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오키나와 민중이 사랑한 정치가의 초상
불굴-오키나와 민중이 사랑한 정치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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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29)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COVID-19가 한창인 지금, 많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아카이브의 전시장의 문은 닫혀있다. 사람의 이동은 제한되어 여행지에서 전시장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던 날들은, 멀어져 버렸다. 각 시설에서 소장하고 있는 수집품은 둘도 없는 것으로서 전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감성을 자극받으며, 기억을 공유하고, 과거를 추체험하며, 미래를 그릴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관람객이 급감한 전시시설 운영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추세여서 문을 닫는 기관 소식도 드물지 않다. 그런 공간이 없어져 버리는 것은 실로 안타깝고,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나하시에 있는 사설 자료관인 ‘불굴관’도 그런 위기에 직면했다. 한때는 폐관도 생각했다고 하는 우치무라 치히로 관장이 앉아서 종말을 기다릴 수는 없다고 시작한 클라우드펀딩이, 예상도 하지 않았던 성과를 올리고 있다. 9월 말까지 3개월 만에 목표액 800만엔을 거의 달성하고 있으며 크라우드 펀딩 이외에도 직접 기부금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지원이 이 작은 자료관의 운영을 존속시키는 용기의 원천인 것이다. ‘오키나와 민중의 투쟁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장소를, 확실히 민중이 지지해 주고 있는 것이 기쁘다‘라고 우치무라 관장은 말한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불굴관 입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불굴관은 오키나와 민중의 자유를 위해 평생을 바친 정치가 세나가 카메지로(1907~2001)의 궤적을 전하는 자료관이다. 세나가는 오키나와를 유린하는 미일 양국 정부라는 막강한 권력에 정정당당하게 대치하는 청렴함, 휴머니티 넘치는 카리스마로 민중에게 사랑받은 오키나와 현대사의 레전드라고 할 만한 존재다. 1907년 오키나와 섬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본토에서 고등교육을 받던 청춘기에 사회주의에 눈을 떴다. 운동에의 관여를 이유로 방교 처분이 되지만, 그 후도 노동운동·평화운동에 위탁해, 1932년에 일본 제국하의 치안 유지법으로 징역 3년의 실형을 받았다. 출옥 후 오키나와에서 신문기자가 돼 미군 점령하에서도 언론 자유를 호소했다. 1947년 오키나와인민당 설립 위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 민주주의 확립을 내세워 미군의 압정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고무시켰다. 세나가는 기백과 유머 넘치는 연설의 명수로 거리 연설에서 모인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1952년 오키나와를 점령 중인 미군이 주민자치 명목으로 설립한 류큐 정부의 입법기관인 입법원 의원 세나가는 최고위로 당선됐다. 미군은 당시 오키나와 섬을 아시아의 반공 보루인 태평양의 방파제로 강화하고 오키나와 인민당을 공산주의라고 불리는 공포스러운 병의 매개자로 탄압해 1954년 인민당 당원 40여 명을 체포했다. 군사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그는 다시 2년 옥고를 치른다. 미국에 있어서 세나가는 핵심 “좌파”였다.

그러나 이 탄압은 오히려 세나가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은밀히 배양했다. 출옥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56년 12월 오키나와의 수도 나하시에서 치러진 시장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세나가를 승리시킨 것이다. 미군은 네거티브 캠페인에 공을 들이고 상대 후보를 지원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 언론들은 자국이 점령 중인 극동의 작은 섬에 탄생한 '좌파 시장(red mayor)'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시장이 된 세나가에 대한 미군의 음습한 탄압은 끝나지 않았다. 우선, 인구가 급증하는 나하시가 계획했던 급수 증수 사업을 중지하고, 이어서 나하시의 보조금을 동결했다. 세나가 지지에 대한 징벌이라고 해야 할 이런 처사에 대해 나하 시민은 자진납세운동을 전개해 97%라는 경이적인 납세율을 달성하고 시의 사업비를 충당했다. 빨갱이 사냥 광기가 만연했던 이 시대에 빨갱이로 간주되는 것은 곧 자유주의의 적으로 라벨링되고 상당한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었으며, 때로는 생명의 위기마저 수반되는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미군의 스파이가 된 오키나와인이 암약한 어둠의 시대의 한복판에서, 그런데도 약한 오키나와의 민중이 세나가를 지지한 것은 왜인가. 그것은 이념 대립 등을 초월한 정의에 대한 희구가 민중의 마음에 격렬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세나가가 좌파인지 아닌지 등 문제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민중과 더불어 사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전시실에서의 토크 이벤트.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세나가 서재의 재현.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좌파 시장 탄생 1년 뒤 미군은 선거법을 개악해 세나가에게서 피선거권을 박탈하고 과거 유죄판결을 명목으로 나하 시장 자리에서 추방했다. 오키나와를 민주주의 쇼윈도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미국의 소행이었다. 추방된 세나가는 “저는 이겼습니다. 미국은 졌습니다. 제2, 제3의 세나가를 내자. 그것이 미군과 매판 세력에 대한 더없는 선물이 될 것이다”라고 10만명의 대군중에게 말했다.

