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反美)의 불길과 섬광의 밤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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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75)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1970년 12월 20일 새벽 오키나와 섬 중부에 위치한 코자(현 오키나와시) 번화가에서 미군이 오키나와인을 친 교통사고를 계기로 대규모 화공사건이 발생했다. 미군 유흥지구로 자리잡은 코자의 중심가는 크리스마스 시즌 주말이라 지역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미 25년 된 미국의 점령 통치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누가 선동하지도 않았는데, 우발적으로 미군 차량에 불이 나면서 80여대가 연이어 불길에 휩싸였다. 미군 관계자의 차량 노란 번호판은 표적 식별을 용이하게 했다. 평소 미군이 떨어트리는 달러로 사는 장사치들도 가세했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코자의 길목. 미군을 상대로 한 전당포, 자수 가게가 즐비하다, 1963년.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제주의소리

미군사령부는 즉각 비상경계태세를 발령하고 400명의 무장미군을 출동시켰다. 수천명의 민중은 화재 차량을 사이에 둔 길 양옆에서 투석을 계속했으며 일부 민중은 인근에 있는 당시 극동 최대의 미군기지 가데나 기지 게이트를 뚫고 군 시설에 불을 질렀다. 일부는 미국인 주택지역에 접근했다. 이들 폭도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 헬기는 이들의 머리 위를 조종자의 눈코가 보일 정도로 낮게 날아 서치라이트로 위협했으며 당시 베트남에서 사용하던 최루탄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이 오키나와 민중들에게 공포를 느낀 것은 이때까지만 해도 없었을지 모른다. 상공에서 반란의 현장을 본 미군 고위 관리는 훗날 베트남 전쟁터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미국이 당시 지루한 전투에 끝없이 소모됐던 베트남이 오키나와에서 겪었던 악몽의 하룻밤. 불길과 빛이 교란된 그날 밤은 그러나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아무런 약탈도 일어나지 않고 썰물 빠지듯 소동이 수습되는 가운데 밝았다.

당연히 오키나와 미군에 군림하는 고등판무관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이 반란에 격분했다. 당일 성명에서 그는 어떤 이유로도 평화로운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재산을 파괴하는 폭동의 수단에 호소할 구실이 못 된다고 실행자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1945년 이래 오키나와에서 평화로운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재산을 계속 파괴해 온 것은 미군이다. 토지 강제접수, 살인, 상해, 성범죄 같은 무수한 폭력은 오키나와인들이 아무리 항의해도 정당하게 재판받지 못했다. 코자의 화염 직전에도, 음주 운전의 미군이 오키나와인 여성을 치어 죽인 사건의 군법회의가 가해자의 무죄를 판결한 바로 직후였다. 아울러 미군이 몰래 오키나와의 기지에 반입한 1만3천t의 생화학무기. 1969년에 그 존재가 발각된 이래, 그 철거를 요청해 1년 반이나 항의를 계속해 온 주민의 초조함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오키나와 섬 북부 산지에서는 미군의 대규모 실탄 사격훈련을 저지하는 주민들이 격렬히 저항하고 있었다. 극동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오키나와 주둔이라고 장담했던 미군은 오키나와인이 평화롭게 살 권리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것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교육공무원의 정치활동을 제한하는 입법에 반대하는 시위, 1967년.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제주의소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생명을 지키는 현민 공투회의의 행동. 집회 참석자들의 머리 위로 미군 헬기가 날아다닌다, 1969년.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제주의소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미군의 고교생 살해에 항의하는 데모, 1970년.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제주의소리

코자 화재 다음날, 오키나와인 자치 기구인 류큐 정부의 야라 초뵤 주석은 고등판무관과 회담했다. 미군의 기록에 의하면 야라는 강한 항의의 뜻을 나타냈고, “오키나와인은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심각한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기본적으로 점쟎지만, 믿고 의지할 데가 없을 때에는 코자에서 일어난 것 같은 소동이야말로 ‘약자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을 중히 고려해 달라”고 고등판무관에게 말했다. 고등판무관 입장에서 보면 진압해야 할 ‘폭동’이었던 그것을, 야라가 ‘표현’이라고 부른 의미를 깊이 다시 생각한다. 권력 측은 뜻에 맞지 않는 약자들을 항상 비리의 폭도로, 약자들의 행동을 폭동이라고 명명한다. 그 이름으로 정의를 요구하는 약자의 이치마저 빼앗아 가는 것이다. 미군은 여느 때처럼 공산주의자의 주동자를 색출하려다 허탕을 쳤고, 체포 기소된 4명의 오키나와인은 방화 등 죄를 받았으나 실형을 면했다.

