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기지의 펜스를 그리다 - 예술과 역사의 회로를 연결하는 행동
군사기지의 펜스를 그리다 - 예술과 역사의 회로를 연결하는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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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16)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5월 18일이라는 날짜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것처럼 오키나와에도 5월 15일이라는 특별한 날짜가 있다. 1972년 이날, 27년간의 긴 시간에 걸쳐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국은 정권을 일본에 반환했다. 1945년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진행된 피의 혈투, 오키나와전을 거쳐 미군은 일본 본토 공격의 거점으로 오키나와를 손에 넣었고, 대일본제국이 8월에 항복한 뒤에도 점령을 계속했다. 1950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한국전쟁의 발발이라는 동아시아 정세의 격동 속에서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중요성은 극적으로 증대됐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냉전 구조 하에서 자유세계의 반공의 보루, '태평양의 방파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군사기지는 논밭 등 사유지를 접수하면서 확장됐고 땅을 빼앗긴 농민은 기지 노동자로 생계를 꾸렸다. 그 기지는 베트남전 때 북폭의 출격 거점이 됐고 베트남 사람들은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이라고 불렀다. 비참한 전쟁 체험을 잊지 않는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시 아시아 민중의 살육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군의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인의 반전 평화 운동은 첨예화됐고, 이와 병행해 평화헌법을 내세운 일본으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주민 운동도 고양됐다. 베트남에서 피폐해진 미국은 오키나와에서 미군 기지를 유지하는 경제적·심리적 비용으로부터의 해방을 생각하게 된다. 이를 위해 그들은 기지 기능을 유지하는 것을 절대적 조건으로 오키나와의 정권을 일본에 돌려준 것이었다. 1972년 5월 15일 이후 미국의 직접 지배는 끝났지만 미군기지는 여전히 오키나와에 있었다. 심지어 일본 자위대의 기지도 출현했다. 5월 15일이란 일·미 합작의 오키나와 군사화에 항거하는 새로운 투쟁의 시작이었다.

작은 섬에 둘러쳐진 철제 펜스. 1960년대 한 언론인은 오키나와에 기지가 있는 게 아니라 기지 안에 오키나와가 있다고 했다. 지금도 오키나와 사람들은 펜스에 둘러싸여 있는 듯하다. 미군이 일으키는 환경오염과 파괴, 강도·강간과 살인 등 강력범죄조차 펜스 너머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 오키나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게 된다. 펜스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무력함을 가시화하는 물질로 존재한다. 사회 상황에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는 오키나와의 작가에게 있어서, 펜스를 모티브로 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1967년생인 요나하 타이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요나하는 펜스의 1조 1조를 빛의 반사와 그림자의 분량을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그려낸다. 그의 펜스는 항상 어둠을 배경으로 해 몇몇 작품에서는 펜스 너머로 어른거리는 빛을 더하고 있다. 펜스의 기하학적인 그물코와 빛만으로 구성한 화면은, 페티쉬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미군 기지의 펜스에 둘러싸여 자란 요나하에게 있어서, 그것은 동시에 모종의 오브세션의 표출이기도 하다.

