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46. 악셀 호네트·낸시 프레이저, <분배냐, 인정이냐?>, 김원식·문성훈 역, 사월의 책, 2014 

출처=알라딘.

1.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

출산율은 오르지 않는 반면, 평균 수명은 늘어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속도로 초고령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추세를 바꾸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 정부에서 오래전부터 출산장려 정책을 펴고 있지만 들어가는 예산에 비해 별 효과가 없다고 한다. 아이를 낳으면 돈을 주겠다고 해도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아이를 낳지 못한다. 아이를 낳으려면 일단 결혼을 해야 하는데 요즘 결혼은 아무나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기 위해 젊은이들은 몇 가지 장벽을 넘어야 한다. 연애를 해야 하고, 취업을 해야 하고, 함께 살아갈 집을 구해야 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첫 번째 장벽에서 좌절한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야 하는 형편에 연애는 일단 사치로 여겨진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연애를 하려고 해도 연애를 원하는 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젠더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기 시작한 젊은이들이 연애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나 연애 자체를 적대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장벽을 넘더라도 둘 중 하나라도 취업에 실패하면 결혼은 무기한 유보하거나 포기해야 한다. 외벌이로 결혼생활을 영위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애와 취업에 성공한 대견한 커플이 탄생하더라도 집을 구해야 한다는 세 번째 장벽을 만나게 되면 결혼은 없던 일로 치게 되기가 쉽다. 둘이 벌어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거주 공간을 마련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소득만으로는 출퇴근을 위해 하루 몇 시간씩 투자해야 하는 거리에 위치한 작은 집을 구하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애를 낳으면 누가 양육을 할 것이며, 양육비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이르면 혼자 벌어 혼사 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에 덧붙여 젊은이들을 좌절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교육을 받고, 또 부모로부터 그러한 대우를 받고 자란 요즘의 젊은이들이 취업이나 결혼의 과정에서 받게 되는 문화적인 충격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입사 후 겪게 되는 가부장적인 회사의 분위기에 상처를 입는다. 직위와 결부된 암묵적이며 모호한 차별적인 대우는 성장과정에서 형성해 온 자존감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결혼을 통해 접하는 남성중심주의는 더 심각하다. 한 가정의 소중한 자녀가 결혼과 동시에 하녀로 전락한다. 관습이나 관행이라는 이유로 수행되는 시댁 식구들의 무시와 차별은 요즘의 젊은이들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잔인하다. 

그런 고비용을 지불하면서도 결혼을 하겠다는 젊은이가 있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서로 끔찍하게 사랑해서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거나 부모가 부유한 경우이거나. 흙수저 젊은이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기성세대에 적대감을 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 사회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젊은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저렴한 주택을 제공하고, 성적인 차별을 중단해야 한다. 돈 없는 젊은이들에게 굴욕을 주고,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를 일삼으면서 사회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몰염치한 것이다. 

2. 인정과 분배는 선택적인 과제인가?

대학가가 민주화 시위로 들끓었던 1980년대에도 페미니즘 이슈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여성의 권리는 경제적인 착취를 종식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성차별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페미니스트들은 관점이 매우 다양해져서, 그렇다고 보는 쪽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와 젠더 문제를 별개로 보아야한다는 관점도 있다. 심지어 특정한 활동가들은 생물학적인 남성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분배냐, 인정이냐?>는 요즘 사회철학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와 미국의 젠더 이론 전문가인 낸시 프레이저의 논쟁을 담은 책이다. 호네트는 하버마스를 계승하고 있는 비판이론가로서 인정투쟁을 인간해방을 위한 규범적 이론으로 주장하고 있다. 호네트에게 있어서 인정이론은 “사회적 인정의 박탈, 모욕과 무시와 관련된 현상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불의 경험의 핵심을 규정”(207쪽)하는 이론으로서 단지 문화적인 차원의 인정질서만을 논의의 범위로 삼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불평등의 문제 역시 정당한 인정 요구의 훼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에 반해 ‘정체성 정치’를 주장하는 낸시 프레이저는 분배와 인정이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토대로 하고 있는 문제이며 둘을 구분하지 않을 경우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 현상들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분배 패러다임에서 시정을 위한 대책이 경제적 개혁이라면 인정 패러다임에서는 문화적이거나 상징적인 변화라는 것이다. 인정 패러다임에서 불의로 인한 희생자들은 계급보다는 신분집단으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고 프레이저는 주장한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프레이저는 분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젠더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두 가지 불의를 모두 근본적이고 동등한 독자성을 가진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젠더는 이차원적인 사회적 차별이다. “젠더는 그것을 분배의 궤도에 위치하게 하는 계급 차원과 동시에 그것을 인정의 궤도에 위치하게 하는 신분 차원을 결합”(46쪽)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젠더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의 경제구조와 신분 질서 모두를 변화시키는 것이 요구된다.   

호네트는 프레이저가 젠더 문제가 새롭게 등장한 문화적인 차원의 정체성 정치의 영역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젠더 문제가 등장한 것은 200년의 역사가 있으며 새로운 현상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분배와 젠더 문제를 작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호네트는 주장한다. 예컨대 분배투쟁은 경제적인 패러다임에서만 진행되는 과정이 아니라 “사회집단들이 자신의 실제 업적이 무시당했다는 경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기존의 평가 모형에 의문을 제기하는”(238쪽)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분배투쟁에 나서는 사람들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보다 높은 가치평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젠더 문제 역시 이런 더 근원적인 도덕적 요구의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하는데 프레이저의 ‘문화적‘ 인정 개념은 젠더 문제를 단지 문화적인 차원의 정체성 요구로 간주함으로서 문화적 갈등 전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프레이저는 호네트의 인정 일원론이 시장 메커니즘이 문화적 도식에 지배되지 않으며 신분 위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경제적 계급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318쪽) 프레이저는 계급적 계층화가 불평등 분배를 통해 신분 위계가 무시를 통해 사회구성원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으며, 그 해법은 각각의 차원에서 동등한 참여의 원칙을 준수하여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논의의 핵심은 경제적 양극화가 낳은 계급 질서와 사회적 차별이 낳은 신분 질서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호네트는 도덕적 일원론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고 프레이저는 관점적 이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들의 논쟁이 합의에 이를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은 각자의 이론을 정교화하기 위한 일종의 문화 정치를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논쟁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맞닥뜨린 장벽이 글로벌한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굴욕과 무시가 없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그 어디에도 젊은이들을 위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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