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역사와 현실 속의 문명을 직조하는 사람들
큐레이터, 역사와 현실 속의 문명을 직조하는 사람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BOOK世通, 제주 읽기] 151. 에이드리언 조지, '큐레이터', 문수민 옮김, 안그라픽스, 2016.
에이드리언 조지, '큐레이터', 문수민 옮김, 안그라픽스, 2016. 사진 출처=알라딘.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한국사회에서도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지 40여년이 지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큐레이터라는 직종이 생긴 것이 1990년대의 일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에 사립 미술관들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큐레이터 직종의 양적 성장 또한 괄목할만하다. 큐레이터 관련 대학 교육의 양적 증가 또한 큐레이터 양산에 큰 몫을 차지한다. 이렇듯 확장일로에 있는 큐레이터라는 직업은 만족도가 매우 높은 직종으로 각광받고 있다. 큰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안정적인 기관에 자리를 잡으면 공신력을 바탕으로 맡은 임무 안에서라도 재량권을 가지고 전문가로서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직업 평가 설문 조사에서도 만족도 높은 직업 상위에 큐레이터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은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공립미술관들은 팍팍한 공무원 체제 안에서 행정업무에 몰두하다가 정작 챙겨야할 핵심적인 내용에 아쉬움을 남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관 안에서의 체제계적인 업무분장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절대적인 인력부족 탓이 크다. 게다가 큐레이터십에 관한 안팎의 문화적 합의 또한 얕은 상황이다. 공립미술관들이 이런 상황이라면 사립미술관들의 형편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선망의 대상으로 비치는 것은 그 안에 뭔지 모를 환상이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환상은 현실의 결핍을 기만하거나 대체하는 기제다. 이 책 <큐레이터>는 영문 책 제목인 <The Curator's Handbook>이라는 제목이 알려주듯이, 큐레이터를 위한 지침서로서, 환상을 깨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준다.

이 책의 저자 에이드리언 조지(Adrian George)는 <영국정부아트컬렉션>(UK Government Art Collection)의 부관장 겸 선임 큐레이터이다. 교육, 해설, 공공 프로그램에서 전문적인 예술 행사에 이르는 다양한 출판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부서를 이끌고 있으며, 큐레이팅과 현대미술품 커미셔닝 관련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저자의 능력은 실무에서 나왔다. 벨기에, 필리핀, 카타르, 스페인, 영국, 예멘에서 장소특정적 작품을 커미셔닝했으며, 홍콩, 더블린, 런던, 스코페, 뉴욕, 타이베이 등지에서 전시를 기획한 그는 테이트리버풀(Tate Liverpool), 테이트모던(Tate Modern), 뉴뮤지엄(New Museum)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따라서 이 책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큐레이터가 들려주는 현장 지침서로서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시의 제작과 기획 영역의 거의 모든 일을 큐레이터가 꿰고 있어야 하므로 일의 양과 수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고 크다. 전시에서 큐레이터가 차지하는 위치는 영화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위상과 비슷하다. 영화에서도 억대 이상의 자본을 투여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펀드레이징에서 홍보까지 제작과 기획의 거의 모든 일을 해야 하는데, 큐레이터의 경우 영화처럼 재정과 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일의 성격상, 큐레이터가 거의 모든 것을 두루 꿰고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큐레이터는 조사연구 수준에서 전시의 기획과 교육 및 홍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총괄하는 팔방미인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렇듯 큐레이터는 문화콘텐츠를 생산하는 지식인이자 그것을 전시와 출판, 교육프로그램 등으로 실현하는 문화행정가 정체성을 겸하고 있다. 

에이드리언 조지는 현장에서 오랫동안 실무를 해온 큐레이터답게 큐레이팅의 시작에서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과정과 마무리하는 결과보고의 수준까지의 거의 모든 일을 이 책에 담았다. 흔히 전시기획자와 동의어로 이해하곤 하는 큐레이터라는 직책은 제작자이자 커미셔너, 전시기획자 교육자 관리자 주최자 등의 지위를 총괄한다. 이 말은 유럽의 근대문명 탄생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유럽 14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커렉션 문화의 성립 과정에서 감독이나 관리자, 후견인 등을 뜻하는 말로 생겨난 것이다. 큐레이터라는 말은 ‘돌보다’라는 뜻의 라틴어 ‘Curare’에서 왔다. 원래는 미성년자나 광인을 돌보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오늘날 뮤지움에서 사용하는 'Curator'로 변화했다. 

