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웃음에 진한 슬픔 곁들인 '짬뽕'
유쾌한 웃음에 진한 슬픔 곁들인 '짬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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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문화놀이터 도채비 연극 ‘짬뽕’
ⓒ제주의소리
연극 '짬뽕'에 출연한 문화놀이터 도채비의 배우, 제작진들. 맨 오른쪽 가운데가 변종수 대표. ⓒ제주의소리

[기사 수정=11월 25일 오후 12시 50분]

탐라 제주섬 깊이 4.3이 새겨져 있다면, 빛고을 광주에는 5.18이 있다. 두 역사는 시대, 배경에서 차이가 있지만 공권력의 폐해, 무고한 민간인 피해, 길고 긴 왜곡과 기억투쟁 등 여러 면에서 분명한 교집합도 가진다.

광주5.18민주화운동을 웃음으로 만나는 연극이 제주에서 열렸다. 극단 ‘문화놀이터 도채비’의 ‘짬뽕’이다. 

2004년 윤정환 작가가 쓴 짬뽕은 그해 극단 ‘산’ 초연 이후 거의 매해 전국에서 공연을 이어가는 스테디셀러다. 안타깝게 올해 8월 서울 공연은 출연진 일부가 코로나19에 감염돼 취소됐는데, 바다 건너 문화놀이터 도채비가 원작자의 승인을 받아 자체 제작했다.

작품은 짬뽕 때문에 5.18이 벌어졌다는 아리송한 상상을 들고 온다. 배달 나간 짬뽕을 배고픈 군인들이 무단 탈취하는 과정에서 군인 한 명이 철가방에 부상을 입는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 5월 18일 신군부의 계엄령 전국 확대 소식이 들려오자 배달부를 포함한 중화요리집 ‘춘래원’ 식구들은 그날 벌어진 짬뽕 충돌로 계엄령이 내려졌다고 오해를 하기에 이른다.

춘래원 사장 신작로(배우 변종수), 신작로의 친동생 신지나(차지혜), 배달부 겸 보조 백만식(진두선)은 가진 것 없어도 작은 희망을 꿈꾸는 평범한 서민들이다. 신작로는 인근 다방 종업원 오미란(김미경)과의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동시에 동생의 불편한 다리도 치료해주기 위해 쉴 틈 없이 밀가루 반죽을 두들겼다. 백만식은 비록 부모 없이 홀로 살아가지만, 고고장에서 끼를 뽐내며 언젠가 ‘인생 역전’을 노리겠다는 배포를 가지고 있다. 신지나는 늘 티격태격하는 두 남자를 진정시키는 인물로, 만식 오빠가 약속한 서울 나들이를 마음속에 품고 있다. 

이런 그들에게 5.18은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관망하지만, 위협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불안은 더욱 커진다. 동시에 등장인물들이 대응하는 자세 역시 달라진다.

가장 적극적인 인물은 백만식이다. 자신이 휘두른 철가방이 역사의 나비효과가 됐다는 책임감을 내내 떨쳐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오미란까지 군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자, 군인에게 빼앗은 총을 들고 전남도청으로 달려간다. 백만식을 좋아해온 신지나 역시 따라간다. 소총을 매고 뛰쳐나가는 백만식에게서는 공수부대의 비이성적 폭거에 목숨을 걸고 모인 시민군이 떠오른다. 신지나는 시민군을 위해 밥을 지어 나눠준 용기 있는 광주 여성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신작로는 ‘쫌팽이’라는 별명 답게 군인과 충돌하고 온 백만식을 향해 “그냥 가만히 있어”라고 충고한다. 계엄령에 따른 혼란스러운 시국에서도 “학생과 경찰 간의 일”이라며 “지 할 일만 잘하면 돼”라고 한 발짝 물러나 있다. 하지만 연인 오미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두 동생마저 도청으로 향하자, 그는 홀로 남아 춘래원을 한동안 둘러보고 밖으로 달려 나간다. 신작로의 초조한 눈빛을 지켜보며 관객들은 그날 이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례없이 평등하고 상식적인 ‘대동세상’을 보여준 5월 광주처럼 신작로, 신지나, 백만식, 오미란 네 사람의 소풍은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 소풍이 됐다. 

연극 짬뽕은 핏빛 폭력 앞에 소시민들이 대응하는 모습을 통해, 5.18이 일상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역사임을 보여준다. 소소한 언어유희, 과장스런 몸동작이 유발하는 웃음코드가 곳곳에 자리잡기에 관객의 슬픔은 짙은 여운과 함께 한다. 

“150만원만 있으면 우리 꿈이 이뤄지는 것인데, 천만 원이 넘었는데도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어있다”는 유일한 생존자 신작로의 통곡. “보상을 받는다고, 유공자가 된다고 가슴 속의 못이 뽑히겠냐”는 광주 극단 ‘놀이패 신명’의 대표작 ‘언젠가 봄날에’ 속 대사와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5.18뿐만 아니라 4.3까지 관통하는 정서,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비통함이 아닐까.  

5.18은 대한민국 언론계의 대표 ‘흑역사’로 손꼽힌다. 군인들의 총칼에 사람들이 쓰러져도 신문, TV, 라디오에서는 ‘폭도’, ‘간첩’을 앵무새처럼 이야기했다. 결국 시민들 손에 방송국이 불탔고, 몇몇 양심있는 기자들은 펜을 내려놨다. 작품에서는 광주 현장을 고발하는 앵커가 돌연 사라지고 ‘땡전 뉴스’처럼 돌변한 장면을 통해 부끄러운 한국 언론을 다시 한 번 꼬집는다.

작품은 배우들의 광주 사투리 대사부터 고유 지명 등에 있어 1950년 5월 광주라는 원작 시대 배경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다만, 출연진의 무대 경험은 제법 차이가 나기에 한 눈에 봐도 연기의 농도는 다르다. 연기 도중에 갑자기 제주어 사투리가 튀어나오며, 군인 총기가 M16이 아닌 고증을 무시한 K2와 M4로 등장하고, 매끄럽지 못한 조명-암전과 총소리 효과음 등 완성도에 있어 여러 아쉬움이 든 이유도 흡사 '시민 극단' 같은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짬뽕 원작이 내포한 메시지를 느끼기에 크게 어렵지 않다. 지극히 개인 판단이지만 안정적으로 극의 중심을 잡아준 차지혜 배우의 힘이 컸다.

문화놀이터 도채비는 2018년 창단한 극단이다. 그해 11월 ‘의문의 사나이’를 시작으로 연기 토크 콘서트, 마임 발표회, 강좌 등을 거치면서 짬뽕 한 그릇을 관객들에게 대접했다. 마치 배우 한 길을 고단하게 걸어온 변종수 대표의 지난 발걸음과 같다. 내년에도 계속 좋은 작품으로 관객과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짬뽕은 검증된 원작에 풋풋한 노장 신인들의 연기와 탄탄한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졌다. 변종수 대표는 12월 6일까지 남은 일정을 지나며 더 짜임새 있는 무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연 날짜 시간은 매주 토·일요일, 오후 3시와 6시다. 관람료는 전화 예약시 1만원, 현장 구매 시 2만원이다. 

문화놀이터 도채비 소극장
제주시 동광로 12길 6길 지하
064-751-5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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