요나하 타이치의 작품 'Home-Banquet of backyard', 2016.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요나하 타이치의 작품 'Home-Banquet of backyard', 2017.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요나하 타이치의 작품 'Home-Banquet of backyard', 2016.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요나하 타이치의 작품 'Home-Banquet of backyard', 2016. 제공=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오키나와에서도 특히 미군기지가 집중된 지역에서 자란 요나하에게 펜스는 원풍경이다. 예를 들면 어릴 적, 미군인의 휴양시설인 골프장에 둘러싸인 펜스의 찢어진 틈으로부터 안에 들어가 동료들과 야구에 흥겨웠던 추억이 요나하에는 있다. 그 골프장이 반환되면서 소유자들은 대형 상업시설 건설을 통한 개발을 택했다. 2015년 거대한 쇼핑몰이 완성되면서 요나하는 자신의 정겨운 풍경이 실종된 것을 보게 된다. 그때 그는 미군기지가 있던 풍경에 향수를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전쟁의 살육 후 점령자들이 만들어낸 경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자신의 도착을, 그는 "자신의 향수는 식민지화되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식민지화된 자신의 심성의 어둠을 마주하기 위해, 요나하는 펜스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요나하는 오키나와의 동세대 작가로는 드물게, 반권력의 포지셔너리티에서의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작품을 이데올로기로 칠하는 것을 세심하게 회피하는 작가이다. 그의 뒷마당 잔치라는 펜스 연작도 그렇고, 작가의 배경을 모르는 감상자는 거기서 그저 아름다움을 볼지 모른다. 이 연작은 식민지 상황에 억압된 정신의 고백을 통해 75년 미군기지의 존재에 걸핏하면 길들이려는 사람들의 집합적 무의식을 도상화하는 시도라고 할 수도 있다.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에서는 그날을 평화헌법의 나라 일본으로의 '복귀'를 달성한 오키나와의 승리의 날로 받아들일지, 일본에의 '재병합'이라는 패배의 날로 받아들일지, 사상적 갈등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과거 류큐국은 1879년 일본제국의 무력병합에 의해 오키나와가 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 갈등은 예술가의 예민한 감성을 심부에서 자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나하의 작업 또한, 예술과 역사의 회로를 접속하는 행동으로서 현재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Painting the fence of military bases - the act of connecting the circuits of art and history

TOMIYAMA Kazumi

Just as the date May 18 is of great significance in modern history of Korea, Okinawa also has a special date of May 15, 1972, when the United States, after 27 years of occupation of Okinawa, "returned" its administrative rights to Japan; the bloody Battle of Okinawa in the spring and early summer of 1945 gave U.S. forces bases from which to attack the mainland of Japan and continued to occupy it after the Japanese Empire surrendered in August 1945. the importance of U.S. military bases in Okinawa increased dramatically in the 1950s during the upheaval of East Asian affairs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nd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The U.S. positioned Okinawa as the "bulwark of the Pacific," the anticommunist stronghold of the free world under the Cold War.

Military bases were expanded by confiscating privately owned land such as rice fields, and farmers who were deprived of their land became base workers to support their livelihoods. That base became a launch pad for the Bombing during the Vietnam War, and the Vietnamese people referred to Okinawa as the "Devil's Island. The people of Okinawa, who had not forgotten their tragic war experience, were heartbroken by the fact that they are were again supporting the slaughter of the people of Asia. Despite the harsh oppression of the U.S. military, the anti-war peace movement of  the Okinawans has intensified, and at the same time, the movement for the "reversion" of the Okinawa to Japan, which upholds the Peace Constitution, has also grown. The U.S., exhausted by Vietnamese War, began to think about freeing itself from the economic and psychological costs of maintaining U.S. military bases in Okinawa.

For this reason, they returned the Okinawa to Japan on the condition that the functions of the bases to be maintained. On May 15, 1972, the United States ended its direct control on Okinawa, but the U.S. military bases remained unchanged. In addition, a base for the Self-Defense Forces of Japan showed up. May 15 marked the beginning of a new struggle against the militarization of Okinawa by Japan-U.S. joint effort. An iron fence stretched across a small island. In the 1960s, a journalist said, "It's not that Okinawa has a base, it's that Okinawa is within a base".  Even now, the Okinawans seem to be trapped in a fence. Even the environmental pollution and destruction caused by the U.S. military, and the heinous crimes of robbery, rape and murder, are sucked into another world beyond the fence and out of reach of the Okinawan. The fence exists as a substance that visualizes the helplessness of the Okinawan people visible. For Okinawan artists who are keenly sensitive to social conditions, it may be natural for Okinawan artists who are sensitive to social conditions to use fence as a motif. Yonaha Taichi, born in 1967, is one of them.

