다. 입덧의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게 없지만, 태아에게 위험을 끼칠 수도 있는 외부 물질로부터 태아를 보호하가 위해 어미가 취하는 자기보호 기제가 아니냐는 것. 꿈보다 해몽이라고 흥미로운 해석이다.
 
입담인가. 더욱 흥미를 끄는 게 있다. 잉꼬부부라지 않는가. 부부 사이의 금슬이 지나치게(?) 좋으면 남편이 대신 입덧을 한다고 하니 모를 일이다. 이를 ‘쿠바드 증후군’이라 한다는데, 지구상에서 멕시코 남자들이 제일 많다고 한다.
 
요즘 젊은 남편들, ‘애기 설 땐 벡보름도 떼여 먹구쟁 혼다’에 녹아 있는 슬픈 시대를 콧바람으로만 쐬도 아내를 사랑의 눈으로 다독이리라. 하지만 공평하지 않다. 고통을 둘러쓰다니, 여자만 무슨 죄인가.
 
눈바람 몰아치는 야반, 갑자기 족발이 먹고 싶다며 눈빛으로 간절히 다가오므로 시장통 걸음을 했던 옛 생각이 떠오른다. 평소 전혀 찾지 않던 음식이다. 어느 영이라 거역할 것인가. 잘 먹어 주니 고마웠다. 그렇게 내키는 게 참 신기했다.
 
대신 해 주진 못하는 고통이지만, 제발 고비를 넘겨주었으면 하고 종교도 없으면서 두 손을 모았었다. 입덧이란 그런 것이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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