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국가의 주체가 되기 위한 민주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관심과 참여가 시급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가짜

‘썰’과 사실을 통틀어 최초로 하늘을 난 인간은 이카루스(Icarus)일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는 새의 깃털들을 실로 엮고 밀랍으로 덧칠해 만든 날개를 타고 비상한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끝없이 하늘로 올라가던 그는 깃털에 붙였던 밀랍이 가깝게 다가설수록 뜨거워지는 태양열에 녹아 버려 날개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바다로 추락해 죽는다.

대선이 다시 돌아왔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민주시민들이 엄동설한의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촛불을 들었던 게 벌써 오년 전. 그러나 또 다른 이카루스들이 가짜 날개를 달고 개인적 욕망만으로 대권을 향해 뛰어든 위험한 모습은 여전하다. 촛불혁명이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을까. 국가의 운명과 미래를 책임져야 할 최고지도자를 능력과 자질이 아닌 가공된 이미지만으로 ‘최고가 아닌 차악’을 할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예전과 마찬가지다. 가짜를 가짜라고 밝히지 않는 비상식적인 사회구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섭정

박근혜 대통령은 왜 탄핵을 당해야만 했을까. 탄핵 정국 당시 한 유력 정치인은 “몇 안 되는 ‘양박(양아치 친박)’들과 폐쇄적인 국정운영을 하다 보니 판단이 흐려지고 허접한 여자에 기댄 결과가 참사를 가져왔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춘향인 줄 알고 뽑았더니 향단이였다”는 그의 실소에 들어있지 않을까. 역대 대통령을 넘어 단군 이래 모든 왕조를 통틀어 섭정을 당한 왕들은 모두 자의가 아닌 타의였으며 어리거나 힘이 없었던 게 이유였다. 박근혜 대통령처럼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사이비 종교인의 딸에게 넘겨준 사례는 없었다. 

이에는 역시 언론들의 역할이 컸다. 함량 미달의 후보에겐 하늘을 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추기고, 국민들에겐 가짜를 진짜 날개처럼 미화해 호도했다. 18대 대선의 기억이 선하다. 당시 갓 개국한 종편방송들은 일제히 박근혜 대권후보를 띄우기로 일관하며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선을 앞두고 유권자의 선택에 중요한 정책공약과 대통령 후보로서의 자질을 검증하는 대신 “이성을 사랑해본 적이 있느냐”는 식의 ‘신변잡기’ 인터뷰로 일관했다. 특히 TV 조선은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것 같은 아우라”라는 낯 뜨거운 아부성 멘트로 그녀를 칭송했다.

투정

나라는커녕 자신조차 주체하지 못하는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 그 결과는 뻔하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 ‘누군가’는 당신이 지금 머리에 떠올리는 바로 최순실이다. 그녀는 박 대통령이 의존도가 너무 심해 나중에는 “대통령을 일일이 챙겨주는 게 귀찮을 지경”이라고 투정하는 객기까지 부릴 정도였단다. 그렇게 정치 ‘왕초보’가 메시지를 하사하면, 박 대통령이 발표하고, 언론들은 받아쓰고, 정치패널들은 분석하느라 바빴다.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발표만 하고 질문을 받지 않았던 이유다.

국민은 대통령으로 박근혜를 선택했는데 권력은 무녀가 잡았던 셈이다. 무녀와의 특별한 관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당원들과 언론들은 침묵했다. 자당과 자신의 이익 앞에 정보는 차단됐고 진실은 왜곡됐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파견됐던 조선통신사가 당파싸움에 매몰돼 의도적으로 진상을 감추고 보고하는 바람에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던 사례가 떠오른다. ‘이카루스’ 논란은 MB도 마찬가지다. “도곡동 땅이 어떻고, BBK가 어떻다고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2007년 8월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MB의 경선대회장 연설문 중 일부 발췌문이다. 

무지개

그의 말이 오히려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 확인된 것은 10년 후. 결국 도곡동 땅은 물론, BBK마저 실소유자는 MB였다. 거짓말의 효과는 즉각적이고 진실의 응징은 언제나 더딘 것일까. 정말 오랫동안 국민들은 ‘거짓말쟁이’를 대통령으로 받들고 살아온 셈이다. 또 다른 웃고픈 희극은 “모든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선거구호였다. “모든 학생을 일등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말과 진배없는 모순적인 교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샐러리맨의 신화’를 앞세운 그의 약속에 감격했고 열광했다. 정작 양극화가 가장 심각했던 때는 MB의 집권기였다. 

촛불혁명 후 처음 열리는 이번 대선도 진실은 감춰지고 거짓이 난무하며 우리의 눈을 가리는 모습이다. 한낱 몇 푼의 정파적 이익을 위해 기본적 사명감을 내팽개친 일부 언론들의 활약이 눈이 부실 정도다. 자신이 편애하는 후보에겐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문을 묻지 않고, 자신이 적대시하는 후보에겐 논란이 아닌 것을 논란으로 만들며 정치혐오를 키운다. 심지어 어느 언론은 작년 말 야당후보의 광주민주화묘지 방문을 기사화하면서 뜬금없이 방문 현장에 ‘무지개’가 떴다며 ‘성스러운 징조’라고 칭송했다. 하다하다 이젠 북한의 노동신문의 경지에 오른 모습을 보게 된다. 

박수무당

남다른 반공으로 밥을 먹는 보수언론이 아니던가. 우리나라의 언론지형이 한쪽으로 현격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제의 불법과 반칙으로 쌓아 올린 오늘의 특권이 공정과 상식이라는 위선의 탈을 쓰고 유권자를 현혹시키기 십상이다. 언론은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책임을 져야 하는 ‘제4의 권력’으로 불린다. 그럼에도 급조된 후보의 자질 부족과 함량 미달을 숨기는 것을 넘어, 아예 줄을 서는 모습이다. 채 준비를 갖추지 못한 후보에게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행복을 위한 제대로 된 비전과 정책이 있을 리 없다. 

면장도 알아야 해먹는 법이다. 하물며 국가의 최고지도자라면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국가의 중대사를 통째로 무속에 맡기는 것은 촛불혁명 이전으로 족하다. 사고 예방과 구조에서 국가의 역할이 실종됐던 세월호 참사는 ‘이카루스의 나라’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다. 하지만 어느 후보의 근처에는 여전히 무속인들이 판을 친다는 뉴스로 나라가 시끄럽다. 국사(國師)를 자칭하는 박수무당까지 등장해 후보의 일정과 메시지를 주도적으로 결정한다고 회자된다. 갑자기 제사장이 나라를 다스리던 반만년 전 고조선이 된 분위기다. 

공정과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우리 언론들에게 더 이상 후보자에 대한 검증과 선택을 맡길 수 없다. 대선쟁점이나 후보 간 정책비교와 하등 관계없는 보수언론들의 신비주의적 해석과 신화화는 우리를 삶의 주체가 아니라 무력한 객체로 전락시킬 뿐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정치 관심과 참여만이 ‘뻐꾸기’로부터 민주주의 둥지를 지킬 수 있다. 촛불혁명으로 아직 민주주의가 완수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지개요, 하늘의 끝과 같은 것이다. / 김헌범 논설위원, 제주한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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