‘불굴’이란 고난에 꺾이지 않고 뜻을 관철하는 것을 말한다. 그가 좋아했던 이 말을 붙인 자료관은 세나가의 딸인 우치무라 관장이 사재를 털어 2013년 개관했다. 세나가에 관한 자료나 전시를 공적 기관에 맡기지 않는 것은, 민중 정치가인 세나가의 역할을 잇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병화에 의해서 존속의 위기에 섰던 기관을, 지금도 민중의 지원이 지지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미군의 탄압으로 재정 위기에 빠진 세나가의 나하시정을, 시민들이 납세에 의해서 지탱했던 과거의 재래 같기도 하다. 비민주적 권력에 대한 불굴과 불복종을 관철한 세나가 정신의 계보를 이으려고 하는 민중이 지금도 존재한다.

세나가와 민중의 투쟁을 기록한 아카이브를 전시하는 불굴관에는 화가들이 그린 세나가의 초상도 배치돼 있다. 이 작품들은 예술을 이해하고 미술가들을 음으로 양으로 뒷받침한 세나가에 대한 답례이지만 자유와 연대를 줄기차게 추구한 세나가의 정신 자체가 예술적이어서 그 면모가 화가들을 인스파이어(inspire) 했을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9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베 정권에 이어 태어난 더욱 음습한 간 정권 아래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으며 오키나와의 군사화에 저항하는 민중의 투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자칫 절망으로 도피하고 싶어지는 쓰라린 현실에서 투쟁의 역사를 공유의 기억으로 재생하는 공간으로서의 자료관의 존재 의의는 더욱 크다. 이 공간에서 생계를 지탱하기 위해 운영하던 잡화점 가게를 지키는 세나가의 모습, 그리고 동상이 아니라 (세나가와 동상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작은 피규어의 형태로 미소 짓는 세나가를 만지며 우리는 나약한 자의 불굴의 힘을 되찾는 것이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우치무라 관장. 오키나와의 염색기법 ‘홍형’을 이용한 세나가의 초상화와 함께.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9는 일본 헌법 9조를 뜻한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不屈―沖縄民衆が愛した政治家の肖像
豊見山和美

COVID19のさなかで、今でも多くの博物館や美術館、アーカイブの展示会場のドアが閉ざされたままだ。人の移動は制限され、旅先で展示会場を気軽に訪れることのできた日々は、遠くなってしまった。それぞれの施設の所蔵するコレクションはかけがえのないもので、展示のプレゼンテーションから私たちは多くのことを学び、感性を刺激され、記憶を共有し、過去を追体験し、未来を描く勇気を得ることができる。しかし、来館者が激減した展示施設の経営はますます厳しくなる一途で、閉鎖に追い込まれる館のニュースを聞くのも珍しくはない。そんな空間が失われてしまうのは実に切なく、やりきれないことだ。

沖縄・那覇市にある私設資料館「不屈館」もそんな危機に直面した。一時は閉館も考えたという内村千尋館長が、座して終末を待つわけにはいかないと立ち上げたクラウド・ファンディングが、予想もしなかったような成果を挙げている。9月末までの3か月で目標額の800万円をほぼ達成しつつあり、クラウド・ファンディング以外にも直接の寄付金が集まっているという。これらの支援が、この小さな資料館の運営を存続する勇気の源となっているのだ。「沖縄民衆の闘いの歴史が学べる重要な場所を、まさに民衆が支えてくれていることが嬉しい」と内村館長は語る。

