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칼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본 회퍼 목사,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

“우리는 죽음의 특징 가운데서 선한 구석을 발견하고 죽음과 거의 화해한 상태다. 사실 우리는 이미 죽음에 속해 있음을 느끼고, 새로운 날 하루하루가 기적임을 느끼고 있다. …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한다. 나는 죽음이 더는 우리의 허를 찌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이 우연히, 불시에, 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다가오기보다는, 우리가 삶을 충만히 사는 힘을 다한 뒤에 다가오기를 바라지만, 전쟁을 겪고 나서는 감히 그런 소망을 더는 털어놓지 못하고 있다. 죽음을 죽음답게 하고 기꺼이 동의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 외부 상황이 아니다.”

- 본 회퍼 <위험한 죽음>, 1942년 말에서 1943년 초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냄.

디트리히 본 회퍼(Dietrich Bon hoeffer) 목사는 1940년 여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암살을 계획하고 있는 지하 저항세력에 가담했다. 그는 히틀러를 적그리스도(敵, antichrist)로 보았고,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에서  자동차를 몰아대는 미치광이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도 나의 할 일이지만, 내 모든 힘을 다해 운전 그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그는,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기 직전 나치(Nazi-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손에 처형당했다. 베를린대학 교수였던 그는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아침에 교수형을 당했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 그리고 그 1주일 후 히틀러가 자살했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 악에 맞서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악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악에 맞서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은 악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지 않고 나약하며, 그 나약함으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강림했다고 했다. 반(反)나치스 운동에 투신했으며,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수했다. 1935년 비합법적인 포교 활동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교수 자격이 박탈되었고, 1940년 강연·집필 금지처분을 받았다.

그는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지하조직에서 활동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으며 베를린의 터겔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된 동안 1945년 4월  플뢰센베르크의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유언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였으며, 그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은 "디트리히 본회퍼? 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그의 삶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삶의 실천이다. 그는 히틀러에 추종했던 독일 기성교회에 대해 '값싼 은혜를 나누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가 말한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를 따름이 없는 은혜, 그리스도를 따름에 따른 고난이 없는 은혜, 성육신의 실천이 없는 은혜이기도 하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 없는 신앙은 싸구려 신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011년 작 '디트리히 본회퍼-목사, 순교자, 예언자, 스파이'
출처=YES24

그는 미국과 영국을 돌아다니며 나치당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결국 히틀러 암살을 감행하다가 여러 번 실패하고 히틀러가 죽기 3주전 나치당에 의해 죽게 된 것이다. 그는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두 가지 존재 방식에 의해서만 성립됩니다.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정의를 위해 실현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는 나치의 종교 탄압정책에 반대한 ‘고백교회(Bekennenede Kirhe)’의 한 사람이었으며,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했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신학서적은 고백교회 시절 집필한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과 값싼 은혜문제를 비판한 《나를 따르라(Nachfolge》, 그리고 그가 수용소에서 편지들을 한데 묶은 《옥중서신 : 저항과 복종(Widerstand Ergebung)》이 그의 사후 출판되었다. 

《옥중서신》은 그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1943년 4월 5일부터 1945년 4월 9일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까지 친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그는 히틀러의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끊임없이 독서하고 사색하고 편지 쓰는 일을 쉬지 않았다. 편지에는 신학, 설교, 시 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하느님, 나는 내 백성의 자유를 위해 영원 속으로 걸어갑니다. 나에게 용기를 주신 하느님, 나는 이 백성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짐을 함께 나누어지려고 합니다. 주님처럼 장하지는 못하지만 비겁하지는 않게 도와주십시오. 오, 내가 주님께 갑니다. 내 지팡이는 쓰러졌습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십시오"

- 본 회퍼 《옥중서신 : 저항과 복종(Widerstand Ergebung) 》중에서

박진경 연대장을 살해하라

선그라스 스물셋

부관과
운전병에게 주어서
그들도 쓰게 했다

제주도 11연대
신임 연대장 박진경 중령
본관의 부친께서는
일본제국 대정익찬회 요직에 앉아계셨다
고로 그 분께서는 공산주의와는 아주 먼 곳에 계셨다

