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9천회 맞은 시사만화 황우럭 주인공 양병윤 화백
한국언론 두번째 최장수 기록 "시사만화는 권력과 담 쌓아야"

앞으로 2년 후면 한국에 ‘시사만화’가 선보인지 꼭 100년이 된다. 1909년 6월 2일 창간된 대한민보에 이도영이 삽화를 발표하면서 우리나라 시사만회의 시효가 됐다. 

신문을 받아들고 1면 머리기사 제목과 사회면 톱기사 제목을 대충 훑어 본 후 다음으로 눈이 가는 게 바로 시사만화다. 그날 하루의 뉴스를 압축한 엑기스가 바로 4컷과 1단짜리 만평이다. 시사만화를 보지 않으면 그날 신문을 읽었다고 할 수가 없을 정도다.  ‘앙꼬 없는 찐빵’은 있어도 시사만화 없는 신문은 없다.

언론탄압과 검열이 극심했던 일제시대, 그리고 70~80년대 군사독재시절 검열관의 눈을 피해 국민들에게 해악과 풍자를 가져다준 게 시사만화였다. 특유의 과장·풍자를 통한 저항정신으로 권력자들을 비판했고, 독자들에게는 짜릿한 통쾌감을 주었다.

제주에서 한국언론사의 또 다른 획을 긋는 위대한 기록이 작성됐다. 1968년 5월 10일 제주신문(현 제주일보 전신)에서 사회면 상단에 4컷 시사만화로 첫 등장한 ‘황우럭’이 6일로 9000회를 맞았다.

한국언론사상 두 번째 최장수 기록 달성...40년 시사만화 인생

▲ 제주도민들에게 가장 친근 한 벗인 '황우럭'이 6일로 9000회를 맞았다. 코리아인터넷방송에서 9천회째를 연재한 양병윤 화백.
‘고바우영감(김성환, 1만4139회)’ ‘왈순아지매(정운경, 8829회)가 끝이 났고, 현재 동아일보에 연재되는 나대로선생(이홍우)이 8499회다. 6일로 9000회를 맞은 황우럭은 지방언론에선 단연 군계일학이요, 한국 언론사에서도 고바우영감에 이은 두 번째 최장수 시사만화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제주신문에서 출발해 제민일보와 제주타임스를 거친 후 현재는 코리아인터넷방송에서 황우럭 9000회 대기록을 달성한 주인공 양병윤(63) 방송위원 화백을 만났다.

-정말 대단한 기록인데 9000회라면 도대체 몇 년 동안 시사만화를 그린 건가.
“1968년 5월 10일자에 황우럭이 탄생됐다. 그동안 회사를 옮기면서 몇 번 쉬기도 했으나 40년동안 시사만화를 그려온 셈이다. 그리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동안 황우럭을 아끼고 성원해 준 독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우리나라에서는 고바우영감에 이어 두 번째 대기록이다. 시사만화가로 입문하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유년시절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코주부(김용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학원이라는 월간지에 나오는 코주부 3국지를 보면서 습작을 했다. 종이가 없으면 운동장 바닥에다가도 그림을 그렸다. 당시 미대를 가려고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미대 꿈을 접고 서울에서 발간되는 ;아리랑‘이란 잡지에 지금으로 본다면 독자투고 형식으로 만화를 실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제는 고인이 되신 김선희 제주신문사장과 최현식 편집국장이 연락이 왔다. 칠성통 중앙극장 뒤에 있는 다방에서 만났는데 대뜸 하는 말이 ’만화를 그리는 것으로 아는데 제주신문에 시사만화를 그릴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을 해 온 게 시초가 됐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제주에는 시사만화가 처음이었나.
“그것은 아니었다. 내가 들어가기 바로 전에 어떤 분이 1개월쯤 시사만화를 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작으로 친다면 그 분이지만 어쨌든 전업만화가로는 거의 1호인 셈이 됐다.”

제주생선으로 서민에게 친근하고 가시가 센 캐릭터 ‘황우럭’

▲ 신구부때 엄청난 고초를 겪었던 양 화백.
- 시사만화 캐릭터마다 나름대로 색깔이 있는데 ‘황우럭’도 독특하다. 어떻게 황우럭은 어떻게 탄생됐나.
“시사만화를 그리기로 하고는 제일 고민에 빠진 게 캐릭터였다. 이름을 뭘로 할까. 서민에게 친근할 수 있는 뭔가를 생각했다. 감자나 고구마, 오징어로 할까 생각하다가 ‘황우럭’을 생각했다. 우럭은 제주의 생선이다. 친근하다. 그렇지만 우럭은 가시가 세다. 가시가 세다는 것은 부정과 비리에 항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도 있다. 우럭에도 여러 가지 우럭이 있다. 돌우럭, 검은우럭도 있지만 역시 붉은 색을 띠는 ‘황우럭’으로 정했다.”