근대 초기 유럽에서 제국주의의 식민침탈 시기에 활성화한 수집 문화는 유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했다. 큐레이터라는 직업은 이렇게 권력자나 재력가가 유물을 수집할 때 체계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수집을 돕는 일로부터 출발했다. 이러한 일은 근대문명 가운데 뮤지움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볼 때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뮤지움은 역사적 유물을 체계적으로 조사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집하여 보존하고, 나아가 전시하고 교육하는 항구적인 비영리기관이다. 이 기관의 핵심 내용을 채우는 존재가 큐레이터이니 그 위상은 초창기의 유물 관리인 수준에서 근대기의 문명을 창조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큐레이터는 역사적 유물을 특정인의 소유물로부터 사회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 인류사적인 공통의 감각과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근대의 문화적 공화주의 이상을 실현한 위대한 존재들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큐레이터의 위상은 한 단계 더 진화한다. 단순히 지난 과거의 유물을 연구하고 정리하여 전시, 교육함으로써 과거와 현실의 대화를 유도하는 일이 아니라, 동시대의 창작과 향유를 매개하고 그것을 미래로 연결하는 기획자 역할로 확장한 결과이다. 물론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한 연구자로서의 깊이는 큐레이터 역할의 핵심이지만, 그것 이상의 활동적인 역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중론이다. 이 책이 ‘큐레이터 핸드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이유는 20세기 중반 이후의 큐레이터에게 부과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한마디로 큐레이터 실무경력을 바탕으로 한 현장 지침서다. 

전시기획서 작성에서 예산 및 자금 조달, 계약과 협상, 의무, 평가, 전시 출판물 및 부대상품 등 제작 초기 단계부터 챙기기 시작한 이 책은 전시구현 단계에서 실제의 전시공간 속에 들어가는 벽면, 조명, 도색, 보험, 운송, 기록 등의 실무들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게다가 작품 라벨, 리플릿, 가이드, 심지어 우편발송, 개막식, 투어, 보안, 전시해체와 반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알려준다. 이러한 디테일을 따라 이 책을 읽다보면 매우 흥미롭고 진지하게 현장의 생동감을 전달하고 있는 저자의 태도에 공감대가 넓어진다. 화려한 조명 아래 작품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전시공간을 보면서는 큐레이터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시노동을 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없겠지만, 이 책을 한번 슬쩍 보기만해도 큐레이팅이라는 일은 그 규모나 깊이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보여주는 장점 이면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미리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이 책의 미숙함이 아니라 한계 범주 같은 것인데, 큐레이터의 실무적인 지침을 알려주는 데 집중하고 있으므로, 그 이면에 조사연구 단계의 학술과 비평 영역에서 큐레이터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즉 지식 생산자로서의 큐레이터 지위와 역할, 그 실천적 사례에 관한 부분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큐레이터는 전시장이라는 결과를 통하여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조사연구 과정에서 발굴과 문헌연구 등 엄청난 지적 활동을 해야한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이러한 지적을 미리 예측이라도 한 듯,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런 구절을 넣었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뮤지움이 처한 변화의 지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미래의 큐레이터 존재양식에 관한 언급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것은 변화하는 인류 문명 체계에 따라 큐레이터의 정체성 또한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언급하는 말이다.

우리는 매체를 초월한 세계를 살아간다. 큐레이터는 현재 시사에 관련된 이슈, 미래의 트렌드와 테크놀로지에 대해 최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추는 동시에 과거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미술관 내의 업무를 기관 안팎에 존재하는 좀 더 폭넓은 담론과 연결해야 한다. 런던 왕립예술대학교 현대미술 큐레이팅 과정 학과장인 빅토리아 월쉬(Victoria Walsh)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디지털의 중요성을 알려 하지 않는 아날로그식 큐레이터는 곧 멸종할 것이다. 미래의 큐레이터는 관람객의 니즈와 바람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술관 자체가 침체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큐레이터는 ‘연구, 수집, 보존, 전시, 교육‘이라는 뮤지움 정의에 기초해서 그 정체성을 확립하는 존재들이지만, 변화하는 매체 환경에서 그 너머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존재들이다. 특히 한국사회가 ’큐레이터=전시기획자‘라는 등식을 굳혀가고 있는 형편이니, 저자가 말하는 큐레이터의 미래는 잘 새겨들을 말이다. 심지어 소셜 큐레이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큐레이터의 역할에 대한 해석과 이에 다른 지위의 변화가 매우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까 이제 큐레이터라는 직종과 그 직무는 뮤지움에 종속한 일이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를 관통하여 소통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창조적 행위로 변화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들을 창의적으로 결합하여 문맥을 만드는 일은 단순히 미술 작품들을 화이트큐브에 배치하는 일 이상의 방대한 지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큐레이터라는 일 자체를 새롭게 큐레이션하는 시대이다.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
현(現) 경기문화재단 '평화예술대장정' 프로젝트 총감독 겸 정책자문위원장, 예술과학연구소장, 지리산프로젝트 예술감독,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장 등을 지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0 / 400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