「不屈館」は、沖縄の民衆の自由のために生涯を捧げた政治家・瀬長亀次郎(1907-2001)の軌跡を伝える資料館である。瀬長は、沖縄を蹂躙する日米両政府という強大な権力に正々堂々と対峙する清廉さ、ヒューマニティーあふれるカリスマとして民衆に愛された、沖縄現代史のレジェンドと言うべき存在だ。1907年に沖縄島に生まれた瀬長は、日本本土で高等教育を受けた青春期に社会主義に目覚めた。運動への関与を理由に放校処分となるが、その後も労働運動・平和運動にコミットし、1932年に大日本帝国下の治安維持法で懲役3年の実刑を受けた。出獄後、沖縄で新聞記者となり、米軍占領下でも言論の自由を訴えた。1947年、沖縄人民党の設立委員となって政治活動を開始、民主主義の確立を掲げて米軍の圧政に苦しむ住民を鼓舞した。瀬長は気迫とユーモアあふれる演説の名手で、街頭演説で集まった人々を熱狂させた

1952年、沖縄を占領中の米軍が住民自治の名目で設立した琉球政府の立法機関である立法院の議員に瀬長は最高位で当選。米軍は当時、沖縄島をアジアにおける反共の砦、太平洋の防波堤として強化しており、沖縄人民党を「共産主義と呼ばれる恐怖すべき病気の媒介者」として弾圧を強めて、1954年には人民党の党員約40人を逮捕した。軍事法廷で裁かれた瀬長は再び2年の獄中生活を送る。アメリカにとって瀬長は、筋金入りの「アカ」だった。

しかし、この弾圧はむしろ瀬長に対する民衆の支持を密かに培養した。出獄間もない1956年12月に沖縄の首都・那覇市で行われた市長選挙で、有権者は瀬長を勝利させたのだ。米軍はネガティブ・キャンペーンに精を出して対立候補を支援したが功を奏しなかった。アメリカのメディアは自国が占領中の極東の小島に誕生した「赤い市長red mayor」のことを大々的に報じた。

市長となった瀬長への米軍の陰湿な弾圧は終わらなかった。まず、人口急増する那覇市が計画していた給水増水事業をストップし、続いて那覇市への補助金を凍結した。瀬長支持への懲罰というべきこの仕打ちに対して、那覇市民は自主納税運動を展開し、97%という驚異的な納税率を達成して、市の事業費を支えた。赤狩りの狂気が蔓延したこの時代、「アカ」と見なされることはすなわち、自由主義の敵としてラベリングされ、相当な社会的不利益を被ることであり、時に生命の危機さえ伴うことだった。共産主義者をあぶり出すため、米軍のスパイとなった沖縄人が暗躍した闇の時代のさなかで、それでもか弱き沖縄の民衆が瀬長を支持したのはなぜか。それは、民衆の心に、イデオロギーの対立などを超越した、「正義」への希求が激しく息づいていたからだと言えよう。瀬長がアカかどうかなど問題ではなかった。人々が求めていたのは、民衆とともに生きる政治家だったからだ。

「赤い市長」誕生から1年後、米軍は選挙法を改悪して瀬長から被選挙権を剥奪し、過去の有罪判決を名目に那覇市長の座から追放した。これが、沖縄を「民主主義のショーウィンドウ」にすると豪語するアメリカの所業だった。追放された瀬長は「私は勝ちました。アメリカは敗けました。第二、第三のセナガを出そう。それが米軍と買弁勢力に対するこよなきプレゼントになる」と10万人の大群衆に語りかけた。

「不屈」とは、苦難に負けず意志を貫くことを意味する。瀬長が好んだこの言葉を冠する資料館は、瀬長の娘である内村館長が私財を投じて2013年に開館した。瀬長に関する資料や展示を公的機関に委ねないのは、民衆政治家・瀬長の衣鉢を継ぐことでもあるだろう。思わぬ病禍によって存続の危機に立った館を、今も民衆の支援が支えている。それはまるで、米軍の弾圧で財政危機に陥った瀬長の那覇市政を、市民たちが納税によって支えた過去の再来のようにも思える。非民主的な権力に対する不屈と不服従を貫いた瀬長の精神の系譜に連なろうとする民衆が、今も存在する。

瀬長と民衆の共闘を記録したアーカイブを展示する不屈館には、画家たちの描いた瀬長の肖像も配置されている。これらの作品は、芸術を理解し美術家たちを陰に陽に支えた瀬長に対する返礼だが、自由と連帯を求め続けた瀬長の精神そのものが芸術的で、その面差しが画家たちをインスパイアしたであろうことも想像に難くない。瀬長がこの世を去って19年の歳月が流れたが、安倍政権に続いて生まれた、さらに陰湿な菅政権のもとで、日本という国の民主主義は危機に瀕しており、沖縄の軍事化に抵抗する民衆の闘いはまだまだ終わらない。ともすれば絶望に逃避したくなる苦い現実にあって、闘争の歴史を共有の記憶に再生する空間としての資料館の存在意義はますます大きい。この空間で、生計を支えるために営んでいた雑貨店の店番をする瀬長の面影、そして銅像ではなく(瀬長に銅像は似合わないだろう)、小さなフィギュアの形で微笑む瀬長に触れながら、私たちは弱き者の「不屈」の力を取り戻すのだ。

