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제주박물관 학술대회...동·서자복관 대정·정의현성 돌하르방 연계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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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제주박물관은 12일 학술대회 ‘제주 불교문화의 특징’을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제주를 상징하는 ‘돌하르방’의 역사가 13세기~14세기 몽골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이다. 

12일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열린 학술대회 ‘제주 불교문화의 특징’에서 발제자로 나선 정성권 교수(단국대학교)는 대정현성에 자리잡은 돌하르방 4기의 특징에 주목했다.

제주 돌하르방은 제주·대정·정의까지 삼주현성 성문 밖에 세워진 석인상이다. 제주읍성(제주목 관아 일대)에 24기, 대정현성(현 대정읍 보성리)과 정의현성(현 표선면 성읍1리) 지역에 각각 12기씩 모두 48기가 세워졌으며 현재는 제주읍성 지역에서 하나가 빠져 47기가 남아있다.

역사서 ‘탐라기년(1918)’, ‘증보탐라지(1954)’ 등에는 1754년 제주목사 김몽규가 돌하르방(옹중석)을 세웠다고 알린다.

그런데 제주읍성, 대정현성, 정의현성 돌하르방은 묘하게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정성권 교수는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왕방울 눈에 커다란 주먹코가 얼굴 표현의 중요한 특징적 요소”라며 “이에 반해 대정현성 돌하르방은 적당한 크기의 눈과 ‘I’자 형태의 코가 표현돼 있다. 정의현성 돌하르방은 ‘I’자 형태와 삼각형 모양의 코가 조각돼 있다”고 차이를 밝힌다.

그는 이 가운데 대정현성 돌하르방 4기(2-34호, 2-41호, 2-42호, 2-43호)가 전체 돌하르방과 비교해도 명확한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북방지역 석인상과 공통점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돌하르방 네 기는 ▲평평한 평면적 얼굴 ▲이중 동심원을 이용한 돌출된 눈 표현 방법 ▲목 주변의 복장 표현 ▲허리띠 표현 등의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특징은 7~8세기 유라이사 스텝 지역에 만들어진 돌궐계 석인상과 유사하고, 대정현성의 나머지 8개 돌하르방과도 비교해도 조각 역량이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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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대정현성, 정의현성, 제주읍성 돌하르방.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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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현성 돌하르방과 돌궐계 석인상의 비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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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현성 돌하르방과 북방계 석인상의 비교. ⓒ제주의소리

정성권 교수는 대정현성 일부의 돌하르방에서 돌궐계 석인상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를 ‘하치(合赤)’에 주목했다.

그를 사학자 고창석 전 교수(제주대)의 연구를 인용해 바로 몽골 제국 당시 우마방목을 주관한 ‘하치’들이 제주에서 대정현성 돌하르방 4기를 제작했다는 것이다.

정성권 교수는 “원제국 국립목장인 탐라목장의 마축을 관장하였던 하치가 킵차크 출신이라는 연구성과는 대정현성 돌하르방에 돌궐계 석인상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면서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제주도 돌하르방은 앞서 설명한 대정현성 돌하르방 4기가 제주도 돌하르방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4기의 돌하르방은 13세기 후반~14세기 전반기 탐라의 원황실 목장에 파견된 킵차크 칸국 출신 하치(목호)들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성권 교수는 제주읍성 돌하르방과 불교 조각 간의 연관성도 강조했다.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불교 사천왕상 얼굴이 제주읍성 돌하르방과 유사하다는 것.

