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희의 예술문화이야기] (50) 홍성석 회고전 즈음에

몇 년 전 작가 H가 건입동주민센터(건입동행정복지센터) 근처로 나를 이끌었다. H는 비탈길 벽면에 붙은 부조들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알던 한 작가가 만든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 작가는 몇 년 전 사망했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사람이라면서 2007년에 제작한 작업이 햇빛과 비와 눈을 버텨내고도 금이 간 데가 하나도 없다고 칭찬했다. 동료 작가의 죽음에 애도하면서 원도심 골목 한 켠에 남은 작업을 알리려는 그의 관심과 친절에 고개가 숙여졌다.

사망한 작가에 대한 H의 관심과 친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건입동주민센터에 들려서 혹시라도 부조 작업들에 문제가 생기면 연락 달라며 전화번호를 남겼다. 그리고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뒤 H에게 연락이 왔다. 그 벽면 일부를 허무는 공사를 할 예정인데 와서 봐달라는 주민센터의 전화였다. 부리나케 달려간 H는 자칫 폐기물로 사라졌을 수도 있던 부조 작품을 구해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비록 일부만 철거되었고 나머지 부조 작업들은 아직도 비탈길에 남아서 관심을 기다리고 있지만 건입동주민센터의 관심과 기억이 없었다면, 그리고 H의 관심과 배려가 없었다면 작품들은 그냥 사라졌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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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입동주민센터 인근의 홍성석 작가 부조 작업들. ⓒ양은희

H가 애도하고 보살핀 그 작가의 회고전이 지금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 <홍성석: 인간의 절망을 표현하다>(2022.01.25~04.17.)의 주인공 홍성석(1960-2014)이 바로 그 작가이다. 이 전시도 관심과 친절 덕분에 이루어졌다. 한 미술교사가 철거물로 버려질 뻔 했던 그의 작품들을 보관하다가 미술관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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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석 회고전, 제주도립미술관. ⓒ양은희

이충열은 2014년 6월 서울 명지중학교의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어느 날 지인의 전화를 받고 도봉구의 한 건물을 방문하게 된다. 당시 이 건물에는 홍성석의 작업실이 있었으나 그가 사망한 후 아무도 물건이나 작품을 챙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자 건물주는 작업실을 비우려고 철거작업을 요청했고 철거를 시도하던 이가 겹겹이 쌓인 그림을 보고 의견을 구하고자 미술교사 이충열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철거를 맡은 이도 이충열도 홍성석과 일면식도 없고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충열은 자신 앞에 놓인 180여점의 작품이 단순한 습작이 아니라 작가의 개성과 주제의식이 돋보인다는 점을 묵과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냥 버리기는 아깝다는 생각에 트럭에 작품들을 싣고 집과 학교에 보관하게 된다. 말이 보관이지 타인의 작업 180여점을 보관한다는 것은 상당한 애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더 나아가 아들과 함께 작품 하나씩 사진을 찍고 정리하고 홍성석에 대해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두 사람의 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그러나 180여점은 보관하는데 많은 공간을 요한다. 우여곡절 끝이 홍성석 작가의 유족을 만나게 되었으나 유족 역시 작품을 보관할 처지가 아니었다. 최근 미술교사로 은퇴하게 된 이충열은 홍성석의 고향인 제주에 있는 제주도립미술관에 기증하기로 결심한다. 2021년 도립미술관측은 유족의 동의를 얻어 기증의사를 밝힌 작품 중에서 21점을 골랐고, 미술관 소장품에 이미 들어와 있던 홍성석의 작품과 더불어 그의 회고전을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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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석, 탐라별곡 02, 2007. ⓒ양은희

제주출신 작가 홍성석은 어떻게 서울 도봉구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었을까? 그는 제주시 외도에서 태어나 제주제일중, 오현고, 세종대를 거쳐 제주대를 졸업했다. 1993년 제주도미술대전에서 수상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고 1993~98년 사이 오현중학교 미술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실망하면서도 부산청년비엔날레(1992), 독일 스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초대전(1995), 스위스 바젤의 Fabian Walter Gallery 초대전(1995) 등 국내외의 전시에 참여하며 경력을 이어갔다. 섬에서 살고 작업하면서도 세계의 미술 속으로 들어가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듯이 그도 작품에 몰두하며 사는 전업 작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꿈을 실현하고자 교직을 그만두고 ‘인터아트코리아’라는 회사를 차려서 미술작품 판매 활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자신만의 주제를 찾고자 제주시의 도두, 이호를 거쳐 2003년경 선흘에 작업실을 내고 제주 중산간 지대가 주는 공기와 자연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2005년에는 제주의 동료 작가들과 ‘창작공동체 우리’를 만들어 활동하는데 이즈음 그는 이 단체 회원들과 ‘탐라순력도-바람의 길’을 통해 고대 탐라의 신화와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결국 ‘탐라별곡’이라는 연작에다 제주의 돌하르방부터 고사리, 감귤까지 다양한 소재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흘에 집이 늘기 시작하자 태고의 제주를 느끼고자 중산간 깊숙이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2008년 현인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나의 정원-자라는 숲>을 마지막으로 그는 홀연히 제주를 떠나 서울 도봉구에 터를 잡았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제주의 자연에 빠져있던 그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수백 점의 작품을 들고 삭막한 대도시의 번잡함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작품과 같이 운명을 다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심과 친절이 그의 작품을 구해 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어진 여러 사람의 관심과 친절 덕분에 홍성석의 작품들은 이제 막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죽음 이후에 본격적인 생이 시작된다.

# 양은희

양은희는 제주 출생으로 뉴욕시립대학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과 미국에서 큐레이터 및 평론가로 활동해 왔다. 현대미술과 미술제도에 대한 다수의 논문과 저서, 번역서를 발표했다. 저서로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2017, 공저) ▲디아스포라 지형학(2016, 공저) ▲뉴욕, 아트 앤 더 시티(2007, 2010) 등이 있다. ▲개념 미술(2007) ▲아방가르드(1997) ▲기호학과 시각예술(1995, 공역)을 번역했다. 현재 스페이스 D의 디렉터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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