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우의 제주풍토록 살펴보기] ③ 16세기 제주어, 풍속, 민정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널리 알려진 주류 역사 반대쪽에는 미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생활사, 구술사 같은 학문의 중요성이 커지는 이유도 이런 문제 인식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제주의 역사학자 김일우가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학술지 '사총' 올해 5월호에서 김정(1486~1521)이 남긴 '제주풍토록'를 재조명했다. '최초의 제주풍토지'라는 평가와 함께 오늘날 제주풍토록이 어떤 성격과 가치를 지니는지 분석한 것이다. '제주의소리'는 김일우 박사의 논문을 매주 한 차례 총 4회에 걸쳐 소개한다. / 편집자 주

조선전기 김정(金淨) 저(著)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의 수록내용 성격과 가치
(이 글은 2020년 10월 30일 사단법인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에서 주관한 '충암 김정 유배 500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주제발표했던 원고를 다시 다듬어 엮어,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학술지 '사총' 올해 5월호에도 게재됐다.)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이사장

1. 머리말

2. 수록내용의 검토

1) 제주의 자연과 산물
(1) 기후 /(2) 지형 / (3) 토산·서식 동식물 / (4) 형승

2) 제주 사람의 삶
(1) 가옥 / (2) 신앙 / (3) 제주어 / (4) 풍속 / (5) 민정

3) 김정의 유배살이와 그 처지

3. 맺음말


(3) 제주어

土人語音. 細高如針刺. 且多不可曉. 居之旣久. 自能通之. 古云兒童解蠻語者此也.

토착민들의 말소리가 가늘고 높아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과 같다. 또 알 수 없는 것이 많았으나, 사는 것이 이미 오래 되니 스스로 능히 통했다. 옛날에 이르기를, 어린애가 야만인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라 했거늘, 바로 그것이로다.

김정은 1년여를 제주에 살았다. 그간 제주어에 접한 뒤, 알아듣게 되었으나, 그 과정이 상당히 어려웠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밑줄 친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김정은 문화 다원주의적 입장과는 거리가 먼 사유체계를 지니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김정이 언급한 제주어의 특색도 후대 많은 사서에 그대로 수록될 정도로 영향이 컸다.

(4) 풍속

負而不戴. 有臼無舂. 擣衣無砧以手敲打. 冶鑪無踏以手鼓橐. 

짐은 등에 지나 머리에는 이지 않는다. 절구는 있으나 방아를 찧는 적이 없다. 옷을 두드리나 다듬잇돌이 없고손으로 포개어 두드린다., 풀무는 밟지 않는다손으로 자루를 친다..

이들 내용은 '제주풍토록'보다 앞서 나온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도 거의 그대로 나오고 있으나, 김정이 이를 보고 베낀 것은 아니라고 본다. 밑줄 친 부분이 단지 찧는 일이 없다〔舂(용): 찧다, 절구질하다 등의 뜻〕고 되어 있으나, '동국여지승람'에는 방아를 뜻함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내용은 김상헌이 '제주풍토록'에 나온 것임을 밝힌 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이들 풍속은 80여년이 지난 시기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남사록'에는 육지와 같은 방아가 들어오는 초창기 모습도 묘사되고 있기도 하다. 이로써 방아가 제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어간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5) 민정

①土人生員金良弼外. 識文者絶少. 人心鹵莽. ㈀自品官下至微者. 皆交結朝貴無人無顧佛者. 其豪右求爲鎭撫土人自星主以來. 流風已然. 不足怪也. 次者旅帥. 次者書員此以下非品官. 持印貢生皆平民等鄕吏. 日各以漁利爲事. 毫縷細故. 皆有贈賂. 不知廉義爲何事. 以強制弱. 以暴劫仁. 不下君示. 以故官員貪如陸閑. 不以爲怪. 有廉義者. 蚩珉懷其惠而此輩笑其迂. 若不敎以學文. 以開其心. 則永無移風之期. 蓋其心深喩於利. 不知其他. 有云廉善則以爲不利而深厭之矣. 若有高僧辨口. 牀以天堂地獄. 似亦不爲無助. 而㈁土之僧徒. 皆畜妻村居. 頑如木石. 若如巫鬼者嚇人餠酒. 亦利之歸耳. 