그는 “17세기 사천왕상의 얼굴 조형은 18세기 석장승을 매개로 제주도에 전래되면서 제주읍성 얼굴 조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주읍성 돌하르방의 자세와 신체 표현에는 15세기부터 대정현성, 정의현성 성문 앞을 지키고 있었던 대정현성과 정의현성 돌하르방의 영향 또한 녹아들어가 있다”며 “즉,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멀리 7~8세기 돌궐계 석인상부터 가까이는 17세기의 사천왕상과 18세기의 석장승이 융합돼 1754년 목사 김몽규에 의해 제주도를 대표하는 새로운 형태의 돌하르방으로 창안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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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주변 장식이 유사한 돌궐계 석인상(왼쪽)과 일부 대정현성 돌하르방.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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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신미륵(오른쪽)과 돌하르방과의 비교. ⓒ제주의소리

더불어 “이러한 이유로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교류와 전통이 융합돼 제주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의 특성을 보여주는 뛰어난 조각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여기에 제주도 민속문화재 1호 복신미륵(동자복, 서자복) 역시 대정현성, 정의현성 돌하르방의 조형적 특징을 모방해 조성된 석불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제주도 사지 ▲제주 불교유적 금속 출토품 ▲제주지역 불탑 ▲제주도 소재 조선시대 불상 ▲제주 근대기 전통불화 ▲제주에서 잠시 활동했던 금어 일섭(1900~1975) 등에 대해 연구 결과를 공유했다.

이현수 팀장(불교문화재연구소)는 제주도 사지와 관련해 “제주도에 남아있는 사지 중 문헌 상 사찰로 규명 짓는 것은 지표조사만으로 어렵고, 이는 정밀조사를 통해서 가능하다”면서 “이 가운데 법화사지 초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는 현무암 외에 다른 석재를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고 밝혔다.

신명희 연구사(국립중앙박물관)는 금속 출토품에 대해 “법화사지에서 출토된 청동 등잔은 고려시대 전형적인 등잔과 다르지만, 명문으로 다른 유적의 공양구가 청동 등장임을 확인시켰다”면서 “수정사지 청동 등잔은 처음 명문을 확인했다. 등장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 중국 명나라 혜제(1399~1402)의 연호인 건문(建文)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더불어 “명문이 있는 2개의 유물을 통해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법화사지와 수정사지의 사세와 성격, 교류관계 등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강조했다.

진정환 학예연구실장(국립제주박물관)은 원당사지 석탑, 수정사지 석탑 모두 탐라에 현령이 파견된 12세기에 조성된 석탑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고려의 탐라 지배 체제가 어떻게 구축되고, 고려의 문화가 탐라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친 시기를 확인 ▲고려의 지방 읍기 정비 시 자복사의 조영 양상과 비보사탑설의 영향이 탐라현 조성에도 있음을 확인 ▲다양했던 12세기 불탑 제작의 방식을 확인 ▲원당사지 석탑은 제주도내 승탑, 석불, 동자석, 돌하르방 등 현무암 석조물의 시작이자 제주 석조미술 전형양식의 시원 등의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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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사지 석탑. ⓒ제주의소리

양수미 연구사(국립중앙박물관)는 불상에 대해 “제주도에 전하는 조선시대 불상들은 당대를 대표하는 조각승들이 제작한 연대가 확실한 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라고 밝혔다.
이승희 교수(덕성여자대학교)는 “현재 제주도에 있는 근대기 불화는 총 12점으로 이중 50%는 내륙의 불화를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들 가운데 가장 의미가 있는 불화는 ‘관음사후불도’와 ‘금붕사오백나한도’”라고 꼽았다.

이승희 교수는 “‘관음사후불도’는 근대 불교의 이념과 불교 인식, 대중적인 포교운동, 마음의 수행을 중시하는 당시 근대불교의 풍조를 반영한다”고 설명했고 “‘금붕사오백나한도’는 조선시대에 주로 보이는 가로잇기와는 전혀 달라 근대불화의 제작 기법을 잘보여준다. 화가는 없지만 그 화풍은 문성, 일섭의 화풍을 계승한다”고 강조했다.

김영희 연구사(국립광주박물관)는 금어 일섭에 대해 “1940년 7월부터 1941년 4월까지 제주에 머물면서 9개소의 사찰에서 총 43여건의 불사를 행했다”면서 “당시 제주에서의 불교 확산에 따른 포교당 건립이라는 배경에서, 단기간 집약적으로 이뤄진 다량의 불사라는 점이 주목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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