図版1. 不屈館の入口
図版2. 展示室でのトーク・イベント
図版3. 瀬長の書斎を再現
図版4. 内村館長。沖縄の染色技法「紅型」を用いた瀬長の肖像画とともに。
図版5. 9は日本国憲法9条の意。


The Indomitable: The Portraits of a Politician Loved by the Okinawan People.
Kazumi Tomiyama
 
In the midst of COVID19, doors of many museums, galleries and archives remain closed. Mobility has been restricted, and the days when it was easy to visit an exhibition hall while traveling are long gone. The collections held by each institution are irreplaceable, and the presentation of the exhibitions allows us to learn a lot, to be inspired, to share memories, to relive the past, and to gain the courage to envision the future. However, it is not uncommon to hear news of a museum being forced to close down as business continues to get tougher and tougher for exhibition facilities that have seen a dramatic drop in visitors. The loss of such a space is really sad and unbearable.

“Fukutsu-kan”, a private museum in Naha City, Okinawa, also faced such a crisis. In the three months leading up to the end of September, the museum is on track to reach its goal of 8 million yen, and direct donations in addition to the crowd-funding campaign have helped the museum achieve its unexpected success. This support gives the small museum the courage to continue operating. “We are happy that the people are supporting this important place where the history of the Okinawan people's struggle can be studied," said UCHIMURA Chihiro, director of the museum.

“Fukutsu-kan" is a museum that tells the history of SENAGA Kamejiro (1907-2001), a politician who devoted his life to the freedom of the Okinawan people. Born on the Okinawa island in 1907, Senaga was a charismatic and humane politician who was loved by his people for his integrity and charisma in confronting the powerful Japanese and U.S. governments that were running roughshod over Okinawa. Senaga became to aim for socialism in his youth when he was educated on the Japanese mainland. He was expelled from school for his involvement in the socialistic movement, but he remained committed to the labor and peace movements, and in 1932 he was sentenced to three years in prison under the Security Law of the Empire of Japan. After his release from prison, he worked as a newspaper reporter in Okinawa and advocated for freedom of speech even during the U.S. military occupation, and in 1947 he became a founding member of the Okinawa People's Party and began his political career, inspiring the people who were suffering from the oppression of U.S. Military Government by calling for the establishment of democracy. Senaga was a master of spirited and humorous speeches, and his street speeches enthused the people who had gathered there.

In 1952, Senaga was elected with the most votes in the Legislature, the legislative body of the Ryukyu government established by the U.S. military during the occupation of Okinawa in the name of self-government. The U.S. military was at the time strengthening the island of Okinawa as an anti-communist bastion in Asia and a bulwark in the Pacific, and intensified its oppression of the Okinawan People's Party as a "vector of a fearful disease called Communism" and arrested about 40 members of the People's Party in 1954. After being tried by a military court, Senaga again spent two years in prison. To the U.S., Senaga was a hardcore "RED".

However, this repression rather secretly cultivated popular support for Senaga. In December 1956, shortly after his release from prison, voters gave Senaga a victory in the mayoral election held in the Okinawan capital city Naha. The U.S. military devoted itself to negative campaigning in support of the opposing candidate, but to no avail. The U.S. media gave extensive coverage to the "red mayor," who was born on a small island in the far east of the country U.S. was occupying.

The U.S. military's insidious suppression of Senaga, who became mayor, did not end. First, U.S.  halted a water supply increase project planned for the rapidly growing city of Naha, and then they froze the subsidies to the city. In response to this punishment for their support of Senaga, Naha citizens launched a campaign to pay their own taxes, achieving a staggering 97% tax payment rate to support the city's operating expenses. In this era of the madness of Communist Purge, to be labeled an "RED" was to be labeled as an enemy of liberalism and to suffer considerable social disadvantage, sometimes even the threat of death. In the midst of the dark days when Okinawans who spied for the U.S. military worked in secret to expose the communists, why did the feeble Okinawan people still support Senaga? It can be said that the people's hope for "justice" that transcends ideological conflicts was strong in their minds. Whether or not Senaga was a "RED" didn't matter. What the people wanted was a politician who could live with the people.