Yonaha paints each and every grids of the fence with a meticulous calculation of the amount of light reflected and the amount of shadow. His fences are always a backdrop of darkness, and in some of his works, he adds a flickering light through the fence. Composed only of the geometric meshing of the fence and light, the work seems to pursue only fetishistic beauty, but for Yonaha, who grew up surrounded by the fence of a U.S. military base, it is also an expression of a kind of obsession.

For Yonaha, who grew up on Okinawa Island, especially in an area where U.S. bases are more concentrated, the fence is like an original landscape. For example, as a child, Yonaha remembers going inside through a breach in the fence around a golf course, a resort for U.S. military personnel, and playing baseball with his friends.When that golf course was to be returned, the landowners opted to develop it through the construction of a large commercial facility. In 2015, with the completion of a huge shopping mall, Yonaha saw the loss of his nostalgic landscape. It was then that he found himself nostalgic for the landscape where the U.S. military base had been. Nevertheless, it was the scenery originally created by the occupiers after the carnage of war. He describes his own perversion of nostalgia as "my nostalgia has been colonized". To face the darkness of his own colonized mind-set, Yonaha began to draw fences.

Yonaha does does not hesitate to make remarks in his anti-power and democratic  positionality, which is unusual for artists of his generation in Okinawa. And at the same time, he is an artist who meticulously avoids ideologically imbuing his work. The same can be said of his fence series, " Home-Banquet of backyard" in which the viewer, who does not know the artist's background, may just see beauty there. Through his confession of a spirit oppressed by the colonial situation, this series of works can be said to be an attempt to illustrate the collective unconsciousness of the people who have been tamed by the presence of the U.S. military base for 75 years.

May 15, 1972. In Okinawa, the ideological conflict still persists as to whether that day should be seen as a day of victory for Okinawa, which achieved a "reversion" to Japan, a country with a Peace Constitution, which states the renunciation of war, or as a day of defeat in the form of a "re-annexation" to Japan (the former Ryukyu Kingdom became Okinawa Prefecture in 1879 when it was annexed by the Japanese Empire through the armed forces). The conflict is bound to stimulate the artist's keen sensibilities in the depths. Yonaha's work is also inscribed in the present, as an act of connecting the circuits of art and history.


繪製軍事基地圍牆-連接藝術和歷史的線路
豐見山和美

正如5月18日對韓國近代史上具有重要意義一樣,沖繩也有的特別日子是5月15日。1972年,經過美軍27年的漫長佔領,佔領沖繩的美國「返還」了施政權。1945年春至初夏,美軍在血腥的沖繩戰爭中,作爲攻擊日本本土的根據地,佔領了沖繩,並在日本帝國於8月投降後,美軍仍繼續佔領了沖繩。20世紀50年代,在中華人民共和國的成立和6.25戰爭的爆發等東亞局勢的動盪中,沖繩美軍基地的重要性急劇增加。美國將沖繩定爲「太平洋的屏障」冷戰結構下的自由世界的反共堡壘。

軍事基地通過收購農田等私有土地來擴張,被剝削而土地的農民成爲基地勞動者,從而維持他們的生活。越戰時期,基地成爲轟炸的出擊基地,越南人將沖繩稱爲「惡魔島」。沖繩人民沒有忘記悲慘的戰爭經歷,他們對自己再次支持傷害亞洲民衆的事實感到心碎。雖然美軍進行了強烈的鎮壓,但沖繩反戰和平運動也越演越烈,而且要求日本回歸和平憲法的居民運動也高漲。在越戰中疲憊不堪的美國也考慮從沖繩維持美軍基地的經濟上、心理代價中解脫。因此,他們以維持基地功能作為條件,將沖繩的施政權返還給了日本。1972年5月15日,美國的直接掌控雖然結束了,但美軍基地仍沒有改變續留沖繩,甚至出現了日本自衛隊的基地。「5月15日」對沖繩人也是反抗美日合作沖繩軍事化的新抗爭的日期。

