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특별재심도 ‘시간과의 싸움’
4.3특별재심도 ‘시간과의 싸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리시선] 행안부 태도 변화 주목…그러나 성큼 더 나아가야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처음 만나 어색해 할 법 한데도, 동향의 취재진을 반갑게 맞아주며 구슬프게 <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르던 할머니의 소원 한 가지는 이뤄졌다. 고향 제주의 4.3평화공원에 한번 가보는 게 할머니의 꿈이었다.

[제주의소리]가 창간 15주년 특집으로 기획한 ‘생존수형인 4.3을 말하다’ 인터뷰를 위해 경기도 안양에 사는 할머니를 찾아간 게 지난해 3월 중순, 할머니가 4.3공원을 방문한 건 그해 4월3일이다. 보도 덕분인지 할머니에게 초청장이 날아든 것이다. 

4.3생존수형인이었던 변연옥 할머니(95). 그로부터 2년여가 흐른 지금은 그를 수식하는 단어에서 ‘생존’을 빼야 한다.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얘기다. 7월20일 영면에 들었다.

70년 가까이 숨죽여 살았던 할머니는 가는 길도 쓸쓸했다. 난데없이 닥친 코로나 19로 인해 가족끼리만 조용히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처지의 생존수형인들도 뒤늦게 부고를 접했다.  

기구한 삶이었다. 4.3의 광풍이 몰아친 1948년 10월, 평소 알고 지내던 언니를 무심코 따라 나선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군경의 초토화작전을 피해 다들 산 속으로 숨어들던 시기였다. 

장티푸스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던 할머니가 이듬해 봄 마을로 내려왔을 때 그를 맞이한 건 경찰이었다. 고문 끝에 경찰은 그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해를 넘겨 가까스로 풀려났으나 다시 경찰이 들이닥쳤다. 이번엔 불법적인 군사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주형무소에 갇혔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와중에 전쟁이 터졌다. 형무소 문이 열렸다. 무리를 따라 곳곳을 전전하다 남편을 만나 경기도에 정착했다. 딸 셋을 낳았다. 이 때부터 할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딸들도 마찬가지. 할머니 가족에게 4.3은 일종의 금기어였다. 

ⓒ제주의소리
올해 제72주년 제주4.3 추념식에 참석해 추도사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지난 7월 별세한 故 변연옥 할머니. ⓒ제주의소리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4.3추념식장을 찾아 희생자들에게 공식 사과하자 마침내 할머니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겐 더 큰 소원이 있었다. 명예회복. 곧 ‘전과자’라는 주홍글씨를 지워내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눈을 감기 전까지도 자신이 뭔 죄를 저질렀는지 몰랐다. 할머니를 비롯해 4.3생존수형인 8명은 지난해 10월22일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올해 10월8일 재심 개시 결정이 났다. 전례를 보면, 이렇다할 변수가 없는 한 ‘사실상 무죄’에 해당하는 공소 기각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몇 달만 더 버텼어도 할머니는 소원에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백을 바라보는 할머니에겐 그 시간도 여삼추(如三秋) 같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1, 2차 재심 청구인 중 벌써 6명이 생을 마감했다. 올 2월에는, 문 대통령이 4.3추념식에서 ‘안타까운 사례’로 거명한 송석진 할아버지가 94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4.3특별법 개정안에 군사재판의 무효화 조항이 담긴 것은 이런 사정이 반영됐다. 고령의 4.3수형인들에겐 일분일초가 아깝기 때문이었다.

정작 행정안전부는 난색을 표명했다. 사법부 권한 침해를 우려했다. 지금처럼 개개인이 형사소송법에 따른 재심 제도를 활용하면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당사자들은 땅을 칠 노릇이었다. 

“부당하게 희생당한 국민에 대한 구제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본질적 문제입니다”(올해 문 대통령의 4.3추도사) 행안부의 입장은 사실상 문 대통령의 뜻까지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랬던 행안부가 최근 태도 변화 조짐을 보였다. 지난 7일 국정감사에서 진영 장관이 수형인들에 대한 명예회복 방안으로 ‘특별 재심’ 카드를 들고나왔다. 당시 재판 모두를 무효화하기는 어렵지만, 여러가지 방안을 유연하게 검토해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검사 또는 4.3위원회를 통한 일괄 재심 청구 방안을 거론했다. 

하긴 세상이 많이 달라지긴 했다. 지난 13일에는 제주법원장이 4.3재심을 서두르겠다고 공언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행안부의 카드가 수형인들의 눈물을 닦아줄 근본 처방이 될지는 의문이다. 일각에선 특별 재심이든 일반 재심이든 재심은 재심이지 않느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결국 그만큼 또 지체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비현실적인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있다. 

아무래도 4.3특별법 전면 개정을 통한 군사재판 무효화와는 비교할 바 못된다. 다만, 행안부가 다소나마 태도를 누그러뜨린 것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일단 마음을 열어놓는 게 중요하다. 한가지 곁들이자면, 행안부가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진정한 신원(伸冤)을 위해 성큼 더 나아가야 한다. 국가 폭력의 희생자인 수형인들의 절박한 마음을 십분 헤아렸으면 한다. 행안부의 이후 행보를 지켜보겠다. 

정말이지 수형인들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들의 애끓는 사연을 더 이상 전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0 / 400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