약자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1970년 12월 20일의 이 일을 폭동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정명이 어떤 것이 적합한가? 지금도 계속 되는 오키나와 민중의 굴하지 않는 저항의 역사에서 섬광과 같이 존재하는 이 하룻밤은, 야라가 말한 것처럼 ‘표현’, ‘퍼포먼스’라고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민중의 집단적 무의식이 만들어낸 퍼포먼스로서 그 강도 때문에 지금도 변함없는 억압 아래 있는 오키나와는 그날 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미군기지 노동자의 48시간 파업, 1970년.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제주의소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B-52 전략폭격기의 재도발에 항의하는 사람들, 1972년.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제주의소리

# 토미야마 카즈미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反米の炎と閃光の夜の記憶
豊見山和美

 
1970年12月20日未明、沖縄島中部に位置するコザ(現・沖縄市)の繁華街で、米軍人が沖縄人をはねた交通事故をきっかけに、大規模な焼き討ち事件が発生した。米軍人の遊興地区として栄えるコザのメインストリートは、クリスマス・シーズンの週末とあって地元の客も入り乱れて喧騒を極めていたが、すでに25年に及んでいたアメリカの占領統治に対する怒りを爆発させるかのように、誰が扇動するわけでもなく自然発生的に、米軍人の車両に火が放たれ、およそ80台が次々に炎上していった。米軍関係者の車の黄色いナンバープレートは標的の識別を容易にした。日頃米兵の落とすドルで暮らす商売人たちも加勢した。

米軍司令部は報を受けて即座にコンディション・グリーン(非常警戒態勢)を発令し、400人の武装米兵を出動させた。数千人の民衆は炎上車両をはさんだ通りの両脇から投石を続け、一部の民衆は近くにある当時極東最大の米軍基地・嘉手納基地のゲートを突破して軍の施設に放火した。一部はさらに米人住宅地域に迫った。これらの「暴徒」を鎮圧するため、米軍のヘリコプターは彼らの頭上を操縦者の目鼻が見えるほど低く飛んでサーチライトで威嚇し、当時ベトナムで用いていた催涙ガスも使用したとされる。アメリカ軍が沖縄の民衆に恐怖を覚えたのはこの時をおいて他に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上空から反乱の現場を見た米軍高官は後年、ベトナムの戦場そのものだと思ったと語っている。当時のアメリカが不毛な戦闘に果てしなく消耗していたベトナムが、沖縄に現前した悪夢の一夜。炎と光が攪乱したその夜はしかし、ひとりの死者も何の略奪も発生せず、潮が引くように騒動が収束するなかで明けていった。

当然ながら、沖縄米軍に君臨する高等弁務官は沖縄住民のこの反乱に激怒した。即日の声明で彼は、どんな理由があっても「平和な市民の生命をおびやかし、財産を破壊するような暴動の手段に訴える口実にならない」と実行者たちを非難した。しかし、1945年以来、沖縄で平和な市民の生命をおびやかし財産を破壊し続けてきたのは米軍だ。土地の強制接収、殺人、傷害、性犯罪といった無数の暴力は、沖縄人がいくら抗議の声を上げても正当に裁かれることはなかった。コザの炎上直前にも、飲酒運転の米兵が沖縄人女性を轢殺した事件の軍法会議が加害者の無罪を判決したばかりだった。加えて、米軍が密かに沖縄の基地に持ち込んでいた1万3千トンの生物化学兵器。1969年にその存在が発覚して以来、その撤去を要請して1年半も抗議を続けてきた住民の苛立ちは極限に達していた。沖縄島北部の山地では米軍の大規模な実弾射撃演習を阻止する住民が激しく抵抗していた。極東の平和と安全のために沖縄に駐屯すると豪語した米軍は、沖縄人が平和に暮らす権利そのものについては関心がなかったし、それは50年が経った今も変わっていない。