繞在小島上的鐵柵欄。20世紀60年代,一位媒體人士說:「不是沖繩有基地,而是整個沖繩在基地之內。」即使是現在,沖繩人似乎仍然困在圍牆之被包圍著。美軍造成的環境污染、破壞,以及搶劫、強姦、殺人等惡性犯罪也被圍牆外的另一個世界所籠罩,沖繩人顯得無助又束手無策。柵欄是使沖繩人顯得無力的存在物件。對於對社會情況高度敏感的沖繩藝術家而言,柵欄作爲創作主題也是理所當然的。1967年出生的與那霸大智便是其中之一。

與那霸將柵欄的每一條格柵都細緻地計算出光的反射和陰影的分量。他的柵欄總是以黑暗爲背景,在幾件作品裡,他為柵欄添加了一道閃光。用柵欄的幾何學網格和光構成的畫面看起來好像在追尋虛僞的虛偽美感,但是對於被美軍基地圍在柵欄上成長的與那霸來說,這同時也是一種「非對稱」的執著表現。

對於在沖繩島成長的與那霸來說,特別是在美軍基地密集的地區,圍欄就像是一片原始的風景。比如,與那霸從小被美軍士兵關在高爾夫球場圍着的柵欄的裂縫中進入室內,與朋友一起打棒球。隨着那個高爾夫球場被歸還,地主者們選擇了通過建設大型商業設施來開發。2015年,隨着巨大的購物商城竣工,與那霸再次目睹了自己懷念風景的消失情景。當時,他發現了自己對美軍基地曾經的風景懷著鄉愁。原來那是戰爭殺戮後的佔領者創造出來的風景。但是,他對自己認爲自己懷念的錯覺表示:「自己的鄉愁已被殖民化」。爲了面對自己殖民的自己內心的黑暗,與那霸開始畫起了圍欄。

與那霸在沖繩的同一代創作者中很少見,他毫不避諱反抗權力和民主立場的基進言論。同時也是慎重的避免將作品用理念來表現的藝術家。他的《後院宴會》這一系列的作品也一樣,不知背景的觀眾也許只能看到美麗的風景。這一系列作品也可以理解爲,通過反省被殖民地統治壓迫的精神懺悔,企圖把長達75年的美軍基地的存在和培養人民集體無意識的形象化。

1972年5月15日。沖繩將當天視爲實現和平憲法之國-日本的「返還」沖繩的勝利之日,或將當天視爲再次合併日本的失敗之日,或思想矛盾仍然存在(因爲過去的琉球國因1879年大日本帝國武力合併而成爲了沖繩縣)。這種矛盾不得不在深層刺激藝術家敏銳的感性。與那霸的創作也是將藝術與歷史相結合的途徑,刻劃在現在。


軍事基地のフェンスを描く―芸術と歴史の回路を接続する営為
豊見山和美

5月18日という日付が韓国の現代史において極めて意義深いものであるように、沖縄にも5月15日という特別な日付がある。1972年のこの日、27年間の長きにわたって沖縄を占領したアメリカは、その施政権を日本に「返還」した。1945年春から初夏にかけて行われた血みどろの沖縄戦によって、米軍は日本本土攻撃の拠点として沖縄を手に入れ、大日本帝国が8月に降伏した後も占領を継続した。1950年代、中華人民共和国の成立や朝鮮戦争の勃発という東アジア情勢の激動の中で、在沖米軍基地の重要性は劇的に増大していった。アメリカは、沖縄を冷戦構造下における自由世界の反共の砦、「太平洋の防波堤」と位置づけたのである。