A year after the birth of the "Red Mayor," the U.S. military revised the election law to strip Senaga of his voting rights and removed him from his position as mayor of Naha, citing his past convictions as an excuse. This was the act of the U.S., which proclaimed that they would turn Okinawa into a "show window for democracy”. After being ousted, Senaga said, "I won. The US has lost. Let's expect a second and third Senaga. That will be a great gift to the U.S. military and the bailout forces," he told the crowd of 100,000 in the rally.

The word " Indomitable " means to persevere in the face of hardship. The museum, which bears Senaga's favorite word, was opened in 2013 with private funds from Senaga's daughter Uchimura, the director of the museum. The museum's decision not to entrust the Senaga materials and exhibits to a public institution may be a continuation of taking on his mantle of the popular politician, Senaga. The support of the people still encourages the museum, which was was in danger of its survival due to an unexpected pandemic. It seems as if this is a replay of the past, when the citizens of Naha supported the municipal government of Senaga, which was plunged into a financial crisis due to the oppression of the US military, by paying taxes. There are people who are still trying to follow the lineage of Senaga's spirit of indomitability and disobedience to undemocratic authority.

Portraits of Senaga by artists are also displayed in the Fukutsu-kan, an archive that records of the struggle of Senaga and the people. These works are a tribute to Senaga's attainments of art and his cheerful support of artists, at the same time, Senaga's spirit which continued to seek freedom and solidarity, was so artistic that it's not hard to imagine that his face inspired the artists. 19 years have passed since Senaga's death, but under the more insidious Suga administration that followed the Abe administration, Japan's democracy is on the verge of a crisis, and the people's struggle to resist the militarization of Okinawa is far from over. In this bitter reality, where one might be tempted to escape into despair, the significance of the museum as a space to recreate the history of the struggle into a shared memory is ever greater. In this space, we regain the indomitability of the weak by seeing the face of Senaga, who looked after the general store he ran to make living of his family, and by touching him who smiled in the form of a small figure, not a statue (the statue would not suit Senaga).

Image 1. Entrance to the Fukutsu-Kan.
Image 2. Talk Event held at Exhibition Room.
Image 3. Reproduction of Senaga’s study.
Image 4. Director Uchimura. Along with Senaga's portrait using the Okinawan dyeing technique 'Bin Gata.'
Photo 5. 9 means Article 9 of the Constitution of Japan.


不屈―沖繩民眾喜愛的政治家肖像
豐見山和美

在COVID19期間,許多博物館,美術館和檔案館的大門仍然關閉。人們出遊持續受到限制,旅行時輕鬆參觀展覽的日子早已一去不復返。每個機構所擁有的藏品都是不可替代的,我們從展覽的展示中汲取了很多東西,可以得到啟發,分享記憶,重溫過去,並獲得了描繪未來的勇氣。然而,聽到博物館被迫關閉的消息並不少見,因為參觀人數急劇下降的展覽設施的管理繼續變得越來越困難。失去這樣的空間確實是痛苦和無法忍受的。

沖繩那霸市的私人博物館“ 不屈館”也面臨著同樣的危機。館長內村千尋(Chihiro Uchimura)發起募資之前,他正在考慮關閉博物館。結果直到9月底的三個月,有望實現其800萬日元的目標,除了線上募資之外,直接捐款也幫助博物館取得了意外的成功。而民眾的這些支持是保持這個小博物館運轉的勇氣來源。博物館館長內村千尋說:「我們很高興人民支持這個重要的地方,可以研究沖繩人民抗爭的歷史。」

「不屈館」這座博物館,介紹了致力於為沖繩人民自由奮鬥獻身的政治家瀬長亀次郎(1907-2001)的歷史。瀬長於1907年出生於沖繩島,是沖繩近代史上的傳奇人物,是一位具備個人魅力和人道精神的政治家,在面對日本和美國強權政府時,他的正直和超凡魅力深得人民愛戴。年輕時就在日本本島接受高等教育,從而參與了社會主義運動,因而被學校退學。但他繼續參加勞工與和平運動,並於1932年根據《日本帝國治安維持法》被判處三年徒刑。從監獄釋放後,他成為了沖繩的一家報紙記者,呼籲在美國軍事佔領期間都主張言論自由。 1947年,他成為了沖繩人民黨的創始成員,並開始了政治活動,鼓鼓了遭受美軍壓迫的居民,建立民主制度。 瀬長是一位熱情洋溢和幽默感的演講大師,他的精神感染著街頭演講中聚集的人群。

