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참패한 픽션, 픽션을 제압한 현실
현실에 참패한 픽션, 픽션을 제압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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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世通, 제주 읽기] 184. 남정현, ‘남정현 대표 소설선집’, 실천문학사, 2004.
남정현, ‘남정현 대표 소설선집’, 실천문학사, 2004. 출처=교보문고. 

1.
한국현대문학사, 아니 한국현대사의 증언자 한 분이 지난 주 세상을 떠났다. ‘분지(糞地) 필화사건’(1965)의 당사자인 작가 남정현(1933~2020)이 눈을 감았다. 아마도 21세기의 대중에게 남정현과 그의 문제작 단편 ‘분지(糞地)’(1965)는 낯설지 모른다. 이 필화사건 때문인지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작품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화사건 자체가 말해주듯 남정현의 문제의식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이것은 동시대의 소설이 담당해야 할 문학적 실천과 그 소명을 상기시키고 있는바, 소설의 존재 가치가 점차 가벼워지고 있는 문화산업 시대에 한국소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2. 
남정현의 타개 소식을 들은 후 책꽂이에 꽂혀 있는 ‘남정현 대표 소설선집’을 들춰본다. 이 선집에는 ‘분지’를 비롯하여 그의 소설세계를 살필 수 있는 대표 작품들이 추려져 있다. 돌이켜보면, ‘분지’를 얼마나 자주 읽었는지 모른다. 국어국문학과 학부 시절부터 대학원을 거쳐 비평가로 데뷔한 이후 이러저러한 자리에서 ‘분지’를 놓고 문학 토론을 치열히 하곤 했다. 무엇보다 ‘분지’의 줄거리 핵심은 간단하되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작가의 문제의식에 대한 토론이 간단하지 않다.

‘분지’는 작가의 동시대에 대한 풍자적 서사가 골격을 이룬다. 그러면서 만화적 상상력이 바탕을 이룬다. 작중인물 만수는 “홍길동의 제10대손이며 동시에 단군의 후손”(187쪽)으로서 미군의 아내를 향미산에서 겁탈하였는데, 미국 정부는 만수가 있는 향미산을 핵무기로 공격하여 만수와 향미산을 지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리고자 한다. 사실, 만수가 이 같은 죄를 짓게 된 데에는, 해방공간에서 미군에게 겁탈을 당한 어머니가 그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게되고 여동생마저 미군의 첩으로 전락하여 생존을 연명해가더니, 이러한 여동생의 삶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만수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와 자기부정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만수의 범죄에 대한 처벌로서 미국이 핵공격을 선택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의 만수를 향한 핵공격 결정에 대해 한국의 위정자들은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눈엣가시를 제거하는 것으로만 판단한다. 핵공격에 의해 조국의 강토가 심각히 훼손되더라도 위정자들은 미국의 핵우산 속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이 보호되면 그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인식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위정자들의 태도는 연작 ‘허허 선생’ 중 ‘핵반응: 허허선생 6’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할 것은, 미국의 핵공격으로 소멸한 그 자리에 경제성장제일주의의 상징인 고층 빌딩이 들어섬으로써 근대화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다는 박정희식 근대화의 허상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풍자다. 왜냐하면 만수의 어머니 유택(幽宅) 역시 근대화 프로젝트에 의해 도시미관 정비와 경제 성장으로 없어진 마당에, 향미산을 핵공격으로 순식간에 없애는 것은, 전 국토의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점에서 위정자들에게 고무적인 일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만수의 통렬한 비판을 들어보자.

자, 보십시오.
도시의 미관과 경제의 성장을 위해서 이십여 년이나 당신이 누워계시던 자리엔 지금 빌딩이 하늘을 향하여 요란스럽게 빛을 던지고 있답니다. 다시 말하면 요정이, 은행이, 호텔이, 그리고 외인 상사가 당신의 유택을 강점하여 도시의 미관이란 미명하에 빌딩이란 이름으로 둔갑을 하고 있는 거죠. (중략)

하지만 저렇게 풍부한 빌딩의 밀림 속에서도 저와 같은 비천한 백성이 마음놓고 출입할 수 있는 단 한 짝의 문과, 기진한 몸을 풀기 위하여 잠시 휴식할 수 있는 단 한 평의 면적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중략)

