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백조일손 영령 54주기 합동위령제 봉행

▲ 김태환 지사, 강호남 도의원, 신철주 북군수, 강기권 남군수가 분향하고 있다./오른쪽부터
6.25 발발 직후 예비검속으로 붙잡혀 계엄군에 의해 집단학살 당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백조일손 영령 54주기 및 제12회 합동위령제’가 22일 오전10시 안덕면 사계리 백조일손 묘역에서 열렸다.

김태환 지사를 비롯해 신철주 북제주군수, 강기권 남제주군수, 강호남 도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합동위령제에서 유족들은 54년전 국가공권력의 반인륜적 만행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혼들을 위로했다.

헌화와 분향, 추도시 낭독, 경과보고 순으로 진행된 이날 합동위령제에서 조정배 백조일손 유족회장은 주제사를 통해 “지금으로부터 54년전, 경인년 칠월칠석 견우와 직녀가 상봉한다는 날, 임들은 우리 곁을 떠나셨다”면서 “이는 6.25전쟁으로 비롯된 위정자들의 오판과 인명경시의 반인륜적 만행이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범죄행위로써 통치권자의 죄악의 산물이었다”고 말했다.

조정배 회장은 “우리 유족들은 그동안 악몽과 같은 무소불위의 정권하에서 억울함도 토로하지 못한 채 피해자임에도 그 피해 사실을 숨기고 속으로만 한을 쌓아야 하는 고통의 삶을 살아왔다”고 그간의 한을 토한 후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정부의 일부 수구세력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가해자 자신들의 처지를 정당화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인 지위를 계속적으로 생산하는데 혈안이 돼 왔다”며 분개해 했다.

조 회장은 “지난해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정부차원에서 대국민 사과가 있었으나 그 결과 우리에게 돌아온 반대 급부는 무엇이냐”고 묻고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 정부의 사과는 물론 철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뤄지도록 노력하겠다고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예회복에 앞선 진상규명 과정에서 많은 도전과 방해를 여전히 받고 있다”며 일부 수구∙우익세력들의 진상규명 방해책동을 강력히 비난했다.

▲ 유족들이 묘역을 향해 합장하고 있다.
조 회장은 “1950년 8월 예비검속 당한 대부분의 희생자들의 사망일자와 희생장소 조차 모르고, 유족들은 통한의 세월을 보내며 불효의 한을 되새기고 있는 현실”이라면서 “범죄를 의도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것은 또 하나의 범죄 집단이며, 왜곡을 풀지 않는 사회와 국가는 미래의 희망을 열어나갈 수 없다”면서 예비검속 희생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김태환 지사는 추도사에서 “영령들께서는 한국전쟁 와중에 너무나도 억울한 희생을 당했으며, 당시 불귀의 객이 되신 영령들을 생각하면 충격과 비통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면서 “여기 잠들어 계신 영령들의 죽음은 우리 제주전체의 아픔”이라며 영령들의 억울한 죽음에 머리를 숙였다.

김 지사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분들과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야 말로 후손된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단순히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는 자리가 아니라 앞으로 다시는 이 땅에 백조일손과 같은 비극과 슬픔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을 모아 평화의 새 지평을 일어나가야 할 것”이라며 화해와 상생의 날을 열어갈 것을 약속했다.

 

▲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령들을 위해 묵념하고 있는 유족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예비검속'의 실체

▲ 비극의 씨앗이 된 예비검속 = 1950년 6월5일 6.25가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은 당일 오후2시 요시찰인 전원을 구금할 것을 전국 경찰서에 지시했고, 제주에서는 이 때 1200여명이 예비검속을 당했다.

그 중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는 347명이 검거돼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와 한림 어협창고, 각 지서 등에 분산 구금 당했다.

▲ 반인륜적 양민학살 = 북한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자 정부는 수도를 대전을 거쳐 대구, 그리고 8월 18일에는 부산으로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육군본부 정보국 제4과(CIC) 김창령 과장(당시 대령)의 지시에 의해 경찰이 분류한 C,D급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처형이 시작돼 모슬포 경찰서 관내 347명 중 60명은 1950년 7월 16일 군에 인계돼 집단학살을 당했다.

또 8월20일(응력 7월 7석) 새벽 2시에 한림 어협창고와 각 지서에 붙잡혀 있는 구금자 중 63명, 새벽 5시경에는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 구금자 132명이 계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모슬포 주둔 해병 제3대대(대대장 김윤근소령)에 의해 송악산 섯알오름, 파괴된 일본군 탄약고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제주경찰서 관내와 서귀포 경찰서 관내에 구금된 양민들은 처형된 일시와 장소도 모든 채 불귀의 원혼이 됐다.

▲ 천인공로할 암매장과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안장 = 계엄당국은 반인륜적 학살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유족의 시체 인도를 무자비하게 거부해 비명과 절규의 외마디가 가시지 않은 선혈이 낭자한 시체 위에 미리 준비된 돌덩이로 짓눌러 암매장하고 그 일대를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으로 설정, 무장 군인들이 경비해 왔다.

시신인도를 거부하던 군 당국은 유족들이 시신을 인도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자 사건 발생 5년 9개월만에 시신 수습이 허용됐다.

유족들은 1956년 5월 18일, 6년 가까이 흙탕물 속에 묻혀 억눌리고 뒤엉킨 시신의 인양을 위해 양수기로 물을 뽑아내고 유골을 발굴했으나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는커녕 작은 뼈는 거의 흔적조차 없어져 132개의 칠성판 위에 머리 하나에 등뼈, 팔, 다리 뼈들을 적당히 맞추어 132구로 구성하고 유족의 지성으로 마련한 지금의 묘역에 안장해 '백조일손지지'라고 명했다.

백조일손(百祖一孫)이란 조상이 다른 일백 서른 둘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한날 한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됐으니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 군사정권에 의한 묘비 파괴와 강제 이장 = 유족들은 1959년 5월 8일 백조일손 묘역에 묘비를 건립했으나 5.16군사정권은 정부가 자행한 반인륜적 만행의 흔적을 없애도록 경찰에 지시, 1961년 6월 15일 서귀포경찰서장의 지휘로 모슬포지서 급사로 하여금 묘비를 파괴하도록 하는 한편, 유족들에게 강압적으로 집단조성된 백조일손 묘역을 해체하도록 해 일부 유족들은 제2의 잔인한 피해를 의식해 23위를 다른 곳으로 이장했으나 41년만인 2002년 4월 5일 7위를 지금의 묘역으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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