토착민 가운데 생원 김양필 외에는 글 아는 자가 매우 적다. 인심이 거칠다. 품관으로부터 말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의 지위 높은 사람과 사귀어불교를 찾지 않은 사람이 없다. 세력 있는 자는 진무토착인들은 星主(성주) 이래 풍속이 그러하니 이상하게 여기지 않음., 다음은 여사, 그 다음은 서원이것 이하는 품관이 아님. ·지인·공생모두 평민 등 향리임.이 되기를 구하여 날마다 이득만을 쫓고 털끝만한 작은 연고일지라도 모두 뇌물을 보내니 염치와 의리가 어떠한 것이지를 알지 못하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제압하고, 거칠고 사나운 자는 어진 사람을 을러대니, 군자의 가르침이 내리지 아니함이라. 그런 까닭에 관원들의 탐욕스러움이 육한_15)과 같으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청렴과 의리가 있는 자는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그 은혜를 마음에 품으나, 그러한 무리들은 물정에 어둡다고 비웃는다. 만약 학문으로서 가르쳐 그 마음을 열지 못하면 영원히 풍속 바꾸는 것을 기약치 못할 것이고 대개 그 마음이 이로움만을 매우 좋아하여 다른 것을 알지  못하여 청렴하고 정당한 것을 말하면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깊이 싫어할 것이다. 만약 高僧(고승)이 있어 말을 잘해 천당과 지옥으로 구분해 설명하면 또한 도움이 없지 않을 것 같으나 이 땅의 승려 무리들은 모두 처를 데리고 마을에 살고, 완고함이 목석과 같다. 귀신을 모시는 무당과 같은 경우는 사람을 꾸짖어 떡과 술을 바치게 하니 또한 이득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15) 육한은 조선시대 연산군・중종 때 제주 목사(牧使)로 부임했던 관인이다. 그는 1505년(연산군 11) 4월 金硉(김률)의 후임으로 왔었고 1506년(중종 1)  10월에 탐관오리로 밝혀져 파직되어 떠났다(김찬흡 편저, '제주사인명 사전', 제주문화원, 2002, 426~427쪽). 즉, 육한은 탐욕스러운 관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②漢挐及州邑地. 泉井絶少. 村民或汲水於五里則謂之近水. 或有終日一汲二汲而多鹹泉. 汲必以木桶負行㈂凡卜物多女負行. 取多汲也. 

한라산과 제주 마을 지역에는 샘물이 매우 적음으로 주민들이 혹 5리나 되는 먼 곳에서 물을 길러가나 가까운 곳에 있는 물이라 일컫는다. 혹은 하루에 한두 번 길러오나 짠맛의 샘물이 많다. 길러올 때는 반드시 나무통으로 등에 져 가는데무릇 물통은 여자가 지는 경우가 많다., 많이 길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③沙器陶器鍮鐵皆不產. 而稻絶少. 土豪貿㈃陸地而食. 力不足者食田穀. 所以淸酒絶貴. 冬夏勿論用燒酒. 牛畜則多有. 價不過三四丁. 而味不及㈃陸地者. 皆山野不食穀物故也. ㈄最可笑者. 地環巨海而鹽不產欲煮田鹽如西海則無鹽可耕以取汲. 欲煮海鹽如東海則水淡. 功百倍而所得絶少. 必貿於珍島. 海南等處. 故民間極貴. 

사기·도기·놋쇠·철은 모두 산출되지 않는다. 쌀은 매우 적음에, 토호들은 육지에서 사들여와 먹고, 힘이 달린 자는 밭곡식을 먹는다. 청주는 매우 귀함으로 겨울이나 여름을 막론하고 소주를 쓴다. 소 사육은 많이 하나, 값은 3~4정에 불과하다. 맛은 육지의 것만 못하다. 모두 산야에 길러 곡물을 먹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우스운 것은 땅이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나 소금이 나지 않은 일이다소금밭(田鹽, 전염)을 서해 지역과 같이 만들고자 하여 물을 당겨 갈아도 소금이 없고, 해염(海鹽)을 동해 지역과 같이 해 굽고자 하나 물이 싱거워 공은 백배나 들이나 얻는 것은 극히 적다.. 반드시 진도와 해남 등지에서 사들인다. 때문에 민간에서 극히 귀하다.

이들 내용은 16세기 전반 제주의 실정을 사실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사실이 후대에도 계속 이어져 나아갔다. 이는 이들 내용이 제주의 실정과 그 인식을 기록한 후대의 각종 사서에도 인용·발췌해 수록되었거나, 혹은 그 일정 부분의 전체가 실렸던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들 사서에는 제주의 실정이 변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위 ①의 ㈀ 부분은 16세기 전반 제주 사람의 성향을 일컫는 것으로 “不貴京職”(불귀경직, 서울 소재 관아의 벼슬살이)과 상통하는 내용이다. 불귀경직은 과거 제주 사람의 성향을 논의할 때 종종 원용되기도 했는데, 그 연원은 “州記(주기)”로부터 비롯했다. 1653년 이원진 편찬의 '탐라지'는 수차례에 걸쳐 “州記(주기)”의 내용을 취해 옮겨 적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不貴京職(불귀경직)”이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서울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벼슬하기가 어렵다. 제주 사람으로 재간과 물망이 있는 자는 관아에서 일보는 것을 영광으로 삼고 경직이 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이다. 곧, “不貴京職(불귀경직)”은 제주목 관아에 전해 내려온 기록을 그대로 취해 옮겨 적었던 것이라 하겠다. '탐라지'는 이 주기에 이어 출처를 밝히면서 ㈀ 부분을 전재하고 있기도 하다. ㈀ 부분은 주기의 내용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다루었던 것이다. 이는 김정이 제주 사람을 직접 접하면서 이들의 직업적 성취를 알아냈기 때문일 듯싶다.