좌우간 이승에 뿌리박은, 아니 내 조국 대한민국에 자리잡은 그 빌딩이란 이름의 호화스런 인간의 거처는 말입니다. 기이하게도 항시 이방인과 몇몇 고관과 그리고 그들의 단짝들만을 위해서 문호를 환히 개방하고 있을 뿐,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흔들어도 열리지 않는 깊은 유택이며 동시에 높은 신전(神殿)이었습니다. (중략) 영롱한 빛으로 장식된 빌딩의 저 깊은 밀실에서는 오늘도 우리들을 이 이상 더 못살게 하기 위한 무슨 가공할 음모가 기필코 꾸며지고 있을 성싶은 그런 일종의 피해의식이 번번이 저의 뒤통수를 억압하는 탓이라고나 할까요. (205~206쪽)

만수는 빌딩으로 상징되는 근대화의 구조물이 얼마나 근대화의 허상에 불과한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통찰하고 있다. 마천루로 상징되는 고층 빌딩이 도시의 문명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지만, 세련되고 화려한 고층 빌딩의 문명 감각은 인간을 삶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도시인으로서 고층 빌딩으로 현현되는 문명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주체화하지 않는 한, 빌딩의 구조물이 들어서고 있는 현실에서 인간은 도시의 타자로서 관리될 따름이다. 그러한 도시는 삶의 활력이 넘치는 곳이 아니며, 비루한 삶을 유지해야 하는, 그래서 치욕스럽게 목숨을 부지하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유택’이나 다를 바 없다. 작가 남정현은 박정희식 개발독재로 추진되고 있는 근대화의 맹점을 이처럼 매우 음울하게 진단한다.

이렇듯이 ‘분지’는 미국에 대한 자주적 역사 인식을 작가 특유의 풍자적 태도와 만화적 상상력에 의해 서사화하고 있되, 정작 작가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한 몰가치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위정자와 그 근대화의 맹점에 대한 냉철한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3.
여기서, ‘분지’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부주전상서’(1964)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보인다. ‘부주전상서’도 작가의 풍자적 태도가 중심 서사를 이룬다. 이 작품은 발표 시기에서 알 수 있듯, 5.16군사쿠데타(1961) 이후 반민주주의적 폭정에 대한 작가의 예각적 문제의식이 드러나 있다. 작가의 이 비판적 시각은 작품이 발표된 시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4.19혁명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한국의 낙후한 정치현실과, 특히 정치군인 및 이에 동조하는 위정자들의 폭정의 바탕에는 “해방 이후 십수 년간의 그 악마적인 실정(失政)”(274쪽)이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또렷이 인식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작중인물 용달을, 이처럼 비정상적 정치사회 현실과 동일성을 띤 자기파괴적 인물로 풍자한다. 가령, 용달이 자신의 아내가 정부의 가족계획에 따라 피임 시술한 것을 폭력으로써 아내의 육체를 무참히 짓밟아 결국 아내를 죽이게 되는데, 작가는 용달이 보인 반인간적 자기파괴에 대한 비판적 풍자를 통해 동시대의 폭정을 동시에 겨냥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작중에서 아버지에게 보낸 서신 중 다음과 같은 부분은 그 당시 작가가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는, 그리고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반인간적 반민주주의적 현실에 대한 증언이다.

현실에 참패한 픽션.
픽션을 제압한 현실.
이것이 곧 카오스의 세계요. 또한 이 땅의 생생한 리얼리즘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 소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는 이젠 분명히 현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로 대치되어버린 그러한 토지 위에서 우리들은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255쪽)

작가 남정현의 문제의식은 이렇듯이 동시대의 현실에 대한 매서운 비판적 성찰을 바탕으로 한다. 풍자적 태도와 만화적 상상력은 남정현의 비판적 성찰을 보증해주는 남정현식 리얼리즘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남정현 대표 소설선집’의 책머리에서, “나는 사실 그동안 소설을 썼다기보다는 어찌 보면 소설을 빙자하여 뭔가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그 갖가지 울분을 조금씩 토해내기 위해 내 이 만만한 펜대 하나만을 붙잡고 만날 캑캑하며 사뭇 몸부림을 친 격이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 같다.”고 한바, 갈수록 동시대를 향한 분노의 서사가 사그라들고 순치되고 있는 작금의 한국소설계에 죽비를 내리친다고 느끼면 나 혼자만의 과민반응일까. 

코로나19의 현실에서, 작가 남정현의 문제의식이 또 다른 비판적 성찰의 이명(耳鳴)으로 다가온다.

▷고명철 교수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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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호 2020-12-28 08:52:35
분지 ,글이 무게감을 잘분석 했습니다. 고교수님.
2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