コザ炎上の翌日、沖縄人自治機構である琉球政府の屋良朝苗主席は高等弁務官と会談した。米軍の記録によれば屋良は強い抗議の意を示し、沖縄人はよほどなことがない限り温和であるけれども、ほかに頼みとするものがない時には、コザで起きたような騒動こそが<弱者が感情を表現できる唯一の手段>となることを重々考慮してほしい、と高等弁務官に告げた。高等弁務官からすれば鎮圧すべき「暴動」であったそれを、屋良が「表現」とよんだことの意味深さをあらためて考える。権力側は意に添わぬ弱者たちを常に非理の「暴徒」とし、弱者たちの行動を「暴動」と名付ける。その名付けによって、正義を求める弱者の理さえ奪っていくものだ。米軍は例のごとく共産主義者の首謀者を探し出そうとしたが徒労に終わり、逮捕・起訴された4人の沖縄人は放火などの罪に問われたが実刑は免れた。弱者の理を知る者なら、1970年12月20日のこの出来事を「暴動」と呼ぶことはできないだろう。では、どのような「正名」がふさわしいのか? 今も続く沖縄民衆の不屈の抵抗の歴史において閃光のように存在するこの一夜は、屋良が言ったように「表現」「パフォーマンス」というべきものかもしれない。民衆の集団的無意識が作り上げたパフォーマンスとして、その強度のゆえにこそ、今も変わらぬ抑圧の下にいる沖縄は、この夜の記憶を必要としているように思えるのだ。

写真1  コザの街角。米兵相手の質屋、刺繍屋が軒を連ねる。1963年 沖縄県公文書館所蔵

写真2 教育公務員の政治活動を制限する立法に反対するデモ 1967年 沖縄県公文書館所蔵

写真3 生命を守る県民共闘会議の行動集会 頭上を米軍ヘリが飛ぶ 1969年 沖縄県公文書館所蔵

写真4  米兵による高校生刺傷に抗議するデモ 1970年 沖縄県公文書館所蔵

写真5  米軍基地労働者の48時間ストライキ 1970年  沖縄県公文書館所蔵

写真6  B52戦略爆撃機の再飛来に抗議する人々 1972年  沖縄県公文書館所蔵


反美火焰和閃光之夜的記憶
豊見山和美

  
1970年12月20日凌晨,位於沖繩本島的胡差 (Koza, 現沖繩市)鬧區,一名美軍士兵在車禍交通事故中撞上一名沖繩人駕駛車輛,引發了一場重大的燃燒事件。熱鬧的美軍娛樂區 Koza 的主要街道也在聖誕節的周末熙熙攘攘,當地人對 25 年的美國占領感到自發而平淡的憤怒,大約 80 輛美國汽車軍人一個接著一個被縱火。美軍汽車上的黃色車牌使目標變得更加容易識別。經常靠美國大兵美元為生的工人也加入進來。
美軍司令部接到消息後,立即發出“綠色狀態”(緊急警報),並出動400名全副武裝的美軍士兵。數千名當地人繼續從街道兩旁向燃燒的車輛投擲石塊,部分衝破附近當時遠東最大的美軍基地嘉手納空軍基地的大門,縱火焚燒軍事設施。有些甚至靠近了美軍住宅區。為了驅散這些“暴徒”,美國軍用直升機從他們頭頂飛過,低到可以看到操作員的眼睛和鼻子,用探照燈威脅他們,據稱動用了當時在越南使用的催淚瓦斯。這可能是美軍唯一一次害怕沖繩人民。一位從天上看到叛亂現場的美國高級軍事官員後來說,他認為那像是越南的戰場。像極了美國當時在越南無休止地消耗,在沖繩簡直是惡夢重現。隨著騷動的消退,當晚沒有人死亡,也沒有人被洗劫,火光映射的動亂之夜也就此平息。 