이곳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 명을 전원 희생시켜도 무방하다

대한의 아들 국방경비대는

제주도는 돼지의 땅이야
제주도는 바다 맡으로 침몰시켜 버려야 해

- 고은의 시 만인보 2115 ‘박진경 중령’ 부문

박진경(朴珍景)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 일군 소위로 임관되어, 제주도에 주둔한 일본38군단 소속이었다. 소대장으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경비대에서 활동하여 미군정의 호감을 샀다. 1948년 5월 6일 제9연대장으로 제주도에 부임해서 취임 1개월 만에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본격적인 4.3진압이 시작되면서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6월 12일까지 6천명 이상의 주민을 체포하였다. 체포된 주민은 어린이, 여성, 노인을 가리지 않았다. 강경 진압이 계속되자 모병제를 통해 입대한 제주 출신의 군인들은 동족을 살해한다는 자책감 때문에 괴로워했다

5월 20일 제9연대 1대대에서 부사관과 사병 41명이 대규모로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탈영병들은 주로 제주출신이었다. 그 결과 6월 1일 제9연대는 국방경비대 제11연대가 제주도로 배치되면서 해체되고, 제9연대는 제11연대로 통합되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에 내려온 고문관들. 제일 오른쪽이 박진경 11연대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박진경은 4.3토벌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산화한 '창군 영웅'이라는 시각과 출세를 위해 무차별 토벌을 강행한 ‘민족 반역자’라는 시각이 함께 공존한다.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 강력하고 적극적인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를 ‘초토화진압작전’이라고 일컬었다.

1948년 6월 17일 그는 통합된 제11연대의 연대장으로서 대령으로 승진하여 피로연을 열었다. 요정 옥성정에서 미군 장교와 11연대 참모가 동석하였다. 6월 18일 새벽 1시. 귀가하여 잠이 들었는데, 3시 35분 한방의 총성이 울려 퍼지더니 숨을 거두었다. 손선호(孫善鎬) 하사가 M1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스물여덟 살 박진경은 그렇게 죽었다 

그가 제주에서 연대장으로 근무는 불과 42일이다. 연대는 제주농업고등학교의 옛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이곳 숙소에서 암살당한 것이다. 그 후 윌리암 딘(William F.Dean) 미 군정장관은 그의 시신을 싣고 상경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국군장 1호로 기록되었다. 정부에서는 그를 준장으로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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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박진경 연대장 고별식. 딘 군정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유일하게 제주에서만 5.10선거가 무산되자, 미군정은 제주 최고사령관으로 브라운( Rothwell H. Brown) 대령을 임명했다. 그는 '원인에는 흥미가 없고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 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브라운 대령과 함께 실제 작전을 수행할 신임 연대장이 바로 박진경이다.

사실 미국은 그를 '극우주의자(the extreme rightist)'로 평가했다. 그가 부임하자 ‘제주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모조리 휩쓸어서라도’라는 브라운 대령의 말을 따르는 형국이었다. 군은 6주 만에 무려 약 6천 명을 체포했다. 대부분은 중학생과 노인을 포함해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박진경의 대령 진급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은 덕분이었다.

내가 한 일은 다만
1948년 그 사내가 안동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

제주 도민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지휘관을 암살한,
국군이 국민에게 결코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던
대한민국 제1호 사형수 문상길 중위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향년 스물셋 사내, 고향은 안동

임하댐 수몰된 안동 마령리 이식골
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그 사내가 살던 곳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사진 몇 장 찾은 것

소년처럼 해맑은 사내의 마지막 웃음
두 손 철사로 묶인 채 나무 기둥에 결박당한 몸
가슴에는 휘장 대신 표적, 흑백사진 붉은 피는
두 눈 가린 채 목이 꺾인 사내의 최후 진술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가 살던 집을 찾아낸 것

300년 문화재 기와 까치구멍집 건재한 사내의 생가
수몰을 피해 남후면 검암리로 옮겨 앉은 남평문씨 종가

72년 만에야 불귀 주인 소식 전해들은 까치구멍집

무자년 사내가 가고 72년 만에 내가 한 일은 다만 그의 흔적을 찾은 것일 뿐, 고작 대문간에 막걸리 한 잔 올리고 그의 죽음을 전하는 일이었을 뿐, 그 사이 하늘나라 법정에서 받아놓았을 그 사내의 판결문을 이 집 우체통에 전해주는 일은 그 날 이후 남겨진 모든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음복주를 마셨다. 경자년 경칩 무렵, 복수초가 까치구멍집 화단에 피어 있는 날이었다.