- 그동안 잊지 못한 숱한 에피소드들이 있을 것 같은데.
“정말 너무나 많았다. 특히 지금 되돌아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군사정권시절에는 정말 힘들었다. 전두완 신군부 시대때도 신문사에 계엄군 검열관이 있었다. 신문과 시사만화 전부다 일일이 검열관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 그 때는 은유법으로 그려야 한다. 검열 통과가 어려울 것 같으면 윤전기 돌리기 바로직전에 만화를 갖다 준다, 그러면 대충 보면서 웃음을 짓고는 넘어간다. 그리고 다음날은 어김없이 난리가 난다. 자신들을 속였다고 시도때도 없이  혼 줄이 났다.”

70년대, 신군부시절 언론 검열 피하느라 갖가지 고초..정보부에 시도때도 없이 불려가  

- 가장 기억에 남은 일화가 있다면.
“70년대 아주 분위기가 살벌할 때였다. 113 간첩신고 계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조천에서 간첩이 잡혔다. 주민이 신고했다. 그 분은 1천만원 보상금도 받았다. 그런데 당시는 보로금이 있었다. 간첩이 소지한 미화가 있다면 그것도 신고자에게 준다. 그런데 당시 이 조천 신고자에게는 그것을 안 준 것이다. 이 사람이 보상금을 다 쓰고 나서 1년쯤 있다가 보로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중앙정보부에 항의했다. 그런데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신문사에 와서 억울하다고 제보를 했다. 꺼림칙하면서 당시에 3단 기사를 썼고, 만평은 간첩신고를 한 장면, 그리고는 보로금을 기다리면서 창문에서 중앙정보부를 향해 목이 기다랗다 나온 것을 그리고는 ‘목이 닷발은 빠지겠네’라고 썼다. 중앙정보부가 발칵 뒤집혔다. ‘이적행위’라고 다 잡아들이라고 해서 편집국장과 편집자 그리고 저 포함 3명이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엄청 고초를 겪었었다. 얼굴도 모르고 이혼한 작은 고모남편이 일본에 조련계라고 하면서 조련의 지령을 받았다고 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 우리나라에서는 두번재 최장수 기록인 9000회를 맞아 그린 시사만화.
- 고초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보람도 컸을 것으로 아는데.
“역시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격려해 주는게 가장 큰 보람이다. 시사만화는 그날 그날로 끝나기 때문에 신문이 배달되면 독자들로부터 격려 전화를 받는데 가장 기분이 좋은 일이다.”

- 우스갯소리 같지만 양병윤 화백과 황우럭 중 누가 더 유명한가.
“황우럭이 단연이다. 황우럭이라고 해서 내 성씨가 ‘황’씨로 아는 사람이 더러 있다. 가끔 청첩장이 오는데 황병윤으로 온다. 기분이 좋다. 그 만큼 황우럭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매일 만화를 그려야 하는 긴장감이 건강하게 만든다

- 9000회를 넘기면서까지 현업에 종사할 수 있는 비결이 뭔가.(양 화백은 제주에서 현업에 종사하는 언론인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다)
“예순이 넘어서 65세부터는 노인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표현을 부정적으로 본다. 요즘은 스므살 밖에 안되도 예순살 넘은 것만큼 답답하거나 실리를 따지면 약은 젊은이가 있는 경우도 있다. 또 낭만적으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의식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안된다. 매일매일 만화를 그려야 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긴장감이 건강하게 만드는 것 같다.”

- 매일같이 다른 만화를 그려야 한다. 그림이 안 떠오를 때는 어떻게 하나.
“만화는 교과서처럼 공식이 나오면 풀어가는 게  아니다. 거의 동물적 감각을 필요로 한다. 전광석화처럼 번쩍 지나가는 게 ‘바로 이거다’하고 그린다. 오늘도 인도네시아 정부가 구걸방지법을 국회에 상정한 것을 그렸다. 그린방지법을 만들어 동냥그릇을 깨겠다는 것이다. 현기영 선생의 ‘동냥그릇’이란 책이 있다. 또 걸식하는 김삿갓도 있다. 현기영을 등장시켜 ‘인민구제 하위수준’이라고 꾸짖고, 김삿갓은 쭉짱으로 ‘풍류를 모른다’며 머리를 때리는 것을 그렸다. 비유법이다. 인도네시아를 꾸짖는데 현기영선생과 김삿갓을 동원했다.”