不出所料,在沖繩的美軍軍事高級專員對沖繩居民的這次叛亂感到憤怒。在同一天的一份聲明中,他指責暴亂民眾「無論出於何種原因,都不是訴諸威脅和平公民生命和破壞財產的騷亂的藉口」。然而,1945 年以來,正是美軍威脅和平公民的生命並破壞沖繩的財產。無論沖繩人如何抗議,無數的暴力行為,如土地掠奪、謀殺、傷害和性犯罪,都未曾被繩之以法。就在 Koza 火災發生之前,軍事法庭剛剛宣布一名美國士兵酒駕撞倒沖繩婦女的案件肇事者無罪。此外,美軍還秘密將1.3萬噸生化武器運往沖繩基地。自1969年發現其存在以來,經過一年半的抗議和要求拆除,居民的不滿情緒達到了巔峰。在沖繩島北部山區,居民強烈抵制美軍的大規模實彈演習。宣稱為了遠東地區的和平與安全而駐紮沖繩的美軍,卻對沖繩人的和平生活權利毫不在意,50年過去了,這一點也沒有改變。

胡差(Koza)火災發生後的第二天,沖繩自治機構琉球政府的屋良朝苗( YARA Chobyo )主席會見了美軍高級專員。根據美軍的記錄,屋良已經表現出強烈抗議,“沖繩人基本上都是溫和的人,除非發生嚴重的事情來激化他們的情緒。在沒有其他辦法的情況下,在Koza發生這種騷亂是弱勢群體表達情緒意見的唯一途徑” 。我重新考慮了朝苗 YARA Chobyo )所說的“表達”的重要性,而在高級專員的眼中,這是需要被鎮壓的“騷亂”。強者總是把不情願的弱者稱為“暴民”,把弱者的行為稱為“暴動”。這命名剝奪了弱者尋求正義的理由。美軍像往常一樣,試圖嫁禍找到共產黨主謀,但徒勞無功,被捕的四名沖繩人被指控縱火等罪名,但沒有被判入獄。
任何了解弱者正義的人都無法將 1970 年 12 月 20 日的這一事件稱為“暴動”。那麼,什麼樣的命名才合適呢?在沖繩人民不屈不撓的抗爭歷史上一閃而過的夜晚,或許正如屋良所說的那樣,被稱為某種“表達”或“表演”。作為人民集體無意識所創造的表演,正因為它的強度,當今仍持續被壓迫的沖繩,現在似乎更需要那個夜晚的記憶。

照片1:胡差( Koza )街角,提供美軍士兵消費的當舖和軍繡店並排。1963年,沖繩縣檔案館。

照片 2:反對限制教育公務員政治活動的立法示威。 1967年,沖繩縣檔案館藏

照片3:守護生命的縣民共鬥會議集會,一架美軍直升機從頭頂上飛過。1969年,沖繩縣檔案館藏

照片4:抗議美軍士兵刺傷高中生的示威活動  1970年,沖繩縣檔案館藏

照片5:美軍基地工人罷工48小時  1970年,沖繩縣檔案館藏

照片6:抗議 B52 戰略轟炸機再度飛來的民眾   1972, 沖繩縣檔案館藏


Memories of the night of flames and flashes: Anti US riot or performance? 
TOMIYAMA Kazumi

In the early hours of 20 December 1970, a car accident in which an American soldier hit an Okinawan in the downtown area of Koza (now Okinawa City), in Okinawa Island, triggered a major burning incident. The main street of Koza, a thriving entertainment district for US military, was bustling with locals also on the weekend of the Christmas season, when, in a spontaneous and uninspired outburst of anger at the 25-year US occupation, about 80 vehicles of US servicemen were set on fire, one after another. The yellow license plates of the vehicles made them easy targets for identification. The workers, who regularly live on US soldiers' dollars, also joined in.

The US military command immediately issued a Condition Green alert and sent 400 armed American soldiers to the scene. Thousands of local people continued to throw stones from both sides of the street, flanked by burning vehicles, and some broke through the gate of nearby Kadena Air Base, then the largest US military base in the Far East, and set fire to military installations. Some were even closer to the American residential area. To disperse these "rioters", US helicopters flew so low over their heads that the pilots’ eyes and nose could see, threatening them with searchlights and allegedly using tear gas, which was then used in Vietnam. This may have been the only time that the US troops were terrified by the Okinawans. A US military official who saw the scene of the insurgency from the air said later that he thought it was just like the battlefields of Vietnam. It was a nightmare that the barren fighting that had consumed the US endlessly in Vietnam at the time was recreated on Okinawa. But no one died, no one was looted, and the night of flames and light drew to a close as the tumult ebbed away.

