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칼럼] 원희룡 짚어보고 훑어보기

원희룡, 그 때 그 때 달라졌다
 
“서울 성북경찰서는 15일 술에 취해 길가에 방뇨하다 이를 나무라는 주민을 집단폭행하고 인근 파츨소 기물까지 부수며 30여분동안 소란을 피운 사법연수생 박준선(27)씨 원희룡(29)씨 등 2명을 공무집행방해및폭력행의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조사 중. 경찰에 따르면 박씨와 원희룡씨는 15일 0시10분쯤 서울 성북구 정릉1동 132의 73 가게 앞 도로에서 방뇨하다 이를 나무라던 가계주인 최동철(50)씨를 주먹으로 얼굴 등을 마구 때린 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연행된 정릉1동 파출소에서 『우리 사법연수생들을 우습게 보느냐』며 전화 책상 등을 부수며 소란을 피웠다는 것.”-세계일보 1993년 9월 15일 기사. 

가난한 형편에서 학장시절을 보냈다. 부친이 과자가게, 배추장사, 농약 판매, 신발가게, 책방 등 여러 사업을 했으나 잘 안 되었다. 다만 부친이 책방을 하다 망해 집안에 쌓인 재고서적을 원 없이 읽었다. 원희룡은 서울대 법과대학에 수석입학하고, 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해, “대한민국을 위해 막스 베버와 같은 법사회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1992년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은 5등으로 수료했다. 부친은 제주중문교회를 섬긴 원로장로고 형은 예장통합 교단의 목사다. 그는 종교적 이유로 제주도에서 열리는 한라산신제 등의 집전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를 제주가 낳은 천재라고 한다. 2017년 5월 31일 제주포럼에서 “힘든 농사일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공부를 선택했다. 저는 천재라기보다는 노력 형에 가깝다. 한 분야에서 산맥을 이루려면 1만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청년들이 자신의 꿈을 찾아 시간과 관심을 집중한다면 성공한 인생이 될 수 있다.” 고 했다.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를 시작으로 여러 지검에서 근무했다. 1999년 이회창 총재의 ‘젊은 피 수혈’ 결과로 “합리적이고 개혁적 보수를 이루겠다며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2000년 총선에서 서울 양천갑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그 후 내리 3선을 한다. 한나라당 사무총장과 한나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결국 그는 대한민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에 기댔고, 비상한 두뇌를 활용해 제주도지사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좋게 말하면 선거 전략이고, 나쁘게 말하면 결과만 생각한 잔꾀이다. “제 고향은 제주지만, 스스로는 서울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고 그의 책 <사랑의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제주도로 내려오기 전에는 그토록 ‘서울시민’임을 강조하였다.

2010년 3월 7일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하면서 “서울이 달라져야 한다. 서울시정이 확 바뀌어야 한다. 시정의 제1목표는 시민의 행복이어야 한다. 저 원희룡, 현장으로 가겠다. 갈등이 있는 곳, 위험이 있는 곳, 시민들의 어려움이 있는 곳에 가겠다. 현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문제의 해법을 찾겠다. 시정의 우선순위를 일자리, 교육, 집 문제 해결에 두겠다. 일.교.집 시장이 되겠다.”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것이 그의 속성이며, 그리고 현재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거의 천재도 그 때 그 때 달라졌을까? 일제하 민족을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로 기대를 모았던 ‘조선 3대 천재’로 불리는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는 어땠을까? 그들은 왜 민족의 기대를 저버렸을까? 

원희룡은 사법연수생 시절 주취 폭행을 저질러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동료 연수생들과 술을 마시고 길가에 방뇨를 하다가 이를 나무라는 주민을 집단폭행해 서울성북경찰서에서 입건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정릉1동 파출소에 연행됐는데 “우리 사법연수원생들을 우습게 보느냐”며 전화와 책상 등 기물을 부수며 소란을 피웠다.  

‘더 큰 제주’가 꿈이었나?

국민의 힘 원희룡 대선 예비후보가 결국 낙마했다. 그의 부인 강윤형의 ‘사이오패스’ 발언 역시 한겨레 <왜냐면>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의 대권도전의 꿈은 좌절됐으며, 그는 정치활동을 계속할 것인가를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협치(協治, Governance)'와 '연정(聯政)'을 통한 새로운 정치 실현을 모토로 내건 원희룡 민선 도정은 2014년 7월1일 출범하였다. 그는 취임사에서  "제가 다음 선거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서 제주도지사 2년 하다가 갈 것이라는 등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던데, 저는 제주도가 필요하고 도민이 원한다면 제 평생을 바쳐서라도 일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여유를 보였다. 

