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흥미진진 서스펜스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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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극단 세이레 연극 ‘무슨 약을 드릴까요?’

제주 극단 세이레가 5개월 만에 새 작품을 들고 왔다. 김정훈이 쓰고 설승혜가 연출한 <무슨 약을 드릴까요?>이다.

지난해 2월 <자살에 관하여> 이후 세이레는 이현주 단원이 연기를 그만두는 등 여러모로 부침을 겪었다. 20~21일 공연한 이번 작품은 제주국제대학교 공연예술학과에 재학 중인 젊은 배우 지망생 몇몇을 섭외하고, 설승혜 배우가 첫 연출에 나서는 등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노력했다.

극 중 배경은 어느 마을의 작은 약국이다. 20년 간 한 자리를 지켜온 덕분에 약국은 마을 사랑방과 다를 바 없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빠짐없이 ‘문제’를 지니고 있다. 

남편과의 불화 때문에 채팅으로 삶의 낙을 얻는 주부(설승혜),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남편을 칼로 찌르고 만다. 상사 사모님의 강아지 감기까지 챙겨야 하는 스트레스로 인해 인사불성 만취한 남자(김시혁), 극단적인 기독교 신자 시어머니(이영원)와의 갈등으로 폭식증을 앓는 여인(박서정). ‘소환사의 협곡’에서 밤낮으로 활약하느라 수면제가 필요한 초등학생(김시혁), 돈 많은 남자를 노려 ‘인생 한방 역전’을 꿈꾸는 여인(박서정)과 멋진 옷을 차려입고 고급 자동차를 빌려 밤마다 여자들에게 껄떡대는 허세 가득한 공익요원(황현수). 알고 보니 하룻밤을 같이 보낸 두 사람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임신 잘 되는 약, 비아그라를 약국에서 찾는다.

이런 군상들 속에서 약사(양순덕)와 청년(이주민)의 존재는 얼핏 정상적으로 보인다. 

약사는 이런 저런 성격의 고객들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빼지만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킨다. 특징이라면 별난 고객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지 자양강장제를 수시로 들이키고 일부는 화분에 따라버린다. 또 통화가 제대로 되는지 알 수 없는 전화기로 반복해서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청년은 약사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면서 약사가 트는 음악과 관련 영화 정보를 줄줄 꿰는 영화 애호가다.

연극의 끝맺음은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반전으로 장식한다. 평온함을 내내 유지해오다 어느 순간 광기에 사로잡히는 약사와 청년. 관객들은 급변하는 전개와 오싹함에 시선을 떼지 못한다. (언젠가 작품과 만날 도민들을 위해 자세한 내용은 적지 않는다.)

<무슨 약을 드릴까요?>는 가감 없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우리 안의 욕망을 비춘다. 그 욕망의 원인은 상당수가 현실 속 고통과 불만이다.

남편과의 다툼은 익명 채팅과 칼부림을 야기하고, 궁핍한 살림살이는 물질로 연애·결혼 상대를 고르는 판단과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술주정으로 이어진다. 가정에서의 안타까운 사고로 인해 불거진 고부 갈등은 폭식과 종교에 빠져드는 결과로 귀결된다. 이런 흐름은 작품의 중요한 키워드인 ‘중독’과 맞물려 현대인의 맹점을 꼬집는다. 화분, 자양강장제, 전화기 등 의도를 담은 상징들도 작품을 흥미롭게 읽는 요소다. 

극예술 특성 상, 다소 과장이 섞이나 우리 주위에서 접할 만 한 이야기들이기에 관객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곳곳에서 터지는 웃음은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다. 대사와 표정, 분위기, 여백 등 여러 가지 웃음 포인트는 관객을 즐겁게 만든다.

<무슨 약을 드릴까요?>는 초중반까지 웃음 가득한 희극 느낌으로 이어가다 종반으로 향할수록 긴박한 서스펜스(suspense) 분위기를 갖춰간다. 한꺼번에 몰아치는 감이 없지 않지만 마치 ‘강 대 강’이 충돌하듯 약사와 청년의 막판 대립은 상당한 몰입을 안겨준다. 

20일 오후 7시 공연을 마친 '무슨 약을 드릴까요?' 출연진. ⓒ제주의소리
20일 오후 7시 공연을 마친 '무슨 약을 드릴까요?' 출연진. ⓒ제주의소리

배역에 녹아드는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적재적소 성경 구절을 낭독하며 독기를 쏘아대는 노인 역의 이영원, 실제 만취한 주정뱅이를 떠올리게 한 김시혁, 한껏 진지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웃음을 주고 반대로 격정적인 연기 역시 설득력 있게 소화한 이주민 등 모든 출연진은 눈에 띄는 실수 없이 주어진 역할을 매끄럽게 소화했다. 양순덕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약사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어머니까지 서로 다른 양극단의 표정을 노련하게 구현했다.

자잘한 소품까지 실제 약국 느낌을 살린 무대는 작품의 완성도를 크게 높이는 요인이다. 세이레의 최근작 <자살에 관하여>, <분장실> 등과 비교하면 이번이 무대 디테일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고 느낀다.

<무슨 약을 드릴까요?>를 통해 연출자로 데뷔한 설승혜는 서스펜스 장르에 관심이 높아 보인다. 그는 지난 5월에 열린 제8회 제주 전국 장애인 연극제에서 서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극단 ‘도란토닥’의 출품작 <아내의 선택>의 연출·각색·출연을 맡은 바 있다.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지만 장애인 애환을 소재로 녹여낸 다른 출품작들과 달리, 도란토닥은 장애와는 무관한 내용의 작품을 선택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아내의 선택> 역시 서스펜스 장르인 점을 고려할 때, 연출자 설승혜가 선호하는 경향을 짐작케 한다. 이번 <무슨 약을 드릴까요?>에서도 섬뜩함을 표현하는 극 말미 조명 연출, 차분해서 더욱 서늘한 여운있는 마무리는 연출자의 개성이 잘 반영됐다고 본다. 

모처럼 만난 세이레의 신작은 신구(新舊) 배우의 조화 속에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기지개를 켠 극단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PS. <무슨 약을 드릴까요?>를 둘러싸고 논란 하나가 일었다. 제주국제대학교 공연예술학과 재학생 몇 명이 개인 판단에 의해 출연한 사실이, 마치 학과 차원의 공동 작업처럼 잘못 알려졌다는 것. 이런 오해가 발생한 원인으로 명확하게 공연 내용을 보도하지 않은 기자의 잘못도 상당히 크다는 점을 이 자리를 통해 밝힌다. 극단 역시 보다 정확한 정보 제공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제주국제대학교 공연예술학과는 배우를 포함해 공연예술 인력을 양성·배출하는 지역의 유일한 고등교육 기관이다. 안정된 상황은 아니나 홍보에 힘쓰고 공개 무대도 가지는 등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학과를 향한 극단들의 ‘러브콜’이 상당수 이어지는 것으로 안다. 때문에 학과는 교육적인 목적을 지키면서 지역 연극계와 손발을 맞추고자 고민이 큰 상황이다. 이번 논란을 반면교사 삼아 공연예술학과는 외풍에 휘둘리지 않고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동시에 지역 연극계도 활력을 얻는 양 쪽의 발전·상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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