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의 괴물들
무관심의 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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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世通, 제주 읽기] (14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김윤하 역, 문학동네, 2019.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김윤하 역, 문학동네, 2019. 출처=알라딘.

1.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기

“선생님은 상대방이 받을 상처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말씀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며칠 전에 동료 선생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들은 말이다. 아내에게 평생 들어온 말이라서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어느덧 동료들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밖에서도 경계를 늦추고 살았구나 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소심한 편이라 공공장소에서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낯선 사람을 만나도 쉽게 말을 놓거나 농담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농담을 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면 그런 조심성이 사라지는 듯하다. 친한 상대에게 못마땅한 점이 보이면 가혹한 어휘로 지적질을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더러운 성질에서 비롯된 이런 잘못된 습관은 쉽게 교정이 되지 않는다. 내가 좀 더 친절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내가 하는 말을 들을 상대방의 상처를 헤아려 말조심을 했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진보한 사회란 친절한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일 것이다. 친절한 사람이란 무엇보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주려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다. 반대로 도덕적으로 퇴보한 사회는 타자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타자에게 상처를 주고도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친절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쪽으로 가고 있을까?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혐오 표현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듯싶다가도, 차에 깔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시민들이 힘을 합쳐 차를 들어 올렸다거나, 길에서 쓰러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모르는 사람이 달려와 심폐소생술을 하고 사라졌다는 등의 기사들을 보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여러 이유에서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기 힘들다. 우선 자기 자신이 고통당하는 당사자일 경우 타자의 고통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고통의 원인은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나 사회의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어 다른 사람의 처지를 고려하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표현할 능력이나 수단을 갖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사회에 글쟁이가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편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삶을 살더라도 나처럼 성질이 고약하거나 이기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들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현저히 떨어질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고 있건,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도덕교육은 이런 사람들을 친절한 사람들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렇지만 타자의 고통이 나의 행복으로 연결되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친절한 인간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친절함을 위한 예술이 필요하다.

2. 킨보트: 황홀경에 빠진 무관심의 괴물 

나보코프의 대표작인 《창백한 불꽃》이 새롭게 번역되어 얼마 전에 출간되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이 소설은 나보코프의 ‘탐미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회자된다. 조지 오웰의 소설을 시사적인 쓰레기라고 불렀던 나보코프는 자신의 소설이 시사적인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고도 한다. 그의 작품들은 미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순수예술의 결정체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심미적인 쾌감을 느끼게 되기보다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오웰의 소설보다 더 실천적이다.

《창백한 불꽃》을 처음 읽는 독자는 그 형식적인 특이함에 당황하게 된다. 소설인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창백한 불꽃’은 네 편의 시의 제목이며, 나머지는 그 시에 대한 주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석을 읽지 않는 버릇을 가진 독자라면 아마도 시만 읽고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집을 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시와 주석을 내용으로 한 소설이다. 시를 쓴 작가는 존 셰이드이고 그 시에 대해 주석을 단 인물은 찰스 킨보트이다. 두 인물 모두 나보코프의 창조물이다. 셰이드는 무례한 이웃을 내치지 않는 친절한 시인이고, 킨보트는 시인을 통해 자신의 스토리를 예술로 만들고자 하는 탐미주의 지식인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셰이드의 시를 다 읽고 나서 킨보트의 주석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가 책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아주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독자가 아니라면 책을 거의 다 읽은 다음에야 킨보트의 주석이 주석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셰이드는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보는 회한조의 시를 썼다. 킨보트는 셰이드 시의 각 행에 번호를 매기고 마치 주요한 행에 대해 설명을 하는 식으로 주석을 달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석을 읽으면 읽을수록 킨보트가 셰이드의 시를 해설하고 있다고 여겨지기는커녕 킨보트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킨보트는 셰이드가 살아 있을 때 틈나는 대로 젬블라라는 나라에서 망명한 왕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셰이드가 그 스토리를 시로 완성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셰이드의 시를 손에 넣은 킨보트는 주석가라는 유리한 지위를 이용하여 그의 시를 젬블라에 관한 시로 재가공한 것이다. 

《창백한 불꽃》이라는 소설에 수록된 셰이드의 시 ‘창백한 불꽃’의 제2편은 주로 셰이드의 죽은 딸에 대한 이야기로서 셰이드 부부의 고통이 절절하게 묘사된 부분이다. 킨보트의 무관심은 딸의 죽음에 관한 주석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293행: 그애

시인의 딸 헤이즐 셰이드는 1934년에 태어나 1957년에 죽었다.(230행과 346행 주석 참조).(227쪽)

킨보트가 주석을 달고 있는 ‘그애’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셰이드의 시구에 등장한다. 

그리고 우수에 젖은 고개짓으로 그애의 혼령을 맞이하고
그애의 첫 장난감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거나
책갈피에서 발견한 그애의 엽서를 바라보는 당신을 더없이 사랑한다.(54쪽)

친절한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통 정도의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셰이드의 시에서 주석이 필요한 부분은 딸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 하는 셰이드 부부의 고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냉혹한 탐미주의자인 킨보트에게 그런 고통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킨보트는 셰이드의 딸 헤이즐의 출생년도를 주석으로 달고 넘어갈 뿐이다. 더 나아가 킨보트는 젬블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바쁜데 시인이 왜 쓸데없이 자신의 못난 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일까라고 의아해 한다. 강박적인 탐미주의자인 킨보트는 셰이드의 시를 젬블라에서 망명한 왕에 대한 시로 해설하면서 황홀경에 빠져들어 갔을 것이다. 그의 눈에는 모든 시구가 젬블라에 관한 것으로 읽혔다. 어떤 것을 그것과 무관한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은 상상력이 풍부한 천재들의 작업이다. 냉혹한 광인인 킨보트는 자신의 상상력이 가공해 내는 예술의 세계 속에서 황홀경에 빠져든다.

나보코프는 왜 이렇게 구역질나는 미치광이를 창조해낸 것일까? 로티에 의하면 무관심의 괴물인 킨보트의 황홀경에 대한 무자비한 추구는 셰이드의 부드러움과 친절함을 눈에 띄게 하는 장치이다. 로티는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놀랄 만한 무관심을 통해서 어떤 사람의 기쁨이나 고통에 대해 주목하게 되면, 그 기쁨이나 고통을 더 잘 인지할 수 있을 것”(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민음사, 1996. 200쪽)이라고 말한다. 셰이드는 부드럽고 친절한 인물이었던 반면 킨보트는 냉혹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후자가 미적인 자기완성에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나보코프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예술적 재능이 결코 친절한 세계를 만드는 일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보코프의 이런 관점이 우리에게 어떤 도덕적 태도를 제시해 준다. 즉 나보코프 자신은 회의적이었지만 예술적 관심은 도덕적 관심과 연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의 도덕적 관심이란 앞에서 말한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제 남에게 독설로 상처를 줄 때 뿐 아니라 아름다움을 감상하거나 창조함에 있어서도 누군가 그로 인해 고통당하지 않을까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잔인한 인간이 되지 않기란 매우 어렵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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