그가 처음 도지사에 출마하면서 내뱉은 말 중에서 ‘더 큰 제주’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눈길을 끌었다. ‘더 큰 제주’,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의 꿈은 ‘더 큰 제주’였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것이 큰 것 보다 나은 가치를, 큰 것보다 작은 것이 야무지고 효율적임을 말해야 한다. 큰 도시보다 작은 도시가 평화롭게 느껴지고, 교통과 쓰레기 문제도 덜하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1%다. 적어서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했다. 그러니까 그의 ‘더 큰 제주’는 처음부터 수정됐어야 했다. 우주에 그 많은 별들의 꽉 참, 그것은 작아서 가능하다. 수정란은 작아야만 클 수 있고, 새로운 탄생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작으면 사랑 받을 수 있고, 순수하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다. 1973년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1911~1977)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라는 경제비평서를 썼다. 그는 ‘큰 것’보다 ‘작은 것’이 야무지고 효율적임을 실천으로 증명했다. 진정 작은 것이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효율적이다. 우리 모두 큰 것만을 추구하면서, 큰 학교를, 큰 회사를, 큰 단체를 선호하고, 우리나라가 대국이 되기를 소망하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가 최근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도지사직을 내팽개치치면서 서울로 올라갔을 때, 도민들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을까? 도민들의 속은 타고, 부글부글 부아가 끓어올랐다. 코로나 때문에 도민들을 위해 사퇴를 미뤘다고 하는 말을 믿기에는 육지를 가도 너무 자주 갔다. 도청 홈페이지에 있는 도지사 공식일정을 보면 대부분 서울에 있던 것으로 조사됐다. 그래서 그의 과거의 “도민이 원한다면 제 평생을 바쳐서라도 일할 생각을 갖고 있다"는 발언은 ‘허맹이 문서’였다. 

하지만 그가 도지사로 재임하는 동안 그를 향한 기대감은 부서지기 시작했다. 도민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언제쯤 육지로 갈 수 있는지만 기다리는 철없는 20대처럼 행동했다. 도민들 사이에서는 그를 가리켜 '공부만 잘했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는 제주에 내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중진차출론을 거부해 박해를 받더라도 육지에 남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제주 도민들의 '엄친아'로 '제주를 빛낸 천재'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올해 9월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제주를 찾아 지지를 호소한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올해 9월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제주를 찾아 지지를 호소한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미군은 점령군이 아니었다?

국민의 힘의 대선경선 과정에서 원희룡은 "친일청산 미비란 말은 들었어도 미군이 점령군이란 말은 일반 국민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했다. 미군은 결코 점령군이 아니라는 논지였다. 과연 그럴까? 그의 역사인식은 처음부터 비틀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선일보는 1945년 12월 '怨恨(원한)에 사모친 三十八度線(삼십팔도선)' 제하의 기사에서 미군·소련 모두 점령군으로 표현해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인 1946년 2월에도 미·소 회담과 관련해 "친방미소양점령군(占領軍)"이라고 지칭했다. 당시 동아일보·경향신문도  미군을 '점령군'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그가 미군은 점령군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대한민국과 국민에 대한 모욕으로 치가 떨리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결국 비천한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는 "미국이 점령군이고 소련이 해방군이면 우리가 미국이 아닌 소련 편에 섰어야 한다는 뜻이냐? 점령군이 아닌 해방군 소련과 손잡고 친일 청산을 자랑하는 북한의 선택이 옳다는 말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그럴까? 미군은 점령군이 아니었을까? 한국을 불법점령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한 일제가 미국에 공식 항복한 날은 1945년 9월 2일, 미국 군함 미조리호 함상.〈조선의 주민에 포고함〉이란 제목의 '재조선 미군사령관 포고 1'과 ‘2. 3’으로 계속된 맥아더 포고령은 해방군이기보다 점령군적인 내용이 담겼다. 1945년 9월 7일 발표된 미국 태평양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호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점령군’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연합군은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함.”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하고 미군은 남한을 점령했다'는 점은 해방 당시의 국민들이 상식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미군이 점령군이 아니었다고 말하면, 그게 되레 이상하다. 점령군이 아닌데도 일본 식민지인 한국에 주둔했다면, 이는 미군이 일본의 연합군이었다는 말이 된다. 대통령이 되기 전 이승만도 당시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내 주둔한 미군을 '점령군'이라고 표현하고 철수를 요구한 내용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뤘다. 급기야 이승만의 1948년 8월 15일 건국 기념사에서도 '미 점령군'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왜 굳이 그가 ‘미군 점령군’이라는 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을까? 한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랬을까? 알아도 모른 척 상대후보에게 시비를 걸 양으로 그랬을까? 아무튼 그는 ‘미군은 점령군이 아님’을 인식시키려는 황당무계한 열의를 보이고 말았다.