김상헌의 '남사록'에도 출처를 밝히면서 ㈀ 부분을 옮겨놓았다. 이어 자신이 제주에 와서 보니, 상경하여 벼슬살이하기를 원하는 자가 많은 만큼, 17세기 초반에 와서는 ㈀ 부분의 얘기가 들어맞지 않다는 뉘앙스의 입장도 밝혀 놓았다. 김상헌의 경우는 제주 사람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천당 바라보는 듯했고, 이는 탐관오리로부터 당한 수탈을 알림·해결코자 했기 때문이라고도 봤다. 게다가, 제주 사람의 출륙금지는 제주 수령이 자신의 악행이 알려지는 것을 막고자 취해졌던 것이라고 했다. 이로써 제주 사람이 17세기 초반에 와서는 서울 가기를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었음이 드러나나, 이는 “불귀경직”이란 성향의 변화라기보다는 국가적 수탈의 가중화와 지방통치체계의 운영변화에 따른 것일 듯싶다. 또한 김상헌이 제주의 출륙금지 관련 해석은 객관성·타당성을 상실했다고 보인다. 김상헌 뿐만 아니고, 제주의 외관·유배인·일시적 방문자가 남긴 제주 기록물에는 객관성·타당성이 상실한 내용이 종종 엿보이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일 수도 있다.

①의 ㈁과 ②의 ㈂ 부분도 가장 이른 시기에 얘기한 것으로 제주의 풍습과 관련해 널리 회자·인용되는 사실이다.

지난 2012년 복원된 구엄 돌염전에서 지난해 한 주민이 바닷물을 염전에 뿌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 2012년 복원된 제주시 애월읍 구엄 돌염전에서 지난해 한 주민이 바닷물을 염전에 뿌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③의 ㈄ 부분은 김상헌이 주목했던 사실이기도 하다. 그는 ㈄ 부분의 내용을 접해 알게 되자, 제주에 왔을 때 여러 사람들에게 사실 여부를 물어봤음이 '남사록'에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1573년 무렵 제주 목사 강려(姜侶)가 염전을 만들어 소금 제조에 나섰으나, 소량·하품의 소금이 산출되었고, 이 무렵부터는 제주에서도 소금을 만들어 관가 전용으로만 쓰게 되었다는 사실도 밝혀 놓았다.

어쨌든, 제주 지역은 바닷가의 천연지리적 여건 때문에 염전 운영이 비효율적인 곳임은 분명하나, ㈄ 부분과 같이, “가장 우스운 것은 땅이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나 소금이 나지 않은 일이다”고 얘기할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여기에서도 김정이 문화 다원주의적 입장과는 거리가 먼 사유체계를 지니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계속)

# 김일우

제주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사단법인 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겸 이사장을 맡고 있다. 

역사연구자로 나선 후, 줄곧 지방사회와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에 따른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냈다. 특히, 1995년부터 서울에서 다시 제주에 살기 시작한 뒤로는, 제주사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국가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한편, 국가사와 제주사의 유기적 통합을 모색하는 관점의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전문적 역사연구자의 연구 성과물을 일반 대중과 공유화하는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도내 일간지에 1년간 실었던 연재물이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신서원, 2000)로 이어져 문화관광부 ‘2001년도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또한 ‘고려후기 제주·몽골의 만남과 제주사회의 변화’, ‘한국사학보15’(고려사학회, 2003)로 비롯된 연구물은 ‘제주역사 기행 제주, 몽골을 만나다’로 이어졌다. 이는 일부 개정을 거쳐 일본판 ‘韓國·濟州島と遊牧騎馬文化モンゴルを抱く濟州’(明石書店, 2015)로 출간됐다. 연구 성과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2014년 ‘연구물의 나눔’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를 개설하고 소장·이사장을 맡은 뒤, ‘증보판 화산섬, 제주문화재 탐방’(제주특별자치도, 2016) 등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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