- 안상학의 시 ‘기와 가지구멍집’ 부문

박진경이 암살된 후 범인을 찾지 못하고 수사가 미궁에 빠졌을 때, '제3중대장 문상길(文相吉)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를 잡아보면 사건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투서가 들어왔다. 이 투서를 근거로 조사를 진행한 결과 관련자들은 모두 자백하였다.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8명으로 문상길 중위를 비롯해 강승규 일등중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양회천 이등상사, 신상우 일등중사 등이다. 암살의 지시를 내린 것은 문상길 중위이고 직접 숙소로 들어가 발포한 사람은 손선호 하사였다. 암살에 연루된 군인은 모두 9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체포되지 않은 한 명은 탈영하여 무장대로 들어간 것이다. 이들은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사건 경위를 자백하였다. 문상길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학교 3기 출신으로 1948년 4월 당시 9연대 모병 담당관 겸 중대장이었다.

문상길 중위 생가인 기와 까치구멍집.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69호로 지정됐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문상길 중위 생가인 기와 까치구멍집.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69호로 지정됐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문상길 등은 1948년 7월 12일 서울로 압송되어 법정에 섰다. 법정에서 문상길 등은 박진경이 일본군 출신으로 제주도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데 앞장선 민족반역자였다는 점을 들어 오히려 국방경비대의 위신을 저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에 대한 선고 공판은 정부 수립 하루 전에 열렸다. 재판부는 문상길 중위를 비롯해 사건에 연루된 신상우·손선호·배경용 하사관 등 4명에게 총살형을 언도했다. 또 양회천에게는 무기징역을, 강승규에게는 5년 징역을 각각 선고했다. 그런데 변호인의 감형 진정서가 제출되고, 각계에서 감형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총살형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었다. 그 덕분인지 신상우·배경용에 대한 총살형은 집행 직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문상길은 최후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붉은 산기슭의 총탄  

1948년 9월 23일 하오 3시 35분. 경기도 수색기지의 이름 없는 붉은 산기슭에 터져 나온 10발의 총탄은 두 젊은 생명을 빼앗아갔다. 제11연대 육군 중위 문상길, 일등상사 손선호. 그리고 미군장교 2명, 관계인 장교, 그리고 기자 입회하에 두 사람은 총탄을 받았다. 

사건 관계자는 10명. 그 중 8월 14일 고등군법회의 최후언도에서 총살형이 선고된 피고는 문상길, 손선호, 배경용, 신상우 도합 4명이었다. 그러나 총살형 집행직전 배경용과 신상우 양인은 특사에 무기형으로 감형, 결국 두 사람만이 그 형의 집행을 받게 되었다. 

수색 국방군 제1여단 사령부 정문을 떠난 대형 미군트럭 한 대에는 석 달의 영창 생활에 여윌대로 여윈 문상길과 손선호가 수갑을 찬 채 군기병의 호위 가운데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자동차는 벌거벗은 산과 산모퉁이를 감돌아 준비된 사형장에 도착하였다. 네모로 깎은 말뚝이 둘, 붉은 산기슭에 나란히 서 있다. 그 하나의 말뚝을 향하여 최후의 담배를 피우고 난 허리끈 없는 장교복 문상길이 천천히 걸어간다. 

군기사령관인 사형집행 장교에 의하여 총살형 집행장이 낭독되고 마지막 유언의 기회를 준다.

“스물세 살을 최후로 문상길은 갑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군대입니다. 마지막 바라건대 ×××의 ××아래 ×××의 ××아래 ××를 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말기를 바라며 갑니다.” 

외치는 음성도 아니며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청청한 마지막 말에 화답하는 산울림이 영롱할 따름이다. 몸이 말뚝에 묶인다. 하이얀 수건으로 두 눈을 가렸다. 왼편 가슴 심장 위에 검은 동그라미 사격표식이 붙여졌다. 10m의 거리를 두고 다섯 명의 사격수가 쏜 총탄 다섯 발은 기어코 문상길의 가슴을 뚫었다. 하오 3시 35분. 

뒤이어 말뚝을 향하여 다시 손선호가 걸어가며 미소를 띤 얼굴로 상관들에게 일일이 목례를 한다.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던 군가나 한마디 부르고 저 세상으로 가겠습니다.” 발을 멈추고 머리를 하늘 쪽으로 돌려 노래를 부른다. “혈관에 파도치는 애국의 깃발, 넓고 넓은 사나이 마음,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들어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 천지를 진동하는 승리의 함성……” 

사형집행 3분전이다. 손선호는 유언으로 “훌륭한 조선군대가 되어 주십시오.” 단 한 마디. “겨누어 총.” 이 때 “오! 3천만 민족이여!” 손선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이 말이 사라지기 전에 “쏘앗.” 다섯 발 M1 총알은 손선호의 가슴을 뚫었다. 이때 하오 3시 45분. 1948년 9월 23일 하오 3시 35분, 동 45분, 서울 북쪽 수색 동방 5리 지점에서 일어난 총성은 그쳤다. 이들은 대한민국 사형집행 1호요, 아름다운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순교자들이었다.