‘4·3위원회폐지법안’에 찬성 

원희룡은 2008년 1월 21일 한나라당 재선의원 당시 ‘4.3위원회폐지법안’을 공동 발의하였다. 제주 출신이 오히려 제주도민을 괴롭히는 법안에 서명한 셈이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에 대해 공격을 받자 “당시 당 지도부가 소속의원 130명 전원의 날인을 일괄적으로 올려 모두가 일률적으로 발의자가 됐다”고 해명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2014년 4월 3일 처음으로 4.3희생자추념일로 지정되었다.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 공포된 지 14년 만이었다. 4·3유족과 도민들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4.3유족들은 4.3희생자추념일 지정이 4·3의 완전한 해결로 나아가는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그의 행적을 보면, 그의 부끄러운 ‘4.3위령제 불참 행적’이 속속 드러났다. 그는 4.3위원회 폐지법안 발의와 함께 국회의원 재임 12년 동안 4.3위령제에 단 한 차례도 참석하지 않았다. 2009년 4월3일 기독교행사 참석, 2011년 4월3일 한나라당 강원도지사 후보 선출 국민경선 참석, 그리고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자, 2012년 4월3일 강원도 동해·삼척 새누리당 후보 지원유세 참석 등. 

당시 도민들은 갈수록 격이 떨어지는 4.3국가 추념일 행사로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는 4·3위령제에는 불참하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눈이 멀어있었다. 그에게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은 있었지만 4·3과 제주도민은 없었다. 그는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의 아들’이었을 뿐 ‘제주의 아들’이 아니었다. 

진정 그는 4·3에 대한 이해가 왜 그렇게 부족했을까? 그는 오직 대통령 꿈만 간직한 정치가였을까? 4·3 당시 미군정은 묵인이나 방조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진압을 지시했고, 학살을 조장한 가해자이다. 이러한 내용은 4·3에 관심이 있거나 4·3 평화공원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도지사 후보 당시 4·3에 대해 ‘무장봉기’, ‘남로당의 경찰서 습격이 4.3발발 원인’이라고 했다. 2018년 4월 4일 KBS1 프로그램에서도 남로당의 무장습격만을 4·3의 원인과 발단으로 지목하였다. 남로당의 무장습격 사건만을 강조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4·3을 공산주의자들의 무장폭동으로 왜곡·폄하해왔던 극우보수 세력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미군정보보고서에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혀 있다.  미군정이 제주에서 보여준 행위는 점령군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들은 '제주도민의 70%가 좌익 동조자'라며 제주를 '빨갱이의 섬'(Red Island)라고 불렀다.   

2007년 1월2일 대권에 도전한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가 전두환씨를 세배하는 모습. 이 사진은 2014년 원 전 지사가 제주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자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이 언론에 제공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07년 1월2일 대권에 도전한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가 전두환씨에게 세배하는 모습. 이 사진은 2014년 원 전 지사가 제주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자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이 언론에 제공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전두환 세뱃돈 받으러 갔나  

원희룡은 한나라당 의원 시절인 2007년 1월 2일 '이제 그만 갈등과 증오의 역사를 녹여가야 한다'며 전두환의 집을 방문했다. 전두환에게 황태까지 전달하였다. 얼었다 녹았다 하는 황태를 건넴으로서 화합의 역사를 열어 나가자는 의도였다. 29만원 밖에 없다는 전두환에게 세뱃돈 받을 생각으로 간 것은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혹여 대선경선 과정에서 언론의 주목이라도 받아 한 번 떠 보자는 요량으로 간 것일 수도 있다. 

그가 전두환에게 머리를 조아린 날은 '희망과 도전'이라는 대선출사표가 쓰레기 조각이 되었다. 그가 말하는 미래가 굴신과 세상에 대한 아부로 가득찰 것이 분명했다. 이에 원희룡은 1월 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과거의 상처가 아직 너무나 생생하고, 이를 받아들일 여건이 안 됐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오해를 불러 일으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공식출마를 선언한 원희룡이 4·3위령제는 참석하지 않으면서 전두환에게는 세배까지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큰 꿈을 간직한 정치가의 속성이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전두환이란 이름 석 자가 갖는 의미를 과연 똑똑한 그가 정말 몰랐단 말인가? 그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그의 선배들, 동기들, 그리고 후배들은 거리에서 민주화투쟁을 하였다. 과연 그 당시에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혹시 도서관 구석진 곳에서, 혹은 고시원은 좁은 골방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일신의 영달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전두환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국민은 단 하루도 광주정신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도 전두환을 아버지뻘로 생각할까? 전두환에게 큰절을 하면 동서화합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벤트이든, 대선 후보로서의 변신이든 어떤 명분으로도 민주주의를 과거로 돌리는 행태는 생각도, 실행도 해서는 안 된다. 광주를 피로 물들게 했던 전두환은 당신에게 누구인가?

