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공육사 연극 ‘순이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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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공육사의 연극 '순이삼촌' 출연진. ⓒ제주의소리

제주4.3을 알리는데 앞장선 소설 ‘순이삼촌’을 다른 예술로 전환하는 시도는, 원작이 지닌 파급력과는 달리 순탄치 않았다. 영화, 연극에 있어 기대와 달리 무산되거나 의욕만큼 나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여러 예술이 어우러진 제주민예총의 거리굿이 명맥을 이어갔다는 사실이 그나마 고무적이다. 그러다 2020년 제주시-제주4.3평화재단 창작 오페라는 대극장을 가득 채우는 규모와 원작 고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적절히 이식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코로나19를 뚫고 올해 두 번째 공연을 성사시켰으며, 12월 경기도 공연도 앞두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 ‘순이삼촌’이 다시 연극 작품으로 등장했다. 바로 제주 극단 ‘공육사’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육사의 ‘순이삼촌’은 연극 장르에 알맞게 창작 구성이 돋보인 작품이다. 원작 소설, 마당극, 오페라 같은 앞선 다른 ‘순이삼촌’과 4.3예술의 장점을 골고루 흡수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한라아트홀 대극장에서 열린 공육사의 연극 ‘순이삼촌’은 현재(제삿날), 과거(순이삼촌의 서울 생활), 더 지난 과거(4.3전후)를 수시로 오가는 원작 진행을 충실히 따라가되, 소설의 언어가 아닌 연극의 언어로 재해석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것도 꽤나 적극적으로, 때로는 과감하게 나아갔다. 재해석의 영역은 줄거리, 인물, 대사 등 연극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를 모두 아우른다.

소설에서는 “행방을 알길 없는 남편” 정도뿐인 순이삼촌의 남편을 비중 있는 인물로 빚었고, 그의 친구도 새롭게 무대에 세웠다. 두 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세상을 희망하는 대의(친구)와 가족을 비롯한 내 주위가 우선(순이삼촌 남편)이라는 마음가짐의 차이를 보여준다. 무장대에 투신한 순이삼촌 남편의 친구는 “공비나 무장대라는 이름은 서북청년단들이 붙인 이름”이라며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싶게 만들고 싶다”는 취지로 말한다. 무장대 친구는 군인을 사살하고, 그것이 빌미가 돼 군인들은 북촌 주민들을 학살한다. 폭력이 폭력을 부르고, 그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구조. 연극 ‘순이삼촌’은 수탈에 시달리는 제주섬의 비극과 이념의 충돌로 혼란스러운 제주섬의 분위기까지 담아낸다.

도피 생활 끝에 군인 장교에게 겁탈 당하기 직전의 아내를 구하려다 총격으로 숨지는 남편, 큰당숙어른 등의 역할을 대신하며 전면에 나서는 고모, 막판 독백을 통해 서북청년회로서 반전 면모를 드러내는 고모부처럼 연극은 원작에서 축약하거나 없던 설정을 추가한다. 소설을 근간으로 하지만 동시에 다른 느낌의 ‘순이삼촌’으로 관객 앞에 선다. 서청 출신 고모부와 고모의 만남,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유머는 불편하기보다 충분히 가능한 변주라고 여긴다.

뿐만 아니라 인물과 상황에 맞는 대사들을 새로 만들어 비치했다. 길수가 순이삼촌을 기억하며 “몸이 괜찮아도 마음이 성치 않았다”고 쓸쓸하게 말하는 장면을 꼽겠다. 순이삼촌의 신경쇠약이 도드라지는 서울 생활 장면도 소설은 제3자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지만, 연극은 길고 짧은 대사를 적절히 풀어서 배치한다. 이런 대사 처리는 원작 소설과는 또 다른 연극 고유의 흡입력으로 관객을 주목하게 만든다.

군인 장교가 홀로 무대에 서서 표독스럽게 주민 학살을 지시하는 모습, 늙은 고모·고모부 내외가 순이삼촌을 기억하며 “이어도에는 잘 갔냐”며 비통하게 전하는 인사 등도 연극으로서의 재해석이 돋보인 장면으로 기억에 남는다.

