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 제주와 소]  우리 민속과 제주 속담·풍습에 등장하는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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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흰소' 작품.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음력 새해가 밝았다. 올해 2021년은 신축년(辛丑年)으로 백색을 뜻하는 신(辛)과 소를 의미하는 축(丑)이 만나 ‘하얀 소의 해’로 불린다. 

소는 예로부터 인간 문명과 끈끈한 인연을 지니고 있다. 기원전 1만500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동굴 벽화’에도 소의 늠름한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고대 문명 시기 때는 소를 가축화하면서 농작물을 일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한반도에 소가 들어온 시기는 기원전 1800~2000년이다. 옛 문헌에는 선조들이 소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나와있다. 주술적인 목적으로 소를 사육하기도 했지만, 주된 목적은 교통·운반, 그리고 농사 수단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삼국사기에는 신라 전기인 3~4세기 때에 비로소 소로 논밭을 갈기 시작했다고 기록돼 있다. 기록상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보다 먼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한다. 

인력에서 축력으로 농업기술이 진화하면서 생산성은 크게 향상됐다. 그 중심에 바로 소가 있었다. 여기에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식용, 공업용, 약용, 미술품 등에 쓰이니 그야말로 버릴 것 없는 보물덩어리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나 기계화로 인해 소의 자리는 농기계들이 대신했고, 상당수 현대인에게 소는 식용으로 취급된다.
 
# 제주 역사에서의 소

1차산업 부문 제주도 문화상 수상자 장덕지 국립축산과학원 현장명예연구관과 최미경 연구자가 지난해 펴낸 ‘제주 목축 역사 문화’에는 제주 소의 역사와 활용이 잘 정리돼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제주도(주호, 州胡)에 소와 돼지를 사육하며 배를 타고 중국과 한반도와 교역했다는 내용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서기 250년대)에 실려 있다. 이미 기원 직후부터 제주사람들이 소나 돼지 같은 가축 기르기를 즐겨했고 당시 배를 타고 멀리 한나라와도 교역을 했다는 것이다.

이후 고려 충렬왕 2년(1276), 원나라에서 소를 포함한 가축을 들여와 사육했는데, 이때 소는 제주 재래소와 교잡해 황소·거문소·식소·얼룩소 등 모색이 다른 소들을 제주도 산야에서 방목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인데 숙종 12년(1430), 제주도에 기르는 말과 소 2890마리가 얼어 죽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영조 26년(1750)에는 흑우장을 가파도에 설치하고 50마리를 방목해 진상에 대비했다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주 소를 관리했다고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제주 소는 아주 검다 못해 푸른색처럼 보이는 흑우였다. 일명 ‘청우(靑牛)’다. 귀한 진상품 대접을 받은 제주흑우는 1938년 일본이 한우표준법을 제정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일본 소는 흑색, 한국 소는 적갈색으로 표준으로 한다는 모색통일 심사규정을 제정했고, 제주흑우 역시 고유한 지위를 상실했다. 1980년대 들어 도태 위기까지 몰렸으나 각계 각층의 노력 끝에 2013년 7월 22일 천연기념물 546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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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노령 제주흑우의 체세포를 복제해 탄생시킨 흑우.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롯데출판대상 본상 수상작, 고광민 민속학자의 명저 ‘제주 생활사’에서는 옛 서민들이 소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제주 생활사에 따르면, 쇠똥은 제주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소의 배설물을 받아 거름으로 이용하는 ‘바령’ ▲쇠똥과 돼지똥을 함께 발효시켜 사용한 ‘돗거름’ ▲건초와 지푸라기가 섞인 월동시기 쇠똥 ‘쇠거름’ ▲쇠똥에 물을 넣어 반죽해 둥글납작하게 만든 연료 ‘쇠똥떡’ 등으로 구분한다. 소의 똥 하나로 일상생활에 있어 농사, 취사, 난방까지 해결하니 소는 무척 고마운 존재다.

제주만의 소 사육 방식도 존재했다. 제주에서는 수소끼리의 싸움을 ‘찔레’라고 불렀다. 찔레는 ‘찌르다’의 명사형이다. 다른 지역은 소싸움을 보통 민속놀이의 하나로 여기지만, 제주 찔레는 소방목의 수단이었다고 한다. 소들끼리 경쟁과 싸움을 통해 수소 농우를 기르고, 대장 수소(선쇠)를 가려내 나머지 소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제주 소를 기르는 방법은 크게 원목과 유목으로 나뉘는데, 원목은 돌담을 에두르는 방목지 안에 풀어놓는 것이고, 유목은 계절에 따라 방목의 방법을 달리는 것이다. 고광민은 “제주도의 유목은 계절에 따라 주거지와 방목지를 옮겨 다니는 유목민들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제주도식의 유목”이라고 정의한다.

1950년대 제주에서 촬영한 소 모는 부자(父子). 출처=데이비드 네메스, 제주학연구센터.

# 소가 전하는 메시지

이렇게 제주도민과 가까웠던 소였기에 속담이나 설화 등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제주시 애월읍 하가마을에는 ‘쇠 죽은 못’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하가리에 혼자 살던 여인이 여름 농사를 짓기 위해 머슴을 구했다. 하지만 머슴은 일하기는커녕 게으름만 피웠고, 화가 난 여인은 직접 소를 몰아 한꺼번에 밭을 갈았다. 여인은 지쳐 헐떡이는 소를 밭 옆에 있는 못으로 데려가 물을 먹였다. 그런데 소는 급하게 마시다 체한 나머지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만다. 그 후로 못을 ‘쇠 죽은 못’으로 부른다. 소뿐만 아니라 여인 역시 급하게 물을 마시다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소가 출연하는 속담은 무척 다양하다.

말보다 소가 훨씬 큰 재산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몰석은 주어도 쉐석은 안 준다(말줄은 주어도 소줄은 안준다)’, 게으름을 꼬집고 부지런함을 강조하는 ‘쉐 잡아먹을 간세헌다(소 잡아먹을 게으름을 핀다)’, 불통을 지적하고 소통과 화합의 중요성을 빗대 설명하는 ‘쉐도 황허민 돌아산다(소도 황 하고 소리 지르면 돌아선다)’ 등을 꼽을 수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제주 풍습과 속담에 담긴 제주어의 메시지를 친절하게 풀어내는 김길웅 문학평론가는 ‘쉐 치레 말앙 촐 치레호라(소 치레 말고 꼴 치레 하라)’라는 속담으로 실속·본질을 강조한다.

1985년 7월 성산읍 난산리에서 촬영한 어미소와 송아지 모습. 밭을 갈다가 잠시 쉬고 있는 어미소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닌 송아지도 앉아서 쉬고 있는 모양이다. 출처=고광민, 제주학아카이브.

김 평론가는 “이 속담은 모양만 내다가 본질을 무시한 나머지 그게 유야무야 하고 마는 경우를 빗댄 것이다. 사람의 일도 한가지다. 긴요한 일일수록 겉모양보다는 실속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적 의미가 내포돼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다. 겉치레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마치 빈 수레와 같아서 소리만 요란한 법이다. 먹이를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소처럼. 모름지기 소 치레 말고 꼴 치레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제주 목축 역사 문화’를 보면 “소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둔다. 닥쳐올 일과 맞대응 할 준비하는 용맹한 동물”이라고 설명한다. 

코로나19라는 역병으로 모든 국민들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적어도 백신을 보급하는 올해까지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바람에 맞서는 용맹한 소처럼, 모든 제주도민과 국민들이 부디 고난에 맞서 버티는 2021년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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