그가 전두환에게 세배로 큰 절을 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후 정치권은 물론 지지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전두환에게 큰 절을 한 것에 대한, 언론의 질타가 이어졌다.  정치인 원희룡이 정치꾼 원희룡이 된 날로 기록될 것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잇따랐다. 

네티즌의 비난도 쏟아졌다. 전두환이란 이름 석 자가 갖는 우리 현대사의 의미를 과연 똑똑한 그가 몰랐단 말인가? 그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그의 선배들, 동기들, 그리고 후배들은 거리에서 민주화투쟁을 하였던 것이다.  “당신, 제주에 다신 내려오지 마...당신 고향이랑 내 고향이랑 같은 게 너무너무 슬퍼....이참에 차라리 전두환이랑 같이 살어...”(어느 제주도민) 

후원회장 김동길은 누구인가

국민의힘 대선주자 원희룡은 후원회장으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를 위촉했다. 그는 "김동길 교수는 9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최일선에서 싸우고 있다. 대한민국 1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19대 현 문재인 대통령까지 목도한 대한민국 정치의 산증인"이라며 "대통령으로 가는 여정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발탁 배경을 밝혔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였다. 그날 오전, 연세대 총학생회가 마련한 분향소의 출입구 돌기둥에는 ‘연세대 재학생, 백룡(白龍)’ 명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김동길 교수가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다며 사과를 요구하는 대자보가 게시되었다. '자살 권하는 사회를 만드시는 김동길 교수님께’라는 제목으로 된  대자보에는 김동길의 사회적 지위를 망각한 경솔한 발언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은 면하기 어려운 사실이라며, 책임을 지고 사과하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또 “전두환, 노태우는 멀쩡히 살아서 29만원 밖에 없다는 망언을 일삼고 있다며 “과연 이런 작자들과 비교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사과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만큼의 중죄를 지었단 말입니까”라고 통탄했다. 

김동길의 과거는 찬란했다. 학생운동권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얼마 뒤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대학에서는 해직되었고,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후 일시 복직했다가 신군부의 탄압으로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면서 또다시 해직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정치에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4년 6월 정권의 유화조치로 다른 해직교수들과 함께 대학에 복직하였다. 그리고 신한민주당이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제1야당으로 올라선 직후인 1985년 4월, 난데없이 3씨는 정치를 관두고 고향 가서 낚시나 하라, 이제 민주주의를 위해 40대가 기수노릇을 해야 한다는 신문칼럼을 발표(한국일보 1985년 4월 4일 “나의 때는 이미 지났다”)하여 공분을 샀다.

1991년 4월 강의도중에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대해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 말아라, 어린 나이에 뭘 알아서 데모를 나갔겠느냐고 폄하했다. 이것을 학생들이 교내 대자보로 비판하자 5월 8일 사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는 "학생들이 교실에서의 강의 내용을 갖고 스승을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현실에 배반감을 느껴 결국 사표를 낸다."고 발언했다. 당시 <서양문화사 강의를 듣는 한 연세대 학우>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대자보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김 교수가 지난 29일 1교시 서양문화사 시간에 '입학한 지 2개월 된 신입생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얼마나 느끼고 행동했기에 그를 열사라고 부르는가?', '그는 배후조종한 선배들에 이끌려 시위 도중 도망가다가 맞아 죽은 것일 뿐', '강 씨를 배후조종해 죽게 만든 선배들은 내빼고 난 뒤 그를 다시 열사로 만들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말해 김 교수 특유의 비약논리로 강 씨의 죽음을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하찮은 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 - 한겨레신문 1991년 5월 2일 기사. 

김관후 시인 겸 작가
김관후 시인 겸 작가

그 후 김동길은 1991년 정치 참여를 선언하고 새한당을 창당한 뒤 대선을 위하여 정주영 만든 통일국민당에 합류했고, 1992년에는 총재에 선출되었다. 2006~2007년 그는 조갑제, 서정갑과 함께 캐러밴(Caravan) 부대를 만들어 전국 순회를 하면서 차기 대통령은 이명박이 돼야 한다며, “이명박은 이념의 태양”이라고도 외쳤다. 2010년, 김동길은 “이명박 대통령에게”라는 시리즈 칼럼을 계속해서 썼다. 1,200회 이상이었다.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 사람 아니면 대한민국이 망한다. 해놓고 나중에는 ‘이명박은 엉터리 같은 존재다’라고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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