물론, 보는 시각에 따라 이번 연극에서 추가한 설정들이 익숙하다고 볼 수 있다. 4.3 전후 시국을 바라보는 순이삼촌 남편과 친구 간의 의견 대립은 낯설지 않다. 무장대에게 습격당해 군인들이 사실상 보복 학살을 저질렀다는 설정은 오페라 ‘순이삼촌’을 참고했다. 그럼에도 이런 요소들이 진부하거나 어색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을 통해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잘 소화시켰다는 인상에 가깝다. 원작의 메시지와 그것을 연극 무대에 어울리게 만드는 두 가지 고민을, 균형있게 맞추려 한 노력이 충분히 느껴졌다.

류태호의 각색·연출뿐만 아니라 출연진도 ‘순이삼촌’을 돋보이게 만든다. 무엇보다 관록의 제주 극단 ‘놀이패 한라산’ 일원 신제균, 우승혁, 윤미란에게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세 사람은 본래 영역이 마당극이다. 고모부 역할 뿐만 아니라 제주어 대사 감수를 담당한 신제균, 큰아버지 역의 우승혁, 큰어머니 역의 윤미란. 세 사람은 마당극이 아닌 극장 연극임에도 내공이 묻어나는 노련함과 자신들에게 잘 맞는 역할로 제 몫을 톡톡히 발휘했다. 마당극이 아닌 연극 무대에서 만나니 반가우면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번 연극을 돌이켜보면서 흥미로운 점은 ‘순이삼촌’이란 인물을 집중 있게 조명하기 보다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보다 비중을 뒀다는 인상이다. 이런 구성은 관객 입장에서 순이삼촌에 깊이 공감하기 보다는 살짝 떨어져 지켜보게 만들고, 나아가 인물 너머 시대에 공감하길 바란다는 의도로 읽혀졌다. 그렇기에 순이삼촌을 연기한 배우 방은진은 이전 연극이나 오페라와 비교했을 때 주목도에 있어 차이가 있지만, 유약한 이미지가 도드라지는 모습으로 순이삼촌의 아픔을 보여줬다. 

오랜만에 연극배우로 복귀한 조성진은 길수 역과 군인 장교 역을 맡았다. 또렷하면서 울림이 담긴 특유의 발성과 매끄러운 연기는 ‘순이삼촌’에서도 빛났다. 집안어른과 친척 동생 사이를 이어주면서, 본래 상수 입에서 나오는 단호한 말을 소화했다. 동시에 학살의 주범인 장교 역할도 악독한 성격으로 구현했다. 조성진은 2020년 오페라 ‘순이삼촌’에서도 군인 역할로 출연했었다. 

오랜만에 배우로 등장하는 고모 역의 이윤주와 순이삼촌 남편·사위 역의 김시혁을 비롯해 소설 속 화자인 상수 역의 오현수, 상수 아내 역의 박은주, 순이삼촌 남편의 친구 역인 신현종, 군인 역의 이충선, 공연의 처음과 끝을 상징한 아이들(류시우·최효재) 모두 제 역할을 소화했다. 

극단 공육사를 이끄는 동시에 ‘순이삼촌’ 각색·연출을 맡은 류태호 교수(제주국제대학교)는 제주, 순이삼촌, 현기영 선생과 나름 인연을 가지고 있다. 1986년 극단 연우무대의 연극 ‘변방에 우짖는 새’가 바로 연극배우로서 데뷔작이다. 알다시피 ‘변방에 우짖는 새’는 현기영 선생이 1981년~1982년 펴낸 장편 소설이다. 류태호 교수는 2013년 ‘순이삼촌’ 첫 연극에도 출연했지만 여러모로 아쉬움을 간직했고, 지금은 제주에서 후배들을 양성하는 입장이기에, 연극 ‘순이삼촌’은 그에게 더없이 특별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는 4일 공연이 끝나고 기자와 만나 “각색, 연출을 비롯한 공연 제작에 많은 공을 기울였다”고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순이삼촌의 최후 이외에는 음악 하나 없는 구성과, 계속해서 교차하는 시공간에도 전체적으로 균형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는 진행은 왜 이 작품을 ‘정통 연극’이라고 소개했는지 납득시킨다. 군인 사격, 순이삼촌의 마지막 순간 등 몇몇 장면에서는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여운을 담으면 어떨까 하는 사족을 남겨본다.

공육사의 연극 ‘순이삼촌’은 ‘순이삼촌’을 알리는 연극으로 충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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