Naturally, the High Commissioner, the reigning US military chief on Okinawa, was outraged by this revolt of Okinawans. In a statement on the same day, he condemned the doers, saying that any cause is no excuse for resorting to insurrectionary measures which endanger the lives and destroy the property of peaceful citizens. But it is the US military that has been terrorizing peaceful civilians and destroying property in Okinawa since 1945. Countless acts of violence, including land seizures, murders, assaults and sex crimes, have never been brought to justice, no matter how loudly Okinawans protested.  Just before the Koza blaze, a court-martial had acquitted the perpetrators of a case in which a drunken US soldier ran over and killed an Okinawan woman. In addition, 13,000 tons of biochemical weapons had been secretly brought to the base in Okinawa by the US military. After a year and a half of protesting and calling for its removal since its existence was discovered in 1969, the frustration of the residents had reached its peak. In the mountains of the northern part of the island of Okinawa, residents fiercely resisted the US military's large-scale live-fire exercises. The US military, which claimed to be stationed in Okinawa for the peace and security of the Far East, did not care about the right of Okinawans to live in peace, and 50 years on, this has not changed.

The day after the Koza burning, YARA Chobyo, the Chief Executive of the Ryukyu Government, the autonomous body of the Okinawan people, met with the High Commissioner. According to US military records, Yara expressed his strong protest and told the High Commissioner that “Okinawans are basically gentle people unless something serious occurs to inflame their emotions. When no other recourse available, disturbances such as these occurring in Koza are the only way the weak can express their feelings”, and asked the High Commissioner to take this into consideration. I think again of the significance of Yara's calling it an 'expression' when in the eyes of the High Commissioner it was a 'riot' to be put down. The powers always treat the disaffected as unreasonable "rioters" and name the actions of the weak as "riots". This nomenclature deprives the weak of their reason to seek justice. The US military, as usual, tried in vain to find the communist ringleaders, and four Okinawans arrested and charged with arson and other crimes avoided jail time.

No one who knows the justice of the weak can call this event of 20 December 1970 a "riot". So, what nomenclature would be appropriate? This night, a flashpoint in the ongoing history of the Okinawan people's indomitable resistance, may be, as Yara said, "an expression" or "a performance". As a performance created by the collective unconscious of the people, it is precisely because of its intensity that Okinawa, still under the constant oppression, seems to need the memory of that night even now.

Photo 1: A street corner in Koza. Pawnshops and embroidery shop for American soldiers stand side by side, 1963.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Photo 2: Demonstration against legislation restricting the political activities of educational officials, 1967.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Photo 3: A rally of the People's Assembly for the Protection of Life, US military helicopter flies overhead, 1969. Okinawa Prefectural Archive.

Photo 4: Demonstration protesting the stabbing of high school students by US soldier, 1970.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Photo 5: 48-hour strike by US base workers, 1970.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Photo 6: People protesting the return of the B52 Strategic bombers, 1972.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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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 2021-12-22 14:37:13
일본에도병신닮은것들이있구나.한국에만있는줄알았는데
14.***.***.38

말 장난 고만해라 2021-12-22 08:28:48
헐~~
평화예술 운동 ?
독재체제를 얘기하려면 먼저 북한, 중국부터 연대해야지,
역사 공부 좀 해라.
이름없는 변방 인물들을 데려다가 뭐하는 짓인가.
언제는 일본인을 그렇게도 증오하더니만,
이젠 필요하냐
친일 찌라시라는 감투가 좋아서 ?
이게 언론이냐 기레기지
223.***.***.42

제주도민 2021-12-21 17:20:14
제주도와 대만, 오키나와는 같은 픽밥과 수탈, 항쟁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형제.
가보면 안다.
따뜻한 오키나와인들의
심성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223.***.***.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