제주시 충혼묘지에 있다가 지장물로 지정돼 철거된 박진경 추도비가 지난주부터 제주시 어승생한울누리공원 인근(산록북로 변)으로 이설작업이 진행 중이다. 박진경 추도비(맨 왼쪽) 등 총 4기의 비석이 이설 작업 중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시 충혼묘지에 있다가 지장물로 지정돼 철거된 박진경 추도비가 지난주부터 제주시 어승생한울누리공원 인근(산록북로 변)으로 이설작업이 진행 중이다. 박진경 추도비(맨 왼쪽) 등 총 4기의 비석이 이설 작업 중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문상길과 손선호를 석방하라”

언제든지 범죄에는 범행 동기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법에 의하여 범죄의 공정한 처단을 가할 목적으로 재판이 존재하는 것이며, 결과를 초래한 동기와 원인이 중심되어 심리되는 것이다. 문상길 등은 상관을 살해한 범인으로서 취급되었으나 이들의 최후 진술은 언론에 상세히 보도되었다. 

김관후

재판 중 진술한 고문에 대해서는 변호인이 고문에 의한 자백은 증거 능력이 없다고 강하게 항의하였다. 그런데 사형집행 한 달여 전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각계에서 판결이 과하다며 감형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8월 30일 하오 5시경 서울시내 화신5층으로부터 돌연 수많은 전당이 가두에 살포되었는데 전단의 내용은, 문상길에 대한 사형집행을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진보단체들은 연달아 문상길과 손선호를 석방하라고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사형을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을까? 사건 당시 범인들은 상관을 살해한 범인으로서 취급되었으나, 이들의 최후 진술은 언론에 상세히 보도되었다. 변호인이 고문에 의한 자백은 증거 능력이 없다고 강하게 항의하였다.

법학가동맹에서는 고(故) 박대령 살해사건에 관련하여 26일 “제주도민 30만을 위하여서나 또는 민족적 정기에서 보더라도 가해자 손선호(孫善鎬) 등 4명에 대해서 총살형에 처한다는 것은 범행동기를 전혀 무시한 것으로 용납할 수 없음을 법학도의 입장에서 강경히 주장한다”는 견해를 발표하였다.

- 조선일보, 1948년 8월 26일 보도


경비대 박대령 암살 피고인 문상길(文相吉) 외 3명에 대한 총살형 언도에 대하여 28일 인권옹호연맹에서는 “이번 제주도 사건에 있어 사실을 통해 볼 때 피고인들은 결코 사감(私感)에서가 아니라 실로 민족을 사랑하는 정의감에서 범행을 감행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형의 양정(量定)은 반드시 범죄의 동기를 참작한다는 행형상(行刑上) 대원칙에 의거하고 민족정의를 수호하는 견지에서 감형의 재결이 있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서울신문 1948년 8월 29일


어제 31일 기민(基民)에서는 문중위 총살언도에 대하여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제주도사건을 무력으로 해결 지으려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전제하고 “문중위가 박대령을 암살한 동기는 애국순정에서 나온 민족정의의 수호에 있으므로 사형언도는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동시 “그 감형을 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1일 보도


조국의 통일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5.10선거를 반대하고 봉기한 제주도민의 위대한 애국성을 박대령은 학살과 고문과 총검으로써 전 도민을 소탕하려한 것이다. 이는 박대령이 제2차 대전중 간도(强盜) 일제에 자긴 학병으로 나가 충성을 다하였던 자이며 해방 후는 그들의 새로운 주인에게 그 충성을 드리는데 전 도민의 무차별 학살로써 진충(盡忠)하였으며 그를 계속하려 하였다. 이에 분연하고 동족살상을 묵과할 수 없는 민족정기에서 문중위 등 제씨는 박대령을 살해한 것이다. 이런 애국애족열에 불타는 의거를 불구하고 사형판결이라는 그 부당성을 재일60만을 대표하여 지적하고 취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 

-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1일 

/ 김관후 시인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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