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시선] 호텔 같은 병원? 병원은 대중화된 곳이어야 / 고봉진 교수

[제주의소리]가 제 '소리'를 내는데 한발 더 다가섭니다. 이름하여 '소리 시선(視線)' 입니다. '소리 시선'에는 일종의 사시(社是)가 담기게 됩니다. 금기의 영역은 없습니다. 다른 언론이 다루길 꺼려하거나 민감한 현안에도 어김없이 '소리 시선'이 향하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2017~18년 필자는 미국에 머문 적이 있다. 끝없이 뻗은 길을 달리며 미국 땅이 얼마나 크고 풍부한지 체험했다. 미국의 부유함이 느껴졌다. 몇몇 국립공원 탐방은 너무 좋았다. 자연의 웅장함과 장엄함에 감탄했다. 미국 국립공원은 부러움 그 자체였다. 그래도 어느 사회든 좋은 것만 있진 않다. 가끔씩 언론을 도배하는 총기 사고 소식에서 미국 사회의 이면을 알 수 있었다. 의료 시스템 문제도 그 중의 하나였다. 

미국 샌디에고 대학 병원은 호텔처럼 깨끗하고 좋았다. 사람들은 잘 차려 입었고 병원은 한결 여유가 있었다. 가까운 지인이 있어 자주 찾았지만 진료 때문에 가진 않았다. 문턱이 꽤 높아보였다. 한국에 있는 병원과 자연스레 비교됐다. 한국 병원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대기 시간은 꽤 길고 진료 시간은 매우 짧다. 그런데도 호텔 같은 미국 병원이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장처럼 편하게 찾을 수 있는 병원이 훨씬 나아보였다. 병원은 소수를 위한 고급 시설이 아닌 모두가 이용하는 대중화된 곳이어야 하지 않는가? 

한국 사회는 여러 장점이 있지만, 문제 또한 만만치 않다. 경쟁이 심하다보니 삶이 녹녹지 않다. 자살률은 높고 출산율은 낮다. 불평등은 심화되고 불안정성은 크다.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없고, 최저임금을 올리는 정책은 역효과를 낳았다. 아파트, 주택 가격은 어떤가? 곳곳에서 청년들은 좌절하고, 노인들은 한숨짓는다. 한국 사람의 유별난 교육열은 우리나라를 부양시켰지만, 오늘날 많은 사회문제가 바로 그 교육에서 나온다. 

그나마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갖추어진 제도로 의료 시스템을 꼽고 싶다. 한국 의료시스템은 이번 코로나19 사태에도 제 기능을 발휘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의료시스템이 갖추어진 시기다.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직장의료보험에서 시작해, 1978년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에 확대되었다. 1988년 농어촌지역 의료보험이 실시되었고 1989년 도시지역 자영업자에 확대되었다. 2000년 직장의료보험과 지역의료보험이 통합되었다. 독일에서는 1880년대 비스마르크에 의해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이 도입되었다. 스웨덴 ‘국민의 집(Folkhemmet)’ 이념은 진보 진영에 의해 꾸준히 추진되어 스웨덴 사회에 뿌리내렸다. 독일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은 진보와 보수가 긴밀하게 협조하여 운행되고 있다. 공공성 보장에는 (때론 정도 차이가 크지만)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

서울 양지병원에 설치된 1인 감염안전진료부스 'SAFETY'에서 18일 오전 한 의료진이 환자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음압시설이 갖춰진 공중전화 박스 크기로 환자와 의사가 분리돼 문진, 진찰, 검체채취 등을 진행해 상호 감염위험을 낮추고 빠르고 안전하게 검체를 채취하기 위해 개발한 장비다. 출처=오마이뉴스 권우성.
서울 양지병원에 설치된 1인 감염안전진료부스 'SAFETY'에서 18일 오전 한 의료진이 환자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음압시설이 갖춰진 공중전화 박스 크기로 환자와 의사가 분리돼 문진, 진찰, 검체채취 등을 진행한다. 출처=오마이뉴스 권우성.

우리나라 의료보장제도는 사회보험으로 운영된다. 모든 국민은 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보험료를 내지만, 필요에 따라 보험급여를 받는다. 사회연대 원칙에 기초해 전 국민이 혜택을 본다. 사보험으로는 이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당연 요양기관제’가 그것이다. 사회보험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 의료인은 보험의로 종사한다. 공공 의료기관이 활성화되지 않아 민간 의료기관이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공공 의료시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캐나다, 핀란드, 영국 등과 비교되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공공사업에 민간업체가 들어와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공공성을 담보하기보다 사익을 추구했을 뿐이다. 공공 재원이 부족해 민간업체를 참여시킨다 해도 민간업체를 공공성에 묶는 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연결고리가 느슨해지면 공공성은 무너진다. 제주 영리병원 설립을 시민단체와 뜻있는 사람들이 극구 반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공성을 확보할 수 없다면 민간업체의 참여를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민간업체가 경쟁하고 효율성을 발휘해야 할 영역은 공공 부문이 아닌 시장이다.  

물론 공공 부문의 방만함은 해소돼야 한다. 문제점이 있다 해서 공공 부문 전체를 들어내선 안 된다. 여기에 자주 쓰이는 외국 속담이 있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지 말라(Don‘t throw the baby out with the bathwater).”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공 부문에도 시장 효율성을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코로나19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위기에 처했다. 관광업 종사자, 소상공인, 자영업자, 일용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IMF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IMF 때 의도치 않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했던 걸 반복해선 안 된다. 구조조정이 진행되면 사회적 약자부터 쓰러진다. 제대로 대비하지 않으면 공공성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우리는 경제 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이루어냈지만 건강한 사회를 만들지 못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시장이 열렸지만, 경쟁은 심해졌다. 아래를 향한 여유가 사라졌다. 어떻게든 앞서 가려 할 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국가가 감당했던 공공성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비효율적이라는 멍에가 씌워졌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길은 점점 더 요원해졌다. 

정책 집행에 지혜가 필요할 때다. 우리에겐 나침반이 필요하고, 사회학적 상상력이 요청된다. 코로나19로 야기된 경제 위기에 대처하면서, 동시에 공공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야겠다. 어려워도 공공성을 포기해선 안 된다. 공공성을 일관되게 추진하는 힘이 절실하다. 경기 부양에 필요한 정책을 수행한다고 공공성을 무너뜨려선 안 된다.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을 실질적으로 분담하는 제도를 마련해야겠다. 한국 의료 시스템의 공공성을 믿는다면, 역량을 신뢰한다면, 그 공공성을 다른 제도에도 구축해보자. 물론 상황은 결코 녹녹지 않다.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한 순간에 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건강한 사회를 위해선 반드시 가야할 길이다. / 고봉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소리시선(視線) /  ‘소리시선’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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