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교육혁신, ‘이너 타일’ 방식으로 가자③-학교교육을 우뚝 세우자

'학교가 무너지면 미래는 없다'라는 책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교실에 학생들은 그득 차 있고 교사도 있건만, 교사와 학생 사이의 정겹고 진지한 상호작용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기괴한 교실, 이런 교실에는 애정과 믿음 대신에 서로에 대한 불신과 소원(疏遠)이 있을 뿐이다. 학생들은 배우려 하지 않고 교사들도 가르치려는 의욕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삭막한 교실을 일컬어 사람들은 교실붕괴라 한다.(학교가 무너지면 미래는 없다, 이상주 외, 교육과학사)

그러나 이런 책도 있다.

학교장이 학교에서 수업에 관련된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고 학교풍토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일 수는 있어도, 교실풍토는 교사가 만든다. 우리들은 아마 교무실이나 복도는 따스하고 우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교실은 부정적이고 비우호적인 분위기를 갖는 그런 학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학교풍토는 몹시 부정적이지만,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교실환경을 긍정적인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보석 같은 교사’를 가끔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교사는 생산적이고 과업지향적인 풍토를 유지하며 동시에 교사와 학생들 상호간에 긍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한다.(학교교육과 커뮤니케이션, 김학준 옮김, 교육과학사)

전자는 우리의 현실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후자는 대안을 위한 발상 전환의 근거를 시사한다. 학교풍토 혹은 제도나 외부환경이 어떠하든 아이들 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장’은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의 궁극적 접점은 학생과 교사가 만나는 그 지점이다. 그것은 교실일 수도 있고 ‘교과’일 수도 있다. 적어도 교육자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에 서있기 위해서는 최후의 시선은 아이들에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달리 호구지책을 구해 마땅하다. 선생님은 누가 뭐라든 그냥 노동자는 아니다.  

그래서 교원평가는 필요하다. ‘공차라’, ‘풀어라’, ‘엎드려 뻗쳐’로 방편을 일삼는 교원은 그에 걸맞게 평가되어야 한다. 어떤 형식이나 이름을 달든 교육자의 자격과 능력이 있는가는 합당한 방법으로 평가되고 냉엄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노사’가 협상을 한다면 그 자리에는 교육수요자로서의 학부모 혹은 학생의 역할이 적절하게 배치되어야 한다. 평가과정에 심각한 과오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사례별로 대처하면 된다. 대한민국에는 무한자유 막강언론이 있고, 강철대오 교원단체들이 있지 아니한가? 게다가 교육감도 교육의원도 주민직선이 아닌가? 주민여론의 이름으로 그들을 호령하고 그게 안통하면 내치면 된다.

학교도서관은 ‘보석 같은 교사 혹은 그런 교사가 되려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원군이다. 교사의 대체적인 교육력은 독서로 말미암는다. 학생들이 교과와 관련된 책을 많이 읽으면 수업이 잘 이해되고 따라서 재미있어진다. 교사가 교과와 관련된 책을 많이 읽어두면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기가 훨씬 쉬워지고 무엇보다도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여유로움이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수업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지적인 희열, 항상적인 자신감,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의 상당 부분은 독서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교사는 아이들에게 권할만한 도서목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두 종류다. 하나는 교양도서다. 교사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책, 혹은 인터넷을 검색하여 얻을 수 있는 ‘필독교양서’ 목록이며, 둘은 교과연계도서이다. 담당교과와 관련된 도서목록을 난이도에 따라 다양하게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 쓰나미처럼 들이닥치고 있는 ‘통합논술’을 위한 가장 효과적 대책도 독서에 있다. 이때 그냥 ‘책을 읽어라’보다는 ‘이 책을 읽어 보아라’가 낫고, 그보다는 ‘이 책은 우리 학교도서관에 있다’가 훨씬 더 낫다.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방과 후에 학교도서관으로 달려갈 것이다. 모두 당장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선의의 경쟁심을 갖고 있다.

학교도서관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퉁퉁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책장을 넘기며 기쁨으로 고동치는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래서 학교도서관은 학교 제일의 필수품이다. 학부모는 아이 학교 선택권이 있다면 학교도서관을 일차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만약 학교도서관이 없거나 허술하다면 세금을 내는 국민으로서 당당하게 요구하라. 수업이 끝나자마자, 클랙션 소리 울리며 교문을 빠져나가는 ‘네 시 반 땡’은 교육에 대한 배신이다. 선생님들의 퇴근시간은 좀 늦어져도 된다. 학교도서관은 방과 후에도 불이 켜져 있어야 한다.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이 없다고? 과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교장과 교감과 행정실은 다만 현장 서포터즈(supporters)일 뿐이다. 그리고 교육청은 야전 병참기지이며, 교육부는 병참본부이다. 그들은 각기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학교의 주인은 교사와 학생들이다. 학교가 왜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주장은 달리 입증할 필요조차 없이 자명하다. 학교의 일상을 보라. 교장 교감 행정실이 없어도 교사와 학생들만 있으면 학교교육은 이루어진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그러한가? 그렇듯이 학교교육의 성패의 궁극적인 관건은 선생님이고 아이들이다. 교실은 성이며 선생님은 성주이고 아이들은 백성이다. 그곳은 불가침의 성역이다. 그만큼 성주로서의 선생님의 성품과 능력은 중요하고도 중요하다.

Haim Ginott가 청년교사 시절에 쓴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는 놀랄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교실에서 결정적인 요소이다. 교실 풍토를 결정하는 것은 내 개인의 태도이다. 교실의 기상은 나의 그날 기분에 따라서 좌우된다. 교사로서의 나는 아이들의 생활을 비참하게도 즐겁게도 만들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나는 고민거리의 원인일 수도 있고, 혹은 기막힌 영감을 빚어내는 연장일 수도 있다. 나는 창피를 줄 수도 있고 혹은 기분을 맞춰줄 수도 있으며 감정을 해할 수도 있고 상처를 낫게 할 수도 있다. 모든 상황에서 어떤 위기가 점차 확대될 것인지 감소될 것인지 그리고 한 어린이가 인간답게 될 것인지 짐승처럼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의 행동이다.(Teacher and Child, 1972)  

   
 
 
그렇다. 학교가 우뚝 설 수 있느냐, 그것은 교사에게 달려 있다. 단언컨대, 입시제도도 아니고 사학법도 아니다. 삐거덕거리는 낡은 책걸상으로 공부해도 잘만 뻗어 나가던 아이들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재정보다 더 중요한 게 따로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선생님들의 모임인 교원조직의 의제설정의 우선순위, 그리고 주도면밀한 실천여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과연 우리 교원조직들의 그것은 어떠한가? 학교를 세우는 결정적 요소인가? 아니면 그저 이름일 뿐인가? 아니면 그냥 압력단체나 이익단체일 뿐인가? 아니면 그저 어중간한 보험회사일 뿐인가? ‘보석 같은 교사 혹은 그런 교사가 되려는 이’가 교원단체의 궁극적 목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학부모의 궁극적 관심사이기도하다. 그래야 학교가 우뚝 서고 아이들이 산다.

[ 이어도교육문화센터 이사장 김학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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