▲ 4단컷 만화를 한 번 그려볼 것을 부탁하자 즉석에서 9000회에 나간 만화를 그렸다. 시간은 불과 3분4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 만화를 그리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버릇이 있다고 하는데 양 화백께서도 버릇이 있는가.
“저는 잘 모르는데 친구들이 말한다. 그림은 대부분 스케치 북에 하는데 종이가 없으면 허공에다 그림을 그린다. 목욕탕에 갔을 때 사람들의 다양한 형태를 본다. 순간적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머리에 입력이 빨라진다. 허공에 그렸던 그림이 머릿속에 남아 있게 된다.”

- 그래도 막힐 때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분은 담배를 피우거나, 또 신문을 들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한다고도 하는데.
“몇 십년간 그리면서 마감시간을 지나 끙끙대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급할 때가 더 좋다. 기사를 쓰거나 원고 청탁을 받게 되면 시간이 촉박해야 글을 쓰게 된다. 만화도 촉박하면 오히려 전광석화처럼 그림이 떠오른다.”

- 담배도 많이 하고, 술도 즐겨하는데. 역시 만화와 상관이 있나.
“담배는 뻐끔담배다. 몇 모금 피워서 던져버리곤 한다. 남들은 양병윤이 술을 굉장히 좋아하고, 잘하는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아니다. 물론 좋아는 한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술 마시는 분위기, 같이 하는 사람이 좋다. 지금도 한라산소주나 진로소주를 구분 못한다. 맥주도 모른다. 절대로 혼자 술을 먹지 않는다. 반주도 않는다. 술집에서 모이면, 갖가지 애환이 나오고, 즐거움이 쏟아진다. 의지투합도 하고, 고집피우는 친구들의 모습이 그립고 좋다. 후배들이 ‘양 선배는 너무 질기다’라고 하는데 후배들이, 술친구들이 좋기 때문이다.”

서민과 함께 하려는 의식이 변하지 않도록 권력과 자본에 스스로 경계

- 언제까지 그림을 그릴 생각인가. .
“주위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욕심이 있다기 보다는 손이 떨리고, 거동을 못하기 이전까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양병윤 화백은 인터뷰 자리에서 4단 컷을 하나 그려볼 수 있느냐고 제안하자 그 자리에서 9000회로 내보낸 만평을 그려냈다. 시간은 불과 3분4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무엇을 꿈꾸겠는가.
“바람이 있다면 1만회를 넘어서면 그 기념으로 그중 몇 작품들을 골라서 단행본을 내는게 소박한 꿈이다. 9천회까지 원화가 집에 다 있다. 또 하나의 꿈은 오늘 이 순간 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의식이 변하지 말았으면, 처음처럼 변질되지 말았으면 하는 게 꿈이자 포부다. 처음 시사만화를 그릴 때 그 생각처럼 내 의식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론인이 생각이 변하면 그것은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슨 사상이 있어서 9000회를 끌어온 게 아니다.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살다보면 때가 묻을 때가 많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경계한다.”

▲ 일평생 40년, 9000회를 서민과 함께 희노애락을 해 온 양병윤 화백. 그는 남은 인생동안 처음에 품었던 생각이 변하지 않은게 마지막 꿈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론인이 생각이 변하면 그것은 시체일뿐이라고 일갈했다.
- 언론사 화백으로서 40년 대역사를 만들었다는 보람도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게 업다. 후회해 본 적은 없는지.
“처음부터 먹고사는데 신경을 썼다면 장사를 했다. 돈도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후회는 없다. 해 본적이 없다. 내일 뭘 그릴까 하는 생각 때문에 한가하게 후회할 겨를이 없다.”

- 정말 처음처럼 변하지 않는 1만회를 맞는 황우럭을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
“너무나 고맙다. 도민들에게 실망을 안 주는 황우럭이 되겠다. 구조적으로 부정적 집단과 나와는 사이가 나쁘다. 하루하루 매일 같이 우리 주변에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갰다. 서민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절대로 변질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너무나 고맙다.”

1944년생으로 제주시 한림을 출신인 양 화백은 제주신문 편집국장 이사 논설위원과 제민일보 논설위원 화백, 제주타임스 논설위원 화백을 거친 후 현재는 코리아인너넷방송 방송위원화백으로 재직중이다. 제주도만화작가회 고문을 역임했다. 제주도문화상과 송하언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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