軍事基地は田畑などの私有地を接収して拡張され、土地を奪われた農民は基地労働者となって生活を支えた。その基地は、ベトナム戦争時には北爆の出撃拠点となり、ベトナムの人々は沖縄を「悪魔の島」と呼んだ。悲惨な戦争体験を忘れない沖縄の人々は、自分たちが再びアジアの民衆の殺戮を支えている事実に心を抉られた。米軍の苛烈な弾圧にもかかわらず、沖縄の反戦平和運動は先鋭化し、並行して、平和憲法を掲げる日本への「復帰」を求める住民運動も高揚した。ベトナムで疲弊したアメリカは、沖縄で米軍基地を維持する経済的・心理的コストからの解放を考えるようになる。そのために彼らは、基地機能を維持することを絶対的条件として、沖縄の施政権を日本に返還したのだった。1972年5月15日、米国の直接支配は終わったが、米軍基地は変わることなく沖縄に居続けた。さらには日本の自衛隊の基地も出現した。5月15日とは日米合作の沖縄軍事化に抗する新たな闘争の始まりの日付だ。

小さな島に張り巡らされた鉄のフェンス。1960年代、あるジャーナリストは「沖縄に基地があるのではなく、基地の中に沖縄がある」と言った。今なお、沖縄の人々はフェンスに囲い込まれているかのようだ。米軍が引き起こす環境汚染や破壊、強盗強姦や殺人などの凶悪犯罪でさえ、フェンスの向こうの別世界に吸い込まれて、沖縄の人々の手は届かなくなる。フェンスは、沖縄の人々の無力さを可視化する物質として存在する。社会状況に鋭敏な感受性を持つ沖縄の作家にとって、フェンスをモチーフとすることは当然かもしれない。1967年生まれの与那覇大智もその一人だ。

与那覇は、フェンスの一条一条を、光の反射と影の分量を緻密に計算しながら描き出す。彼のフェンスは、常に闇を背景とし、いくつかの作品ではフェンス越しにゆらめく光を加えている。フェンスの幾何学的な網目と光だけで構成した画面は、フェティッシュな美しさのみを追究しているようにも見えるのだが、米軍基地のフェンスに囲まれて育った与那覇にとって、それは同時にある種のオブセッションの表出でもある。

沖縄島でも特に米軍基地が集中する地域で育った与那覇にとって、フェンスは原風景のようなものだ。たとえば子供の頃、米軍人の保養施設であるゴルフ場に巡らされたフェンスの破れ目から中に入って仲間たちと野球に興じた思い出が与那覇にはある。そのゴルフ場が返還されることになり、地権者たちは大型商業施設建設による開発を選んだ。2015年、巨大なショッピング・モールが完成して、与那覇は自分の懐かしい風景が失われたのを目の当たりにする。その時彼は、米軍基地のあった風景に郷愁を抱いている自分を見出した。もとはと言えばそれは戦争の殺戮の後の占領者たちが作り出した景色だった。にもかかわらずそれを懐かしんでいるという自分自身の倒錯を、彼は「自分の郷愁は植民地化されている」と表現する。植民地化された自分の心性の闇に向き合うために、与那覇はフェンスを描き始めたのだ。

与那覇は沖縄の同世代の作家には珍しく、反権力のポジショナリティでの発言をためらわない。そして同時に、作品をイデオロギーで塗り込めることを細心に回避する作家である。彼の「裏庭の宴」というフェンスの連作も然りで、作家の出自を知らない鑑賞者はそこにただ美しさを見るだけかもしれない。この連作は、植民地状況に抑圧された精神の告白を通して、75年に及ぶ米軍基地の存在にともすれば飼いならされようとする人々の集合的無意識を図像化する試みと言うこともできよう。

1972年5月15日。沖縄では、その日を平和憲法の国・日本への「復帰」を達成した沖縄の勝利の日ととらえるか、日本への「再併合」という敗北の日ととらえるか、思想的葛藤はいまだに続いている(かつての琉球国は1879年、大日本帝国の武力併合によって沖縄県となった歴史があるからだ)。その葛藤は、芸術家の鋭敏な感性を深部で刺激せずにはいないだろう。与那覇の制作もまた、芸術と歴史の回路を接続する営為として、現在に刻まれている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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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2
ㅎㅎㅎ 2020-05-26 18:13:02
토착왜구는 핑크당, 조중동, 일베놈들이고 ㅎㅎ
223.***.***.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