1952年,瀬長(Senaga)當選為沖繩眾議院議員,這是沖繩政府的立法機關,由駐紮在沖繩的美軍以居民自治的名義建立。當時,美軍正在加強沖繩島作為亞洲的反共要塞和太平洋的海上長城,並在1954年加強了對沖繩人民黨的鎮壓,使之成為“一種稱為共產主義的可怕疾病的調解人”。約有40名人民黨成員被捕。在被軍事法庭判決後,瀬長再次入獄兩年。對於美國來說,瀬長是一個頑固的「赤色份子」。

但是,這次鎮壓在相當程度上暗中為瀬長贏得了公眾支持。 1956年12月,在沖繩首府那霸舉行的市長選舉中,選民的支持讓被釋放監獄後不久的瀬長贏得了大選。美軍採用消極運動來對抗其對手的支持,但沒有奏效。美國媒體廣泛報導了這位「赤色市長」,他出生在他所佔領的遠東一個小島上。

對市長瀬長的陰謀壓力並未結束。首先,美國停止人口迅速增加的那霸市計劃的供水增加計畫,然後凍結對那霸市的補貼。為了響應對支持瀬長的懲罰,那霸市民發起了一項自願性納稅活動,並實現了驚人的97%納稅率,支持了該市的營運開支。在這個對紅色狩獵瘋狂的時代,被認為是“赤色”的敵人稱為“赤色”,遭受了巨大的社會劣勢,有時甚至遭受死亡威脅。在黑暗時期,當成為美軍間諜的沖繩人秘密工作曝露共產主義者時,為什麼那些渺小弱勢的沖繩人仍然支持瀬長?可以說,超越思想衝突與對「正義」的渴望在人民心中依舊強烈。 瀬長是否是“ 赤色份子”都無關緊要,人們正在尋找與人民同再一起的政治家。

“赤色市長”選出一年後,美國軍方修改了選舉法,剝奪了瀬長的當選權,並將其從那霸市長的職位上除名。這是美國的工作,吹噓沖繩將成為“民主的展示窗口”。瀬長被罷免後說:「我贏了,美國輸了。」。讓我們期待第二和第三個瀬長。這將是對美軍和救援部隊的最好禮物,」他在集會上這樣告訴10萬人的群眾。

“不屈”是指在艱辛中堅毅的生存,堅守意志。 瀬長所喜歡的帶有這個詞的博物館於2013年由瀬長的女兒內村千尋(Chihiro Uchimura)以她的私人資金開設。不將與瀬長相關的材料和展覽委託給公共機構,是受歡迎的政治家瀬長的衣缽的繼承。人民的支持仍然支持這座豪宅,由於非預期的疫情,這座豪宅有經營的危機。市民似乎通過繳稅來支持那霸市的那霸市政府,後者由於美軍的鎮壓而陷入了財務危機。仍然有一些人試圖加入瀬長精神的傳承,這種精神對非民主權威政權是頑強不屈的抵抗。

在不屈館中,還展示了一個檔案庫,這些檔案記錄了瀬長和人民的奮鬥歷程,藝術家們還創作了瀬長的肖像,這是對瀬長的信念傳承和對他的致敬。瀬長繼續追求自由與團結的精神是藝術性的,他的面孔持續激發畫家的靈感。不難想像。 瀬長逝世已有19年了,但是在安倍(Abe)政府之後更陰險的須賀政府統治下,日本的民主制度處於危險之中,人民抵抗沖繩軍事化的抗爭還沒有結束。在這樣一個痛苦的現實中,人們可能會陷入絕望,博物館作為將抗爭的歷史重現為共同記憶的空間的意義越來越重要。在這個空間中,我們看到了瀬長的重拾弱者的頑強形象,瀬長是一家正在運營以維持生計的雜貨店的店主,還有瀬長的形象,以小人物而不是青銅雕像的形式微笑(銅像不適合瀬長),重拾弱者的「不趨」的堅毅力量。

圖1. 不屈館的入口
圖2. 展覽講座活
圖3. 瀬長書房的再現
圖4. 內村館長與使用沖繩染技術「紅型」所製作的瀬長肖像。
圖5. 9是指日本憲法第9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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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뾱 2020-10-06 20:39:12
아 설마 세나가지마가 이 분 성함을 딴 건가요?
22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